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놀라고 싶다 _ 시간 관념
*이 작품의 모든 글은 해당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문 대사의 경우,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번역을 존중하되
독자적 영화 해석에 따른 필요로 인해 필자 본인이 되도록 직접 번역합니다.
*조금 더 원활한 설명을 위해 때론 직역하거나
원래 대사의 의미를 차용했음을 감안해주세요*
*작품 제목과 작품에 나오는 대사, 작품 속 고유명사에는 작은따옴표를 달았습니다*
***해석은 얼마든지 바뀝니다.
고로, 절대적이고 완벽한 해석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 중점적으로 다룰 영화
영화 ‘테넷’ Tenet : 영화관 _ 1차례 관람
영화 ‘어라이벌’ Arrival (한국 개봉 제목은 ‘컨택트’) : 영화 채널 _ 1차례 관람
- 언급될 영화
영화 ‘베리굿걸’ Very Good Girls : 노트북 _ 1차례 관람
- 글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 : 뇌리 _ 약 6개월, 문서화 _ 약 3개월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삶은 영원한 현재가 아니겠습니까.”(‘맑고 향기롭게’, p190)
그렇다면 현재는 과연 언제인가. 현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현재는? 간단하다. 바로 지금이다. 그러니까 그 지금이 정확하게 언제냔 말이다. 당장? 당장 눈 앞에 벌어지는 일에만 충실한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가? 사람은 지금을 못 산다. 지금만 살기에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은 동물이다. 우리는 지금을 산다면서 번번이 오관(五官)을 가린 채 기껏 한다는 게 과거를 만지작거리고 고작 해 본다는 게 미래를 더듬거리는 게 전부다. 추억을 회상하다 걱정과 기대를 공상하며 갈팡질팡하면 하루는 어느새 맥없이 끝난다. 마음이 과거에 구속되고 미래에 속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삶은 어정쩡해져 결국 자책은 계속된다. 현재는 이렇게 혼재되어 있고 또 부재한다. 시간을 안다고 해서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만약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시간 개념을 내려놓는다면 오히려 수많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현재를 변별하고 어중간한 삶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시간을 순행(順行)적으로, 또 선형(線型)적으로 인식하는 데 익숙한 이유는 시간이 일방향(一方向)적이며 순차(順次)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풀이하자면, 시간은 낮 1시에서 낮 2시로 가지 낮 2시에서 낮 1시로 가지 않는다. 지금이 밤 9시면 8시 59분는 과거, 9시 1분는 미래다. 오늘이 2일이면 어제인 1일은 이미 지난 과거고, 내일인 3일은 장차 다가올 미래다. 또한 광범위적으로 보면, 현재인 21세기는 19세기, 20세기에 이은 인류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시간은 22세기에 있다가 19세기에 가지 않고 21세기 다음으로 1세기가 오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스레 과거, 현재, 미래를 구별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류의 관습적 시간관을 ‘테넷’(Tenet)과 ‘어라이벌’(Arrival)은 획기적으로 뒤엎는다. ‘테넷’은 시간을 거스르고 뛰어넘는다. 주인공들은 과거의 시간대와 미래의 시간대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심지어 각자 다른 시간대에 있어도 소통할 수 있다. ‘어라이벌’의 경우 시간에 물리적으로 접근하는 ‘테넷’과 달리 사고(思考)적으로 접근한다. 지나간 시간들이 기반하는 기억은 미래의 비경험성과 상충되지 않고 도리어 미래의 기억이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낸다. ‘테넷’ 속 시간 역행과 ‘어라이벌’의 미래 회상은 우리가 익히 알던 시간 법칙을 무너뜨린다. 그들의 시간은 가히 다방향(多方向)적이고 비선형(非線形)적이다. 복잡하다. 덩달아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분명한 구분선까지 무효가 된 것 같지만 그 와중에도 영화를 보는 사람의 심상엔 희한하게도 유효하다. 공통적으로 두 영화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언제가 과거였고 현재이고 미래인지 구별할 수 있게끔 둔다. ‘테넷’만 하더라도 캣(Kat)이 사토르(Sator)를 죽이는 시간대와 스탈스크 작전이 행해지는 시간대가 동시에 일어날 때는 과거, 현재, 미래가 각 3개의 평행선으로 존재해 제각기 운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시간 순행자와 역행자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장면에선 그것들이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라이벌’도 마찬가지로 영화의 결말이 드러나기 직전까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되고 심지어 루이즈가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관객은 과거, 현재, 미래를 뚜렷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런데도 과거, 현재, 미래를 인지하는 능력 혹은 인지하려는 노력은 실상 무의미해지고 만다, 영화 속에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그리고 시간의 섭리는 여전히 일방향적이고 순차적이다.
