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걸 현실로 보나요?

영화 신데렐라(2015)와 공간적 현실 관념에 관하여

by 전해리

*이 작품의 모든 글은 해당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문 대사의 경우,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번역을 존중하되

독자적 영화 해석에 따른 필요로 인해 필자 본인이 되도록 직접 번역합니다.

*조금 더 원활한 설명을 위해 때론 직역하거나

원래 대사의 의미를 차용했음을 감안해주세요*

*작품 제목과 작품에 나오는 대사, 작품 속 고유명사에는 작은따옴표를 달았습니다*

***해석은 얼마든지 바뀝니다.

고로, 절대적이고 완벽한 해석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걸 현실로 보나요?>

: 나는 여전히 놀라고 싶다 _ 공간 관념


- 중점적으로 다룰 영화

영화 ‘신데렐라’ Cinderella (2015년作) : 영화 채널 파편적 및 1차례 감상

글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 : 문서화_약 3개월


어쨌든 사람은 현실을 본다. 그러나 그 현실은 하나가 아니다. 현실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정 현실이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그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뿐이다. 모든 현실은 상대적이며 잠재적이다. 각자 보는 현실이 다르고, 또 스스로도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기에 실제로 발생 가능한 현실의 개수는 무한한다. 다만, 다양한 시각(視角)이 켜켜이 중첩된 현실 중 딱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삶은 격변할 것이다. 굳이 타인의 의견과 간섭이 아니더라도 본인에게 내제된 여러 관념과 관점만으로도 수없이 갈팡질팡하다 하나의 현실을 신뢰하기로 결심하면 신념이 현실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선택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인지되고 발생하는 현실의 개수가 아무리 무한해도, 사람의 삶은 오직 하나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신데렐라(Cinderella) 아니, 엘라(Ella)의 처지에 놓인다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려 행동할 수 있을 것 같나?

엘라에게도 불행이 끼어들 틈이 없는 삶이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엘라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없이 제 삶의 주인공이자 통치자였다. 그러나 행복은 영원할 수 없었다. 엘라의 엄마가 돌아가시자 행복에 균열이 가고, 아빠가 돌아가시자 행복은 무너진다. 아빠의 죽음 이후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은 악마 같은 본색을 드러내면서 엘라의 인생엔 불행이 닥치고 행복은 홀연히 떠난다. 삶의 주인공은 무대에서 쫓겨나 시험대에 오르고, 통치자는 태평성대의 평원을 거닐다 난세의 절벽에 위태롭게 선다. 의도한 적 없었기에 의문이 절로 든다―삶의 주인이 왜 삶에 좌지우지되는가, 사람은 왜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해지는가, 삶의 주도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엘라의 이름은 ‘엘라’이지만 ‘신데렐라’라고도 불린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엘라’라는 뜻으로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이 엘라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별명에서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이 엘라의 현실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은 엘라를 재산도 희망도 없는 천애고아, 함부로 부려도 상관없는 아랫사람, 멋도 뭣도 모르는 촌뜨기, 동물과 대화하는 괴짜로 하대하며 온갖 집안일을 시키는 것만으로 모자라 본인들의 시중까지 들게 한다. 엘라는 추운 다락방으로 쫓겨나 아무런 도움없이 집안일을 하고 군말없이 시중을 든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따져 보자면, 엘라가 새엄마와 의붓언니들 밑에서 살림과 잔심부름을 도맡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듯싶다. 그러나 감정을 조금 넣어 보자면, 엘라는 혼자 가사일에 붙박여 고용인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갖은 구박을 견디고 있다. 다시 한번 질문, 당신이 엘라의 처지라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엘라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그 집을 당장 뛰쳐나왔다. 하지만 엘라는 엄마와 아빠 대신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이 있는 그 집을 떠나지도 않고 부당한 처사 아래서 불평불만도 않는다. 의아하겠지만, 이 점에서 바로 현실을 대하는 엘라의 관념이자 존엄이 드러난다.

