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정해놓은 8개의 주머니
나의 가방에는 8개의 주머니가 있다.
나는 가방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을 걷던 중,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가방의 첫번째 주머니에서
기쁨이라는 감정을 꺼내
인사하는 사람에게 건넸다.
다시 길을 걸어갔다.
이번에는 바닥에 침을 뱉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가방의 두번째 주머니에서
혐오라는 감정을 꺼내
침을 뱉는 사람에게 건넸다.
길을 걸어가며,
나는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나의 감정 가방에서
알맞은 감정을 꺼내 건넸다.
그러던 중,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는 사람을 만났다.
첫째를 열었다, 아니었다.
둘, 셋, 여덟…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손끝이 멈췄고, 나는 아무 것도 건네지 못했다.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가방에서 아무런 감정을 건네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정해진 가방 주머니를
뒤적이지 않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이름 붙이지 않은 채 건네기로 했다.
나는 이 글을 “감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학자들은 감정을 6가지, 8가지, 27가지처럼 나누어 설명해 왔고, 그 체계가 감정을 이해하고 말로 옮기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 글은 그 분류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다만 숫자로 정리된 주머니들만으로는 담기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아주 개인적인 체험에서 출발한 작은 질문이다.
살다 보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을 만난다. 이를테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 앞에서, 나는 동시에 불안하고 기대되고 낯설게 설렌다. 그 감정은 “두려움”이나 “기쁨” 같은 정해진 라벨 어디에도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그때 나는 내가 들고 있던, 누군가 정해놓은 8개의 주머니를 열어보지만 어느 것도 맞지 않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썼다. 분류된 감정의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움직이는 감정을 그대로 건네 보자는 이야기.
정해진 틀을 통과시켜 다듬기보다, 이름 붙이지 않은 채로 내 마음의 온도를 전하면 더 정확하게 닿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