‘테넷’에서 주인공들은 정해진 과거를 바꾸고, 미래는 이미 정해진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원래의 세계라면 캣은 총알을 맞고 죽어 더 이상 현재, 미래를 경험할 수 없고 과거로 남겠지만 ‘테넷’에서는 과거 시간대의 배경인 오슬로 공항으로 가면서 살게 된다. 또한, 스탈스크 작전에서 미래에서 역행한 블루팀과 현재의 레드팀이 같은 장소에서 존재하는 모습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다. 그저 동시에 다른 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모든 작전이 끝났을 때 닐은 주도자에게 있어 미래에서 온 존재임이 밝혀지는데 이는 앞선 내용들이 미래의 과거였고 과거의 미래가 됨을 명시한다. 즉 그들이 오고 간 건 시간대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단순한 특정 시점을 넘어 시간의 부분들이다. 결국 모든 시간은 현재였으며 또 현재는 시간들의 연결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문장을 고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테넷’에서 주인공들은 현재를 살기 위해 정해진 과거의 시간대를 활용한다. 그들은 시간을 되풀이하지 않고 되감기 때문이다. 마치 한 번 들은 테이프를 되감기 해서 다시 듣는 모양이다. 똑같은 음악이 흐른다 하더라도 한 번 들을 때의 나와 다시 들을 때의 나는 다르다. 다시 들어도 이전의 감상은 남는다. 같은 맥락으로,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했던 행동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포함된 채로 시간은 과거에 형성되었고, 그들은 그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 이 점에서 시간은 시각의 모음집 이상으로 행동의 연속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 속에서 행동하는 걸 수도 있지만 우리의 행동이 시간을 낳는 걸 수도 있다.
유연한 판단력과 절실한 행동력을 갖춘 현재는 원하는 미래를 직접 끌어온다. 미래는 현재의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라 한낱 인간은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소극적 가치관은 캣과 주도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음 속에 바람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길 여력이 없었던 둘에게 변화가 찾아온 계기에는 시간을 거스르는 인버전(Inversion) 기술도 요하겠지만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과 굳센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의 해방과 인류 멸망 위기 해소라는 목적이 각자 분명해진 후 시간의 쓰임새는 주도적인 쪽으로 확연히 달라진다.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앉아 있지 않고 본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으로 몸소 달려간다. 그들의 행동 덕분에 ‘테넷’ 속 시간은 실질적으로 감촉되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미래는 무한한 경우의 수이며 내가 그 미래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도 그 모습은 시시각각 변모한다고 믿은 필자로서는 개별적 인격체인 등장인물들의 미래의 양상과 그 배경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일하게 결정된 모습을 띠는지 의아했다. 감독은 어째서 미래를 가능성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행동의 적극성과 간절한 목적이란 조건 아래, 하나의 현실에 여러 미래가 걸려 있는 대신 오직 하나의 미래를 이어 놓았다는 건 곧, 바라는 미래를 실현시키려고 현재 노력할 때 그 미래가 바로 현재가 됨을 의미한다.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모습에 영향력을 끼친다기보다는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현재의 행동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논리는 ‘테넷’만의 것이 아니다. ‘어라이벌’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비롯된다. 루이즈는 미래로부터 샹 장군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고 필사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래의 루이즈 자신이 말해 주었다던 샹 장군 부인의 유언을 그대로 전달하며 마침내 지구엔 평화가 다시 도래한다. ‘어라이벌’에서 보다시피 지금의 행동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지금의 행동을 결정한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미래의 내가 과거에 응당 취했을 만한 태도다. 하지만 우리가 고쳐야 할 문장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건가? 그럼 이 두 영화는 운명론적 영화라고 규정할 수 있나?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난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두 영화는 운명을 결정 짓는 의지에 관한 영화다. 전부 다 알게 된 주도자는 끝내 죽게 될 닐에게 묻는다.
주도자 (Protagonist) : “하지만 우리가 다르게 행동하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But can we change things? If we do it differently?)”