누구든 엘라의 현실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데, 어떤 답이 정답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어쩌면, 새엄마와 새언니들이 보는 엘라의 현실이 절대적으로 맞을지도 몰랐다. 부모님도, 밝은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엘라. 엘라 또한 새엄마와 새언니들이 보는 대로 자신을 비천하게 평가하며 살 수 있었다. 혹은, 집을 뛰쳐나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라는 그러지 않았다. 본인의 현실을 낮게 보지도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탈출해야 하는 공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현실이 어떻든, 실제 현실이 어떻든, 가능한 현실이 어떻든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았다. 즉, ‘용기를 가지고, 친절하라(“Have courage and be kind”)’는 엄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 대신 그렇게 될 수 있는 현실을 보았다(She saw the world not always as it was, but as perhaps it could be).’ 덕분에, 엘라의 모든 행동은 용기와 친절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므로 엘라는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의 악랄한 천대에도 실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무례 역시 용기와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자연스레, 그 용기와 친절을 간직하고 펼치는 현실은 집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용기와 친절을 잃지 않고 마법을 믿기로 엄마와 맹세하였듯, ‘보이지 않아도 엄마는 늘 함께 있으며 이 집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이니 이 집을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한다(“Your mother’s here, too, though you see her not. She’s the very heart of this place. And that’s why we must cherish this house”)’고 아빠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삶의 역경이 닥쳐도 도망가지 않고 오롯이 마주할 힘을 준 부모님이 엘라에게 있어 행복이라면, 반대로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은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엘라는 그들이 특별한 사정도 없이 본인을 업신여겨도 꿋꿋이 감내한다. 이를 두고 불행이 괴롭혀도 기꺼이 감당한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엘라는 집에 행복이 떠나고 불행이 머문다고 해도 매일 매순간 사랑을 훌륭하게 증명한다. 게다가, 불행이 아무리 엘라를 핍박해도, 또 그러한 불행이 주인인 양 집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녀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이 엘라 자신을 대하는 식으로 엘라도 그들을 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을뿐더러 그런 생각을 추호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한다. 어떤 고초에도 용기와 친절로 마주하는 엘라의 태도는 존엄 그 자체이자 스스로의 삶에 대한 예의다. 고로, 신데렐라는 구박데기의 이름이 아니라 고난조차도 피하지 않고 용기와 친절로 포용하는 아주 고결한 영혼의 이름이다.

그러니 엘라를 우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세상을 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이름인 ‘엘라’라고 불러도, 불행에 굴하지 않고 도량을 베푸는 ‘신데렐라’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엘라는 이름 자체보다 그 이상을 중요시한다(“Never mind what they call me”).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누군가는 동물을 사냥감, 가축으로 보지만 엘라는 소중한 생명체, 친구로 본다. 키트(Kit)는 수사슴을 쫓지 말아 달라는 엘라의 부탁에 ‘그게 바로 사냥감의 숙명(“But we’re hunting, you see. It’s what’s done”)’이라고 가벼이 대답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타고났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Just because it’s what’s done doesn’t mean it’s what’s should be done”)’고 진지하게 응수한다. 엘라의 관점이 표면과 현실성 그 이상으로 가치와 실현성에 닿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선천성보다 가능성과 의지를 더 높게 산다. 겉으로 보았을 때 하찮고 미약한 것들도 마땅히 제 운명을 주도할 어엿한 주체로 보는 것, 이것이 엘라가 현실을 살아가는 관점에 따른 관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이 키트와의 만남을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이끈다. 첫 만남의 첫 순간 엘라가 사슴을 향해 편견없이 보인 시선은 언제나 본질보다 본분부터 우선시해야 했을 왕자인 키트의 마음을 끌기 충분했을 터이다. 다른 이들에게 이름 대신 직위로 불리는 데 익숙한 키트가 엘라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나요?(What do they call you?)”라고 묻는 건 자연스럽다. 또한, 그가 질문을 도로 받았을 때 본인의 이름을 밝히고는 ‘견습생(apprentice)’이라 소개하는 모습은 주어진 부담과 기대를 사양하고 오롯한 자아를 세상에 드러내고픈 의향을 내포한다. 그러한 키트를 섬세한 성정과 순수한 마음씨의 엘라는 시종일관 인간적 예의를 갖춰 대등한 인격체로 상대하고, 그의 정체가 무도회에서 드러나도 왕자가 아니라 여전히 그저 키트로 대함으로써 그 둘의 사랑이 우연에서 시작했으나 요행은 아님을 확정시킨다. 게다가 왕자의 소신에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던 국왕의 바로 앞에서 아드님이 아버지를 평소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는지 용감하게 설파하면서 부자관계의 평화에도 조력하기까지 한다. 키트는 엘라 덕분에 각성하고 본인에게 마땅한 삶으로 비로소 들어선다. 부여된 조건에서 키트의 자의식을 끌어내 준 엘라는 정작 그 반대의 상황에 놓인다.

