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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Nov 04. 2020

사약길은 이제 시작, '스타트업'

남주와 서브남의 팽팽한 줄다리기

*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드라마 팬들이 즐겨 쓰는 축약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여주/남주: 드라마에서의 여자/남자 주인공.

      서브남: 여자 주인공의 애정을 두고 남자 주인공과 경쟁하는, 주인공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주연.

*** '스타트업'을 제외한 다른 작품의 이름은 <> 안에 표기하였습니다.


실제 드라마에서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방영 도중인 드라마의 남주와 서브남 중 누가 여자 주인공의 사랑을 차지하게 되느냐를 두고 인터넷 상에서 각축전이 벌어지는 일은 꽤 흔하다. 보통 서브남의 서사가 탄탄하거나 그의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일 때 이런 현상이 벌어지곤 하는데, 서브남이 여자 주인공과 이어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서브남을 응원하게 되는 것을 두고 '사약길을 걷는다 (어차피 안될 일을 바라는 것은 사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것과 같다는 의미)'와 같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꽤 많은 드라마 덕후들이 서브남을 응원하곤 한다. '어차피 남편은 ㅇㅇ'의 줄임말인 '어남ㅇ'이라는 메가 히트 신조어를 탄생시킨 <응답하라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일 테고, 사약길의 대표주자 <미스터 션샤인>의 유연석이나 <고백부부>의 장기용,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이재욱도 사약길을 걷는 수많은 드덕들의 앓이 대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드덕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발적으로 사약길을 걷게 만드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스타트업'의 한지평, 김선호다.


