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더 뭘 써야 할지 막막하다는 고민을 들었다. 매주 과제로 쓸 에세이의 키워드를 내주는데도 그렇다고 했다. 3편 정도 쓰고났더니 할 이야기가 바닥난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부언한다면 3개의 키워드가 한 사람의 생애를 아우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1. 내가 가장 외로웠을 때
2. 어릴 때 역경이나 장애를 극복했던 일
3. 어린 시절 내게 영향을 준 사람, 그 사건
과제 키워드를 설명할 때 나는 큰 사건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라고 주의시킨다. 남들 보기에는 사소해서 사건이랄 수도 없는 일이어도 된다. 라면을 끓이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된 일일 수도 있고, 크게는 이민을 갔다가 귀국했다, 심지어 우주적으로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사건이어도 괜찮다. 내가 중대하고 느꼈다면 뭐든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게 내러티브 창작의 매력이기도 하다.
가끔 예로 드는 게 어떤 화장품 회사 CEO의 자서전이다.
그녀는 아일랜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다섯 살 때인가 사실혼 관계였던 아버지가 죽었다. 그 후 어머니가 양동이에 비눗물을 담아놓고 마루를 솔질해서 닦고 있는데 신부가 집 앞을 지나가다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게 해주기로 했다고. 어머니는 솔질을 멈춘 채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 양동이를 들어 신부에게 비눗물을 끼얹었다.
얼핏 듣기엔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시시한 일 같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화를 자서전 첫머리에 내놓으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권위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자립심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태도가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를 만들어낸 바탕이라고 했다.
이처럼 사건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사소한 일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소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소재를 찾아내고 잘 다듬어서 발전시키는 것은 글쓰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소재는 중요하다. 글에서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퍼센트라는 주장이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처럼 글도 기량보다 소재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소재가 좋으면 일단 주목받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내 생각, 내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내 인생에 별난 사건이 있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압박감을 느낄 법도 하다.
그러나, 뻔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소재는 찾으려고 할수록, 다듬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할수록 풍성해진다.
주제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주제를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상황인 소재들을 찾아내고, 수집해서 정리해두고, 검토하고 다듬어 발전시키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어디서 소재를 찾을까?
첫 번째 고려할 것들은 뭐니 뭐니 해도 살면서 만난 일화나 에피소드들이다. 이게 제일 힘이 세다. 이 때문에 작가들은 우연히 마주친 일들을 메모해두기 바쁘다. 매스컴에 나온 진기한 소식, 지인이 전해준 시시한 소문, 길에서 본 사람들의 특이한 행동, 버스나 전철에서 듣고 본 승객들의 속삭임, 전철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노인들, 어떤 할머니 무리가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빨간 야구모자를 쓰고 있다 등등. 당장은 뭐야? 싶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단 내 눈길을 끌었다면 잠시 멈추고 세세하게 관찰하고 메모해둔다.
신인 시절, 낙원상가 앞, 길에서 소설가 선배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선배는 유명한 문학상을 받아 명성을 크게 얻고 있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입에 아이스바를 문 채 싸움 구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땡볕에 아이스바가 녹아서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는데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땐 그 모습이 창피하다고 모른 척 슬쩍 지나쳤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작가지!’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잠시 멈추고 자세히 관찰한다. 이게 기본이다.
두 번째, 소재를 구할 때 사전도 찾아본다. 쓰려는 주제나 키워드와 관련된 단어를 찾는다. 나아가 수고를 좀 더 들이지만 백과사전부터 속담이나 고사성어 사전 같은 이런저런 사전도 뒤져본다. (요즘은 각종 사전이 앱으로 깔려있으니 편리하기 짝이 없다) 사전찾기는 집필 중에 명확, 명료한 표현을 위해서도 많이 하게 되지만, 소재를 모으고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도 많이 한다.
세 번째, 법칙이나 원리 같은 것도 소재가 될 수 있다. 한때 ‘캔맥주를 마시는 일곱 가지 방법’, ‘우리가 몰랐던 바나나에 관한 진실’, ‘벼르면 마주치는 머피의 법칙’ 같은 제목의 글들이 많았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 있을 법칙이나 원리를 찾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소재들이 등장할 것이다.