미련을 보이는 주도자의 질문에 닐은 명쾌한 답을 준다.
닐 (Neil) :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야. (What’s happened happened.)”
그리고 설명하길.
닐 (Neil) :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변명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돌아가게 하는 믿음이란 말이야. (Which is an expression of faith in the mechanics of the world, not an excuse to do nothing.)”
아주 만약, 닐이 다르게 행동한다면 미래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닐은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본인이 희생할 길을 이미 선택한 것뿐이다. 본인이 죽는 미래로 연결되는 길로 가는 현재를 살기로 닐은 기꺼이 선택했다.
주도자 (Protagonist) : “이런 게 운명인가? (Fate?)”
닐 (Neil) :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Call it what you want.)”
주도자 (Protagonist) : “너는 뭐라고 부르는데? (What do you call it?)”
닐 (Neil) : “현실. (Reality.)”
그러므로 ‘테넷’, ‘어라이벌’ 이 두 영화는 본인이 살아갈 현실을 결정해야 하는 현재에 관한 영화다. 루이즈도 훗날 딸 한나(Hannah)를 병으로 잃을 아픔에 놓이게 될 걸 알면서도 딸을 낳기로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즈 (Louise) : “이 병을 제지할 순 없어. 그건 마치 수영을 잘하고, 시를 잘 짓고, 이 세상에 호기심을 갖는 너의 놀라운 재능이 발휘되는 걸 내가 멈출 수 없는 것과 같아. (It has to do with a really rare disease. And it’s unstoppable. Kind of like you are, with your swimming and your poetry and all the other amazing things that you share with the world.)”
현재는 자연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막을 수 없는 현실이다. 어떤 현재를 선택해도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현실들이 있을 것이다. 선택하기로 한 자의 책임이다. 그 미래엔 슬픔도 있고 고통도 있다. 그럼에도 선택할 것인가? 그 미래를 현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테넷’과 ‘어라이벌’처럼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지도 않고 주인공처럼 특이하거나 걸출한 능력을 갖추지도 않았다. 우린 그저 평범한 현실을 살아가는 범속한 인간일 뿐이다. 닐은 궁극엔 본인의 죽음을, 루이즈는 딸의 죽음을 알고도 그 길을 선택했다지만 우리에겐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우린 과연 그 운명을, 슬픔과 고통이 존재할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을까?
제리 (Gerri) : “넌 할 수 있어. 관건은 네가 할 거냐는 거지. (Yes, you can. But the question is ‘will you.’)”
릴리(Lilly)와 제리가 좋아하는 남자는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리는 릴리에게 자신이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반대로 릴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제리가 모르는 점이 있다면, 릴리와 그 남자가 서로 통한다는 점, 또 릴리가 사랑을 선택하느라 우정을 잃을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제리가 우물쭈물거리는 릴리에게 건넨 말은 열망하는 현실의 실현 여부는 가능성이 아니라 의지에 달렸음을 내포한다. 제리가 저렇게 말하기 전까지 원래 릴리는 남자를 마음에 두었으며 그 남자도 자신과 같은 마음임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그 세상이 전과 같지 않게 될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였다. 문제는 행동으로 옮기느냐 마느냐. 릴리는 모든 걸 알고도 행동에 옮긴다. 누군가는 분명 겪을 법한 몹시 현실적인 릴리와 제리의 이야기인 ‘베리 굿 걸’은 엄밀히 말해 초현실적인 이야기인 ‘테넷’과 ‘어라이벌’과 같은 핵심을 공유한다. 바로 이것: 하면, 되니, 해야, 된다. 이제 문장을 마저 고친다: ‘테넷’에서 미래가 이미 정해진 모습을 띠는 건 주인공들이 그 미래로 결정되는 현재를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결정해야 한다. 내가 하면(can) 그렇게 될 수 있다(will)는데, 나는 정말 슬픔과 고통이 존재할 운명을 선택할 수 있을까?
