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과 나
스타트업계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 중 하나는 “성장”이다.
Y Combinator를 만든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은 개인 블로그에서 “「Startup = Growth」, 스타트업의 본질은 성장”이라고 까지 말했다. [참조] Paul Graham 블로그
투자자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이 이해가 된다. 기관 투자자들은 펀드를 운영하고, 이 펀드는 유효기간이 있다. 즉, 투자 후 회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투자 포트폴리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투자자가 성장을 강조하다 보니, 창업자와 팀원들도 성장만을 외친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초고속 성장’, ‘하키스틱 성장 그래프’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믿게 된다.
나 역시 스타트업씬에서 오랜 기간 투자, 컨설팅, 멘토링을 하며 성장을 강조해 왔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론 성장은 분명 필요한데, 성장만 외치는 것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스타트업에게 성장은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성장이 있어야 투자와 파트너십 기회를 얻고,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좋은 인재를 채용할 수 있다. 초기 스타트업에게 성장 목표를 숫자로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탄탄한 기반을 갖추지 못한 성장이다. 이는 위기에 취약하다. 유동성이 풍부했던 코로나 시기에 일단 외형 수치만 키우고 큰 투자를 받은 뒤 매출과 수익이 따라가지 못해 기업가치 하락과 구조조정을 했던 사례들이 많았다. 성장과 함께 해야 할 성숙이 빠진 것이다.
스타트업에게 성장(Growth)은 매출, 고객 수, 투자금, 직원 수처럼 외형 숫자로 드러나는 변화다. 얼마나 큰 시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가고 있나? 의 질문에 숫자로 대답해야 한다.
성숙(Maturity)은 기업문화와 리더십이라고 본다. 숫자로는 보이지 않는 질적 변화다. 우리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의 질문에 명확히 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에 또 필요한 것이 메타인지 능력이다. 스타트업은 고객의 관점을 이해하고, 투자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개인은 상대방 즉, 타 부서의 동료 또는 고객이나 파트너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인간과 성숙한 팀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참고] 고수와 하수의 차이. (페이스북 포스팅 링크)
성장만 하고 성숙하지 못한 스타트업은 빠르게 커질 수 있지만 지속가능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1) 불명확한 비젼: 매출은 늘지만 고객 이탈률이 높거나, 서비스의 핵심 가치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는가에 대해 모호하게 된다.
2) 기업문화 붕괴: 많은 멤버들이 들어오고 나가다 보니, 상호 신뢰를 쌓을 시간이 없다. 성과 지상주의에서 팀워크를 기대하기 어렵다.
3) 리더십 부재: 창업자를 비롯한 초기 멤버들은 여전히 ‘슈퍼 운영자’에 머물러 있고, ‘리더’로 성장하지 못한다. 결국 팀원들은 알아서 일하려 하지 않고, 창업자는 이런 종업원들을 탓한다. 겉으로는 잘 나가지만, 내부에서는 이미 균열이 가 있다.
[참고 글] 초고속 성장을 했던 Dell Korea 에서 배운 교훈
반대로, 성숙했지만 성장하지 못한 또 다른 극단도 있다. 리더와 조직 문화는 따뜻하지만,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없고, 장기적 생존이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이런 조직의 특징이 회의가 많고 토론이 길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 새로운 시도에 보수적이고 실행이 느리다. 이런 스타트업은 좋은 팀이지만 존재감 없는 회사로 남는다. 성숙도는 충분하지만, 성장의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숙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여러 회사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해결책은 ‘단순하지만 어렵다.'
1) 실행 후 성찰, 성찰 후 실행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프로젝트 아이터레이션. 애자일 방법론의 ‘회고’처럼, 정기적으로 팀의 성과와 과정을 돌아보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통해 학습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2) 핵심 가치와 피드백 문화를 만든다. 창업자는 단순히 매출 숫자만 제시하지 말고, 핵심 가치와 미션을 명확히 하고, 타운홀 미팅이나 1:1 미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주 대화해야 한다. 이런 대화가 조직의 메타인지를 높이고, 단단한 문화를 만든다.
이 이야기는 스타트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커리어 초반에는 성장에 집중했다. ‘최연소, 초고속 승진, 두 자릿수 연봉 상승’과 같은 것에 집착했다. 그래서, 성장하는 산업을 선택했고, 더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를 쫓았고, 성장이 멈춘 곳에서는 정치만 남는다는 것도 경험했다. 하지만, 성과와 속도에만 집중하니 건강, 사람과의 관계, 방향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반면, 커리어 후반기로 접어들며 예전만큼의 열정과 집중력이 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경험을 나누며,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성숙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성장은 회사를 크게 만들고, 성숙은 회사를 단단하게 만든다. 성장은 나의 사회적 위치를 잡아주고, 성숙은 나를 인간적으로 완성시켜 준다. 성장의 엔진과 에너지가 충만한 팀은 성숙한 멤버가 필요하고, 커리어가 어느 정도 다다른 사람에게는 다시 성장의 기운을 불어넣어 줄 젊은 팀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은 단순한 속도가 아닌 지속 가능한 방향과 거리가 중요하며, 현재는 멀리 가기 위해 오래 버텨야 한다.
나 자신 역시, 오랫동안 이 일을 하기 위해 성장과 성숙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