드라마 '스타트업' 인물 포스터


6회까지 밖에 방영되지 않은 드라마의 리뷰를 지금 쓴다니, 좀 웃기긴 하지만 남주와 서브남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논하려면 지금이 적기 아닐까? 초반부 등장 씬이나 인물 소개, 극의 흐름을 보면 분명 작가와 연출이 온 힘을 다해 남도산을 남자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1,2화를 다 보고 나니, 달미가 15년 동안 쌓아온 과거에 늘 함께 있었던 한지평을 남도산이 도대체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커뮤니티에는 '한지평 서사 미쳤다'는 글이 쏟아졌다. 달미가 힘들었던 순간마다 위로가 되어 주었던 지평의 편지. 여태껏 한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특징으로 자주 나타났던 타고난 능력과 까칠한 성격, 게다가 순딩이로서의 할머니와의 서사까지. 이걸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뒤집을 수가 있단 말인가? 달미가 지평에게 마음을 한 톨이라도 주는 순간, 거기서 끝일 것 같은데? 달미가 흔들리는 순간 바로 게임 오버 아닌가? 멋짐이란 멋짐은 모두 장착한 그에게 남도산이 어떻게 대적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3화를 보고서, 아하! 싶었다. (한지평을 지지하는 많은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역시 남주는 남주였다. 도산의 어색한 비범함이 그가 가진 키였다. 도산이 가진 매력은 우리가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온, 그래서 너무나 익숙한 주인공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평과 정반대인 대척점에 있다. 또 도산은 성장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보통의 성장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남주 성장물에서 보면 남주는 자신의 비범함에 대한 자기 확신이나 정의 실현을 위한 강력한 의지와 같은 것들로 자기 앞의 난제들을 깨부수어 가는데, 도산은 제 대신 그런 편견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그 어떤 것에도 욕심 없는 눈빛을 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차근차근 해나갈 뿐 이렇다 할 꿈도 없고, 그래서 전속력으로 달리지도 않는다. 주인공이라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느슨하다. 과거와 배경에도 우리가 평소에 보아 온 주인공들에 비해 극적인 무언가가 한참 부족하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애매한 사회성을 가지고, 코딩을 잘하는 너드 개발자가 어떻게 힘을 가지고 극을 끌어나갈까 의구심이 들겠지만, 바로 그 평범함이 남도산을 특별하게 한다. 현실적인 결핍을 두루두루 갖춘 기묘한 비범함. 완벽한 구성의 서브남과 정확히 반대 노선을 타는 남도산에게 신선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과거 언젠가 한 번은 어떻게든 엮였던 남주와 여주가 다시 만나 서로의 존재를 깨닫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두 인물의 중심 서사이지만, '스타트업'의 달미와 도산에게는 과거가 전혀 없다. 반면 서브 치고는 너무 '몰빵'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켜켜이 쌓인 지평과의 달미의 과거는 굉장히 짜임새 있다. 무려 15년이나, 가족과도 연관된 지평의 서사를 과연 도산이 무너뜨릴 수 있을까? 3,4화에서 도산이 내린 결정들은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한다. 도산은 과거 편지를 보냈던 지평의 그림자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대신, 지평의 지시와는 반대로 달미와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간다. 네트워크 파티에 참석해 달미를 찾은 것도, 명함을 건네며 계속 인연을 이어갈 수 있게 한 것도 지평의 부탁이 아닌 도산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편지를 주고받던 도산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려고 하며 달미와의 관계를 과거가 아닌 현재로 가져오려 노력한다. 자칫 관계가 깨어질 위험도 있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편지 속의 도산에게서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겨오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달미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 질색하는 혈액형 이야기에도 달미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건 다 걸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지평과 달미의 과거 서사에는 발전될 무엇인가가 없다. 지평이 도산인 척 편지를 쓰던 시절에 일부분 진심이었고, 편지를 쓰면서 자신도 치유받는 모습이 드러났면 모를까, 지평에게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던 과거는 달미를 만나기 전까지 그저 과거일 뿐이었다. 그런 지평이 편지의 진짜 발신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그 사실만으로 달미가 지평에게 흔들리게 될까? 달미가 가장 먼저 느끼게 될 감정은 자신을 속인 주변 인물들에 대한 '당혹', '배신감', '분노'일 것이다. 오랫동안 힘이 되어주었던 편지가 그저 관심과 사랑을 흉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할머니의 진심외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과거가, 달미를 위해 과거를 짜 맞추려 했던 노력이 도리어 지평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산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미에게 부딪혀 가는 동안, 6화까지 달미의 질문을 피하고 있는 지평에게 남은 것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아닐까. 내가 그 '도산'이었다고 일찍이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내가 만들 수 있었던 추억을 도산과 달미가 쌓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이제 도산과 달미의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날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한 팀이 되었다. 달미의 꿈이 도산의 목표가 되었고, 그들은 이미 출발선을 지나 첫 발을 떼었다. 앞으로 그들은 여러 고비를 겪으며 갈등을 겪기도, 서로 믿어주기도 하며 '현재'를 써나갈 것이다. 과거에 쓴 편지들이 현재에 꾹꾹 눌러쓴 코드와 발표 자료와 주주 명부와 제안서를 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캐스팅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한다. 김선호의 말끔하고 단정한 얼굴은 전형적인 남주의 특징을 갖춘 지평의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린다. 깨끗하고 신뢰가 가는 이미지로 능력 있는 팀장을 연기하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그간 그가 연기해 온 많은 역할들 중에 가장 부유한(?) 역할이 아닐까 싶은데 순진해 보였던 이전의 얼굴이나 예능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이 아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스타트업에서 김선호가 보여주는 모습은 '지평' 그대로 같다. 도산의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편안한 옷차림에 디버깅을 잘하게 해 준다는 체크 남방까지 (개발자는 셔츠를 입지 않는다. 남방을 입는다. 내가 개발자라서 잘 안다), 자칫 잘못하면 말 그대로 너드가 되어 버릴 수 있는 도산을 남주혁이 배우 그 자체의 멋으로 커버하고 있다. 또 그의 어색한 연기는 아주 수준급인데, 그는 얼마 전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어정쩡한 매력의 캐릭터를 굉장히 잘 소화하는 편이다. 전에 없던, 평범하고도 어색하게 비범한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는 데는 그만한 적격이 없다.


나는 사실 도산과 지평, 두 캐릭터 모두 마음에 든다. 달미가 두 사람 중 누구와 인연이 되든, 달미는 알아서 잘 살아갈 인물이다. 바위틈에서도 필 꽃 같이 내면이 단단한 인물. 글은 당연히 주인공인 도산이 달미와 이어질 거라고 썼지만, 방향을 휙 틀어 지평과 잘 되더라도 상관없다. 한 가지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부디 '스타트업'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고 끝까지 재미있는 작품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박혜련 작가의 전매특허인 청춘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진짜 청춘만이 할 수 있는 도전을 그린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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