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이긴 하지만, 약간의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갓 대학에 입학해 아무것도 모르던 새내기 시절, 두 학번 위의 남자 선배가 페디큐어를 하지 않고 샌들을 신은 나에게 'ㅇㅇ이 오늘 다 벗었네.'라고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흐리며 눈동자만 굴렸고, 선배는 그런 나를 보고 그냥 농담인데 뭘 그리 당황하냐며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 선배들과 함께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민망했다. 숫기 없는 내 성격 때문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분위기를 흐린 게 아닌가 부끄러웠고, 매끄럽게 상황을 넘기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인 것 같아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비슷한 농담에 기죽지 않고 능글맞게 대답하는 동기를 떠올렸다. 다음 번에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머릿속으로 상상했다.스무 살의 나는 그것이 내게 가해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무지했던 것이다.
그 선배가 특별히 질이 나쁜 사람이었기에 그런 말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시절 내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나 역시도 그런 농담은 사회생활을 하려면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조금 더 된 이야기일 뿐인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도 '벗고 왔네' 같은 말들이 재미있는 농담 정도로 치부되곤 했던 거다.당황스러운 게 당연한데도 애써 별 것 아닌 일이라 여기며, 오히려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닌데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던 나도, 젠더에 대한 고찰 없이 어릴 적부터 보고 들어온 것 그대로 가볍게 뱉어버린 선배도 모두 어렸고, 무지했다. 시간이 지나 내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 된 만큼, 이제 여성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선배의 생각도 많이 자랐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 편이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뻔하고 뻔한 일화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일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여겨질 수는 없다. 농담이라는 이름을 빌어 가볍게 뱉은 말들은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가해였고, 나처럼 상처 입은 여성들은 같은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30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최근 들어 쏟아지는 여성 서사 중심의 소설과 영화들이 이 궤를 같이 한다.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은 이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다. 영화는 차별이 명확한 시대로 돌아가 유니폼을 입은 고졸 여사원들을 보여줌으로써 부조리와 정의의 골을 강조하고, 자칫 연약한 존재들의 승리라는 포괄적인 주제로 흐를 수도 있는 내용을 명백한 여성 서사로 돌려온다. 영화 초반부에 중심인물들이 부당함에 부딪혀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차별과 격렬히 싸우고 있는 현대의 여성뿐 아니라 남성까지 공감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포섭하기도 한다. 감정이입을 위해 치밀하게 짜인 앞부분의 스토리는 어쩌면 과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는 영화 후반부의 내용과 연출까지 이해하고 응원하게 만든다. 에이, 좀 무린데, 싶은 부분에도 울컥 눈물이 난다.
영화가 끝날 즈음, 대리의 직함을 달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사원들의 모습은 그들이 이뤄낸 성취가 토익 660점 달성이나 대리 진급이라는 처음의 목표보다 훨씬 위대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누군가 잠시 빌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웃음이다. 불의를 깨부수고 몸담은 곳을 지켜낸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누군가 대리로 진급시켜주기를 기다리고, 타인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수동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방향을 결정하고, 있을 곳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 자들의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확신을 가진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은 'Bear Hug Project'의 해석을 마친 사원들이 호프집에 모여 각자 부서의 업무와 관련된 내용, 그리고 그 뒷면에 숨은 뜻을 브리핑하듯 발표하는 부분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부서의 온갖 실무를 도맡은 살림꾼들이기에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들이 고졸이나 여자라는 편견에 갇혀 시키는 대로, 보잘것없는 작은 일만 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료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고, 팩스 발신처를 몰라 자영에게 묻는 최대리와는 아주 분명하게 대비된다. 실무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영어 토익반 사원들이 대리 진급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쓰게 와 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중요한 화두가 된지도 벌써 몇 해가 흘렀다. 그리고아직도 페미니즘을 외치는 여성들을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시류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 앞에 '지옥에서 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하고,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은 여자 아이돌에게 보이콧 선언을 하고, 심지어는 악플 테러를 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한쪽으로 기울어 굳어진 젠더 의식이 쉽게 유연해지고 곧아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이 보여준 과거 90년대의 차별보다는 현저히 개선된 지금의 현실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도 필요 없을 언젠가의 그 날을 꿈꾸게 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이 끝끝내 차별의 시선을 걷어내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던 것처럼, 우리도 결국엔 도처에 깔린 차별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게 된다.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이런 것일테다.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사원들은, 이자영과 정유나, 심보람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고 믿었다.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확고히 믿어보면 어떨까? 우리는 '예민한 것'이 아니라 '가해인 줄 모르고 지나쳤던 것을 짚어낼 수 있게 된 것'이고, '목소리가 커진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