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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Nov 02. 2020

이 질문엔 그리움이란 태그를 붙여야겠다

다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하여

종종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가 있었다. 영화를 즐기는 깊이가 나와 아주 비슷해서 같이 혹은 같은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참 사랑했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작품의 메시지를, 감독의 연출 의도를, 배우의 연기를 곱씹으며 늦은 새벽까지 대화를 나눴다. 의견이 다를 때에도 그녀와 나누는 대화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모조리 흥미로웠다. 그녀와 감상을 나누고 나면 그제야 영화가 끝난 듯했다. 그런 친구가 있었다.


이제 나는 그녀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세월 탓을 좀 해보자면, 각자의 삶을 살았고 각자의 사랑을 하다 보니 시간이 우리 사이의 비좁았던 틈을 어마어마하게 벌려놓았다. 내가 영화를 바라보는 애틋함이 그대로이듯 그녀의 영화에 대한 짝사랑도 그대로일텐데, 시간이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각자의 인생은 도무지 그대로일 수가 없었다. 자주 하던 연락이 몇 달에 한 번이 되고, 몇 달에 한 번 하던 그 연락이 몇 년에 한 번도 되지 않게 서서히, 아주 서서히 멀어진 그녀와 나는 오랫동안 이별을 했다. 그 긴 이별을 겪는 동안 나는 자연스레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다른 주변인들과 나누게 되었다. 그녀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녀도 나처럼 처음엔 영화를 보고 나올 때마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는 걸 가까스로 다스렸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관점에 잠시 흥분하기도 했을 것이며, 결국엔 꼭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겠지.


그렇게 한참 잊고 살던 그녀가 불현듯 떠오른 것은 올해 여름이었다. <남매의 여름밤>이라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저히 이 벅찬 기분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메신저 앱을 켰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너 이 영화 봤어? 어땠어?' 묻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는데 막상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앞 벤치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연락은 하지 않았다.


이별이야 숱하게 겪었다. 20대를 채운 몇 번의 연애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잊힌 옛 친구들. 많은 이별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고, 생채기가 났고, 흉터를 남겼을지언정 결국엔 아물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이별이라지만 이제 처음 겪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술로, 고뇌로 밤을 지새울 때는 지났다는 뜻이다. 이제는 어떤 이별은 안타깝게도 영원할 수밖에 없어서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볼 수도 없음을 안다. 그리고 그런 이별에 무뎌지고 무뎌져서, 이제는 이름조차, 이별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을 즈음에 찾아오는 그리움의 끝이 건넬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움은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불가능'에서 출발한다. 익숙했던 대상과 멀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처음 이별을 겪는 동안 나는 꽤 힘겨워한다. 나의 일부를 떼어간 것처럼 실제로 가슴이 아프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믿을 수 없어 슬퍼진다. 그런 시간을 거쳐 겨우 이별의 일상에 적응하고 나면, 아주 조금은 무뎌진 마음의 상처를 다시 뚫고 들어오는 건 추억이다. 이별의 대상의 이름조차 잊고 멀쩡히 지내다가도 흔한 노래 가사처럼 함께 걷던 길, 함께 듣던 노래에 부딪히면 또다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그리움은 이별의 아픔보다 훨씬 긴 시간 힘을 가진다. 대상과 얼마나 긴 시간 함께 했느냐에 따라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추억과 부딪히며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쓴다. 추억마저 옅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오는 것은 '궁금함'이다. 내 그리움의 가장 끄트머리엔, 전혀 그를 연상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에 갑자기 찾아오는 어떤 질문과 그 대상이 존재한다.


던질 수 없는 질문의 무게는 어마어마해서 금방 나를 눌러앉힌다.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움의 그림자가 내 마음의 방을 덮친다. 누가 블라인드라도 쳐버린 양 마음에 드는 모든 볕이 사라진다. 한참을 그 사람 없이 멀쩡히 살아왔으면서, 한순간에 골방 같은 마음 한편에 들어앉아 멍하니 오래전 이별한 대상과의 관계를 곱씹는다. 그 사람이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건, 내가 그 사람을 잘 몰랐다는 뜻일까? 함께일 수 있었을 때는 왜 묻지 않았을까? 뒤늦게 생각해봤자 아무 쓸모없는 것들을 헤아려 본다.


이럴 때면 내가 지금 서서히 놓고 있는 관계들이 나중에 묻고 싶은 말이 가득해도 삼킬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버릴까 두렵다. 시간이 지나면 와인처럼 더 짙은 향기를 품을 줄 알고 지켜온 관계들이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는지, 아주 쿰쿰한 냄새를 풍긴다. 견디기 힘든 악취가 되어 쳐다보지도 않고 방치하고 있는 관계도 있다. 이후에 찾아올 궁금함이 내 발목을 붙들고 나를 괴롭게 하건 말건 그것들을 모두 내다버리고 정리해야 할지, 그리움의 그림자가 내 마음의 창을 가리지 않도록 관계들을 꺼내어 다시 닦아야 할지 모르겠다.


단 하나, 내가 정말 잘 아는 건 어떤 이별이든 결국엔 궁금함을 남길 거란 것이다. 그것도 딱 한 번, 그리움을 끝낼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말줄임표처럼, 한없이 말끝을 흐리는 사람처럼 그리움의 끝자락을 질질 끌며 끊기지 않는 물음이 남을 것이다. 아마 소중히 아꼈던 관계라면 그만큼 더 길게. 영화를 본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글을 쓰는 바로 이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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