엘라는 키트와의 첫 대면에서 본인의 이름을 섣불리 밝히지 않는다. 꺼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물며, 엘라가 이름을 고백하는 순간도 유보된다. 이는 엘라가 현실을 대하는 태도의 맹점이다. 옳은 현실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꾸 그것으로 그치기만 한다. 관념과 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엘라의 처지는 그대로다. 발전이 없다. 발전이 도모될 기반이 덩달아 없기 때문이다. 기반이자 엘라가 현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의 멸시로 초라해진 현실, 즉 신데렐라는 현실의 이름이다. 매우 모순적이게도 엘라가 현실을 인정하고 옳은 현실을 실현시키는 계기는 엘라의 불행에 있다. 신데렐라라고 불린 그날 엘라는 모멸감을 못 견디고 말을 타고 숲속으로 뛰쳐나가고 키트를 만난다. 기실 불행은 새로운 행복과 사랑의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고로 엘라는 본인의 불행을 삶으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불행의 인정에 있어 우연은 항상 도움이 된다. 그 우연들은 매번 마법 같다. 영화 속 마법은 신분상승을 위한 분장의 도구가 아니라 의지를 뒷받침할 후원이요 본모습의 수용을 거들 응원이다. 키트가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 채 견습생 친구로 알고 만나러 가기 위해 엘라는 손수 어머니의 분홍색 드레스를 고쳐 입지만 불행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역시 불행은 전화위복이 되어 기회로 변한다. 요정대모(Fairy Godmother)는 엘라의 드레스를 평소 입던 대로 푸른색으로 바꿔주고, 화려한 겉피 대신 맨발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유리 구두를 선물한다. 엘라는 달라지기보다는 향상된 모습으로 궁전으로 가고 키트는 그런 엘라를 단번에 알아본다. 녹초에게 단비 같은 시간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지질한 현실까지도 친절과 용기로 감사할 줄 아는 엘라에겐 그마저도 소중한 추억과 새로운 삶을 향한 기폭제로 받아들이기 충분하다. 희망이 선사하는 새로운 용기와 친절은 마침내 현실을 시인한다.

엘라 : “왜 그렇게까지 못되게 구는 거죠? (Why are you so cruel?)”

하기는, 불행의 악질엔 합리적인 이유 따위 애초에 없다. 유일한 쓸모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용기와 친절, 옳음을 지향하는 태도를 더욱 빛내 주는 것뿐이다. 그 태도의 일관성은 계속해서 주변의 존재들을 고무시켜 그들로 하여금 같은 태도를 불러 일으킨다. 같은 뜻이 모여 비로소 기회가 갖춰지니, 마지막으로 친절하고 용감하게 본인이 현재 처한 현실을 인지하되 지향하는 바를 피력해야 할 때다.

키트 : “당신은 누구인가요? (Who are you?)”

엘라 : “저는 신데렐라입니다. (I am Cinderella.)”

“저는 공주가 아니에요. 마차도 없고, 또 부모님도 안 계시고요, 지참금도 없습니다. (I’m no princess. I have no carriage, no parents, and no dowry.)”

“저 예쁜 구두가 발에 맞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I do not even know if that beautiful slipper will fit.)”

“그런데 만약 맞는다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겠어요? (But if it does… will you take me as I am?)”

“당신을 사랑하는 평범한 시골 소녀로요. (An honest country girl who loves you.)”

서로가 서로에게 반려라는 확신은 유리구두가 아니라 엘라의 맨발에서 온다. 엘라는 사랑함으로써 마침내 삶에 발을 디뎌 행복을 들였다. 이로써 다시 진정한 삶의 주인공이자 통치자가 된 엘라는 초상화가 필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해석과 감상은 그녀의 삶에 들어설 틈이 없으니까. 키트도 내키지 않아 했던 초상화엔 다른 용도가 생겼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부모님을 추억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퀸(Queen)’이 된 엘라가 살게 된 곳, 궁전에 걸린다. 엘라의 행복은 단순히 부모님과 함께 했던 삶에 그치지 않고, 엘라의 사랑은 부모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보고 싶은 현실을 보는 엘라의 공간적 현실 관념은 불행을 대면할 때뿐만 아니라 운명이 내놓는 도전에 직면할 때 더더욱 가치로우며 삶의 주도권까지 쟁취한다. 옳은 신념은 늘 옳은 현실을 찾아내니 말이다.

우리는 행복의 주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삶의 주인에 불과하다. 그 삶은 우리에게 마냥 우호적이지 않다. 어떤 때에는 행복을 앗아가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우린 더더욱 삶의 주인으로서 위엄을 놓아선 안 된다. 원칙과 성실이 부재한 태도에 삶은 당신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다. 불리한 여건과 좌절 속에도 꿋꿋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성심과 기개를 발휘하는 태도야말로 삶에 대한 예의다. 그 예의는 항용 본인이 관철하고픈 현실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현되지 못할 현실은 없다, 당신이 원하는 현실이 무엇이든, 당신이 눈여겨보기만 한다면. 지금도 눈 앞을 떠다닐 수많은 현실에서 당신이 선택하고 싶은 현실은 결국 당신이 선택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곧은 마음씨와 씩씩한 정신으로 본인이 보고 싶은 현실을 알아보고, 굳건히 믿길.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길.

나의 삶과 내가 선택한 현실에 대한 신뢰로 또 한 편의 글을 이리 마무리한다. 비비디 바비디 부(Bibbidi-Bobbidi-Boo)!


글쓴이의 코멘터리

애정하는 신데렐라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 여전히 필요함을


비하인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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