루이즈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건 뜬금없이 예지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외계인들과 소통을 꾀하며 ‘헵타포드(Heptapod)’라는 외계인들의 언어를 익혔기 때문이다. 루이즈의 변화는 언어가 사고 체계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설명된다. 헵타포드는 인간의 언어와 달리 비선형이다. 둥근 원처럼 보이는 그 문자는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다. 이러한 특징은 그들의 시간 관념과 연관된다. 인간에게 과거란 알았던 시간, 현재란 알고 있는 시간, 미래란 알아갈 시간인 반면, 외계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고 모든 시간을 동시에 지각한다. 그들에게도 시간은 공평하게 지나가고 흘러오고 있음에도, 심지어 그 전부를 아는데도 오로지 당장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들의 시간 관념이 반영된 원형의 문자는 점들의 집합이다. 점들이 이루는 원은 한곳에서 시작하면 반드시 그곳에서 끝나야 완성된다. 시작과 끝이 같다. 어디에서 시작해도 끝이 되고, 어디에서 끝나도 시작이 된다. 그러고 보면, 어느 시점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과거가 현재가 될 수 있고 미래가 현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에 연연하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가는 데 있어 이해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아는 건 아는 거고 어차피 사는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원을 이루는 점처럼 시간을 이루는 건 순간이다. 그 순간은 바로 지금, 현재다. 다만 반드시 인지해야 하는 건, 점 다음에 점이 와야 원의 완성이 보장된다는 것. 시간은 순차적(順次的)이니까. 게다가 일방향적(one-way)이다. 일방적(一方的:one-sided)이지 않다. 미래만으로 현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자. 한 개의 손가락만으론 불가능하다. 손가락 하나가 더 필요하다. 이러한 현상을, 닐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일종의 ‘시간 협공(temporal pincer)’이라 부르고 싶다. 두 개의 손가락이 맞닿을 때 원이 생기고, 맞닿은 부분은 점이 된다. 그 점이 현재고, 두 손가락은 각각 과거와 현재, 만들어진 원은 현실이다. 그래서 과거는 필수다. 미래는 현재의 원동력인 한편, 과거는 현재의 지지력이다. 가고 싶은 미래가 있다는 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현재 움직이지 않으면 과거가 현재가 된다. 캣이 각성하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곁엔 사토르가 계속 존재했을 것이다. 과거는 미래의 행동을 현재로 옮길 동기이자 초심이다. 굳이 캣의 이야기를 예로 들지 않아도, 본디 우리의 삶에서 과거의 경험은 현재에 큰 귀감이자 경각심으로 작용하지 않던가. 이로써 과거와 미래가 상접하는 순간, 현재가 형성된다. 필경 현재는 일어나기 마땅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이치는 ‘테넷’ 속의 ‘테넷(Tenet)’과 ‘어라이벌’ 속 ‘한나(Hannah)’에 이미 담겨 있다. 테넷(Tenet)과 한나(Hannah)는 회문(回文: Palindrome)이다. 루이즈의 말대로, 앞부터 읽어도 뒤부터 읽어도 같은 단어 같은 의미다(“It reads the same forward and backward”). 원이 생성되려면 두 손가락이 맞닿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어쨌든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여기까지, 새로운 시간관을 위한 언어 해독이 비로소 끝났다.
‘테넷’, ‘어라이벌’, 그리고 ‘베리 굿 걸’의 언어를 습득한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미래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다. 지금 내가 해야 미래에 된다. 미래는 현재가 된다. 글을 한 줄도 안 쓰고,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면서 작가로 살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 바로 오늘 글을 쓰는 이유다. 또한,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과거를 활용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항상 나를 거슬렀다. 하고 싶은 걸 알아도 하지 않았고, 할 줄 아는 걸 무시하며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 그 결과로 정신과 건강이 망가진 채 현재에 왔다. 과거에서 현재로 올 수 있도록 노력한 건 과거의 미래인 현재의 나였다. 현재의 나는 나를 거스르지 않는다. 나의 생각과 감상을 표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를 계속 현재에 둔 결과, 지금 여기에 와 있다. 나는 나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알기에 현재의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이 현재를 선택하는 순간 어떤 현실들이 함께할지도 안다. 그 현실에 슬픔과 고통이 있음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니까 나는 선택했다.
내가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화처럼 시간을 오간다든가 시간의 법칙들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대로다. 그렇지만 시간을 알든 모르든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시간에 약점 잡히지 말자. 구태여 시간을 자로 재어 불안과 고통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시간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다: 오늘, 현재를 사는 것. 내일 되면 또 현재를 살고. 현재의 연속은 하나의 삶이 된다. 살고 싶은 현재를 계속 살아내는 것은 곧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과 같다. 고로, “삶은 영원한 현재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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