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고 해질 때까지 들여다보는 마음
누가 덕질에 돌을 던지는가
어린 시절을 함께 겪은 친구들 중 대부분이 내가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다. 중, 고교를 거치며 나와 함께 성장한 그 그룹은 정상을 찍고 해체했고, 그 뒤로 한참, 거의 10년이 넘도록 '덕질'을 쉬었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바빠서였기도 했고, 데뷔 티저로 내 온 마음을 빼앗아갔던 그때 그 오빠들처럼 나를 끌어당긴 아이돌이 없어서였기도 했다. 그래도 꾸준히 아이돌 음악을 좋아하고 아이돌을 좋아했다. 여자 아이돌들의 무대 영상을 보고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의 마음을 가지기도 했고, 출연한 예능까지 찾아볼 정도로 관심이 가는 그룹이 드문드문 생기기도 했다. 한동안 그렇게 비교적 먼 거리에서 지켜만 볼 뿐, 마음 한쪽을 다 내어주고 싶을 만큼 진득이 눌어붙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 적 없었던 내게 새로운 아이돌이 찾아왔다. 자주 마음이 아리기 시작했다.
덕질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인들은 내게 '너도 너네 오빠가 여자 친구 사귀면 화가 나?'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결혼을 한 지금 그 질문은 '너는 남편도 있는데 아직도 덕질을 하면 어떡해!' 하는 타박으로 바뀌었다. 화는 나지, 그렇지만 그건 질투가 아니고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은 연애감정이랑은 완전히 다른 거라서 남편을 사랑하는 거랑은 전혀 관계없어,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만 인생의 반이 넘게 비슷한 질문에 시달려 온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만다. 이 소중하고 아까운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덕질을 하고 있었을 거니까.
결혼을 하기 전 나는 어떤 대상이든 충분히 빠져 덕질을 해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내 시간을 내어 남의 시간을 엿보는, 타인에게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바래고 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혼자서 들여다보고 간직하는 그 마음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고, 평생을 살고 싶었다.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완벽한 타인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마음을 앓아본 적 있는 사람이면 했다. 아름다운 누군가가 계속 빛나기만을 바라며, 작은 마음이라도 그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 적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질투가 나고 미워지는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그의 행복에 무엇이 최선인지 매일을 고민한 끝에 열애설이 안타까워지고 마는 그 복잡한 심경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다른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쉽게도 나의 배우자는 물리적 에너지 흐름을 사랑하는 전기 덕후 공학도라서 결혼 전 결심을 절반 정도밖에 지키지 못한 셈이 됐지만, 지금도 아이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내 시선은 같다. 값진 사랑을 품은 사람들. 내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끝까 오롯한 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짝사랑을 시작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마음엔 원망 한 조각도 품지 못하는 사람들. 누군가의 비웃음에도 그 사랑을 지킬 줄 아는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신들이 겪어보지 못한 이 순수한 사랑을 폄하하곤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그들이 더 무례한 것은, 내가 어떠한 형태의 사랑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 사랑은 값싼 마음일 뿐이라고,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잘생긴 얼굴을 보고 느끼는 쾌락에 불과하다고 내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이의 사랑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별로인 일도 없지만, 더 한심한 것은 그들이 폄하하는 대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질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의 사진을 한 장씩 모아 간직하며,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꿈꾸는 일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상 속에 남겨둘 수밖에 없는 곳을 이상향으로 품고 그곳이 무너지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세상에서 절대 닿지 못할 곳을 그리는 일이다. 상상으로, 꿈으로, 운이 좋을 경우에도 찰나로 겨우 마주칠 수 있는 세계를 동경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다이어트를 해야지, 올해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같은 가벼운 결심으로 들어설 수 있는 길도 아니다. 덕질은 준비된 사람들에게 행운처럼 온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현실엔 없을 완벽한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온다. 막상 도달하면 그 세계 역시 내가 경험한 다른 많은 세계와 같을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이상향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함께 온다. 그건 남에게 내어줄 사랑이 넉넉한 자들에게만 찾아오는 축복이다. 나 자신을 돌보는 데도 여유가 부족한 사람은 아무도 이처럼 순수하게 다른 이를 꿈 꿀 수 없다.
덕질을 시작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도대체 그런 데 시간과 돈을 왜 쓰냐며, 덕질에 들인 공을 다른 데 쏟았더라면 네가 무언가는 됐을 거라고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고등학교 땐 같이 밴드 음악을 하던 친구들이 아이돌 덕질을 한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하도 놀려대기에 '그래, 나 커서 그 오빠랑 결혼할 거야, 왜!' 하고 한 마디 쏘아붙였다가 너 같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 정신 잃고 숭례문에 불 지르는 거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 이들은 모른다. 나는 이미 무한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무언가다. 흘러넘치는 애정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쏟아부을 줄 아는 이타적인 무언가다. 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손잡고 삭막한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는 무언가다. 누군가의 누나이자 여자 친구이자 엄마이자 이모로, 그 모든 걱정을 짊어지고 한 사람을 걱정하고 생각할 줄 아는 엄청난 무언가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덕질도 유형의 무언가에서 시작되어 무형의 무언가를 품고 멀리멀리 나아간다. 그 고운 사랑의 물결에 올라탄 순간 내 세계가 확장되고 취향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해 새로운 언어를 배웠고, 그들이 좋아한 노래를 들었고, 그들이 머물렀던 곳을 찾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살면서 요긴하게 쓰게 될 이런저런 능력을 길렀다. 덕질은 나를 혼자서는 절대로 갈 수 없었던 곳까지 멀리멀리 보냈다. 덕질에 들인 공이 나를 이렇게 키웠다. 예뻐 죽겠고 멋있어 죽겠는 그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자라게 했다. 이것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