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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Jan 06. 2019

꺼내 먹어요

오보이 매거진 60호 독립잡지 편 기재 글(2015년)

후텁지근한 여름밤에는 억지로 잠에 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새벽 공기와 책, 음악이 있으면 언 젠간 잠이 오겠지요. 자주 듣는 음악은 아이유의 ‘무릎’과 자이언티의 ‘꺼내 먹어요’입니다.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나 아주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머리칼을 넘겨줘요.”

“쉽지 않죠 바쁘죠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죠”

아이유의 맑은 목소리와 자이언티의 달짝지근한 목소리를 곱씹다보면 어느새 저는 베개에 머리를 눕힙니다. 그 어렸을 때는 참 잠에 들기 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오늘 하루의 피곤함보다는 내 일이 온다는 피곤함에 잠에 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몇 년 전인가요, 서점에는 힐링 얘기를 담은 책들이 넘쳐났죠. 그때는 저도 그런 책을 읽고 또 읽 었지만, 이제는 ‘아프니까 청춘이고 쉬고 싶을 때는 쉬라’는 책의 말은 별로 와 닿지 않는 것 같 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가장 와 닿는 건 아이유와 자이언티의 노랫말처럼 ‘무릎을 베고 누우면 머리칼을 넘겨주던’추억과 같은 일상과 ‘쉽지 않고, 바쁘고, 왜 이렇게 까지 하나 싶지?’라고 물어 봐 줄 수 있는 내 곁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추억을 더듬어 볼까요. 아득하게 보면 따스함이 느껴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보면 참 별 거 아닌 것’에 웃었고 행복했습니다. 가족들과 밥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자전거를 타게 돼서 행복했고, 친구들과 함께 햇빛 아래 뛰어놀 수 있어서 웃었고 행복했습니다. 그 때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서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왜 이렇게 멀 게만 느껴지고 그리울 까요. 노래의 가사말로나마 위로받아야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요즘 우리는 백주부님과 김영만 아저씨에게 열광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힐링에 열광했는데 말 이죠. 왜 그럴까요? 제가 얼마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하나 깨달은 건, 참 삶은 살수록 알 수 없고 우리는 서툴다는 겁니다. 서툰 우리에게 인생은 참 알기 어려우니 우리는 백주부님과 김영 만 아저씨와 같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 백주부님이 알려주는 집밥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 고, 김영만 아저씨는 제가 뭘 해도 응원해 주실 것만 같잖아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백주부님과 김영만 아저씨를 반가워하는 이유입니다. 집밥, 내 곁을 위로해 줄 사람도 좋습니다. 각자에게 맞 는 위로와 일상을 찾아보아요, 힐링과 킨포크 라이프가 아니라. 제 친구는 집에서 민트와 바질을 키웁니다. 저번에는 친구 집에서 민트 잎을 따다가 톡 쏘는 모히토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주말에 텃밭을 가꿉니다. 그 분은 텃밭에서 나는 채소를 주위 분들에게 나눠 줍니다. 저는 올해 들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나만의 시각과 각도에서 그전에는 평범하게 느껴졌던 사물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그 사물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잘 몰랐지만 들여다보니 우리 모두 각자의 위로와 일상을 지 키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위로와 일상에 있어서 굳이 거창한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우리의 일상에 숨어있던 의미를 찾아 감사한다면 그것이 곧 위로가 된다고 생각 합니다. 생명을 기르는 뿌듯함, 나눠 먹는 즐거움, 자신만의 취미를 키우는 재미 등 이거면 충분 합니다. 마치 마음이 꽉 찬 기분이 들기도 하고 노을처럼 잔잔히 퍼져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노래 정말 좋죠. 백주부님도 고맙고, 김영만 아저씨도 반갑고요. 그런데 우리 이제는 너무 거기서 위로받지도 의존하지도 말아요. 그 대신, 우리의 인생에 집중해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 하 거나 책을 읽어도 좋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미뤄두었던 일들을 정리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 속에 있는 각자만의 위로와 일상을 찾아보아요. 저도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차근차 근 하나하나씩 발견해보니까 또 그만한 행복이 없고 에너지가 없더라고요. 어렸을 적 보물찾기를 하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해보아요. 당신의 일상에는 어떤 위로가 숨어져 있나요?  

밤에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걸 가만히 눈 감고 느끼면 가을이 한 걸음 다가 왔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봄도 갔고, 여름도 갔잖아요. 모든 것이 영글어질 시기가 성큼 오고 있네요. 지나간 봄, 여름이 아쉬워도 가을은 와요. 그러니 이제 노래는 그만 꺼내 먹어요. 나의 추억, 감정, 생각을 꺼내 먹어요.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행복해져요, 우리, 함께.   


2015년 여름에 씀

(그 이후에 아무 수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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