요즘은 MBTI가 유행이다. MBTI에 관련된 과제글도 여러 편 받아 재미있게 읽었다. MBTI 이론을 좀 더 깊이 알아보다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성격 차이로 벌어진 사건, 혹은 MBTI를 맹신하거나 불신해서 벌어지는 사건, 가깝고 먼 사람들의 주장들이 생각나거나 찾아질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때는 내가 쓰는 글이 리포트나 설명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한다. 또 인터넷에서 수집한 정보를 그냥 늘어놓는 수준이면 곤란하다. 구체적인 인생사를 나의 취향, 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
네 번째, 속담이나 고사성어, 동서양의 명언과 일화 같은 것이 소재가 되거나 글쓸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20년 이상 주요 일간지 일면에 고사성어나 속담으로 시작되는 칼럼을 연재한 분도 있었다. 인기가 높아 하루도 쉬지 않고 연재됐었다.
다섯 번째, 통계 자료나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것도 소재를 얻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20년 전 일인데, 가족문제 고문 회의에 갔더니 결혼한 쌍 중 3분의 1이 이혼이라는 통계자료가 나왔었다. 모두가 놀라 설왕설래했었다. 그 회의에 참석하신 분들이 모두 쓰셨던 것인지, 직후 여기저기서 이혼 문제에 대한 글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소재는 많이 모을수록 좋다. 수집하는 과정에서 작품 구상도 점점 자라날뿐더러 글의 자신감도 점점 커진다. 소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 그걸 다 써먹지 않아도 글에선 힘이 넘쳐나게 된다.
소재는 어떻게 검토하고 다듬을까?
모은 소재를 선별하고 발전시키는 기준은 주제이다. 이 말이 막연하다면 다음 여섯 가지 선별 기준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저널리즘 스쿨에서 뉴스 기사 선정 기준으로 쓰는 것이라고 들었다. 에세이에서도 소재 선별할 때 이용하면 좋을 듯하다.
첫째, 시의성이다. 소재는 지금 이 사회가 당면해있는 문제를 보여주는 것일수록 좋다. 흔히 지금 우리 사회의 아젠다가 뭐야? 라는 물음을 받는데. 그 아젠다, 혹은 트렌드를 염두에 두고 소재를 다듬으면 좋을 것이다. 요즘 소확행이 트렌드라는 말이 들리는데, 거창한 목표나 인생 전체를 조감하는 시각이 아닌 일상의 소소한 감각을 내 취향으로 음미해보는 일화로 조정해본다면 소재를 흥미롭게 다듬게 될 것이다. 요즘은 페미니즘이 아젠다야, 하고 있는데, 남존여비 관점을 옹호하는 느낌이 되면 독자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외면할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에피소드라도 시의성을 염두에 두고 재해석해보자는 것이다. 이게 지나치면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억지로 짜 맞춘 분위기가 될 터이니,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듬어야 한다.
둘째, 근접성이 있어야 좋은 소재가 된다. 가까워야 취재하기 용이하여 설득력 있게 글을 쓸 수 있다. 취재의 힘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내 이야기니까, 내가 가장 잘 아니까 하고 넘어가 버리면 정작 쓰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달린다고 느낄 우려가 있다. 내 어머니 이야기니까, 내 결혼 이야기니까 내가 가장 잘 안다 싶더라도 어머니나 배우자에게 그 입장에선 어땠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주변의 비슷한 사례들, 어머니에 관해 쓴 글들,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들 등등을 다방면으로 취재해보면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질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구슬을 닦는다는 뜻이므로 이름에 걸맞게 갈고 닦듯이 살아야겠다는 이야기를 쓴 과제가 있었다. 자기 경험은 잘 풀어놓았으나, 집필 전 잠시 여유를 갖고 장신구를 만드는 과정을 구경이라도 해서 넣었더라면 형상화가 잘 됐겠다 싶어 아쉬웠었다.
좋은 소재란 취재하기 쉬워야 한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야 한다는 것 외에도 심리적인 거리 문제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알게 됐는데, 내가 공감하기 어렵다면 풍문을 전하는 막연한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기 쉽다.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소재라야 한다.
셋째는 저명성을 든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뉴스 가치가 높다고 한다. 우리 같은 일반인이라면 특별한 일을 했을 때 뉴스 가치가 생긴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지른 사람, 유명스타를 총격하여 이름이 알려진 사람 등등, 특별해지기 위해 범죄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의 사건, 사고가 전해지는 걸 보면 유명해진다는 게 참 어렵구나 싶다. 아무튼 내가 가진 소재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을지, 그걸 어떻게 부각할지 연구해본다.
넷째는 흥미성이라고 한다.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것은 일단 뉴스감이 된다고 한다.
다섯째는 진기성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생기면 뉴스거리가 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 개가 사람을 물면 흔한 일이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 기사가 된다는 말이 있다.
여섯째는 영향성이다. 아무리 재미있고 진기한 소재라 할지라도 이야기가 이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그 영향은 어떨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써야, 두고두고 널리 읽히는 진지한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