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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Aug 06. 2021

에스텔라 할래? 크루엘라 할래?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_ 영화 '크루엘라'

_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 영화 '크루엘라'의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이건 그저 광기 대(對:vs) 광기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올(Dior)의 뉴 룩(New Look)과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의 펑크룩(Punk Look)의 충돌이던가? 아니다. 그럼 권위와 반란의 전쟁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키려는 자와 뒤집으려는 자의 경쟁인가? 아니다. 다 아니다. 이건 누가 지고 이기는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패션에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다니, 촌스럽긴.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이 난 남작 부인(Baroness)와 크루엘라(Cruella)의 신경전은 실질적으로 관중을 위한 런웨이 쇼에 가깝다. 크루엘라의 각성과 복수도 매혹적인 겉옷의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핵심 소재는 ‘에스텔라(Estella)와 크루엘라는 어떻게 다른가’다. 둘은 같은 능력자지만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에스텔라는 능력으로 실력을 증명한다. 의상 디자이너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펼칠 마땅한 기회나 자리가 없어도 굴하지 않는다. 그녀는 도둑’일’을 할지라도 변장을 위해 역량을 한껏 발휘하고, 재스퍼(Jasper)의 기지와 배려로 리버티 백화점에서 말단 청소부로 들어가게 됐어도 상사에게 능력을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남작 부인의 눈에 든 것이 그저 운으로 보여도, 상사의 무시에 낙담한 에스텔라가 술에 취한 와중에도 재주를 부린 덕분이다. 남작 부인의 브랜드인 ‘배러니스(Baroness)’에서 에스텔라는 실력을 인정받으며 능력을 마음껏 떨친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의상 디자이너가 된 에스텔라는 더 이상 관광객이나 부호 고객으로 위장하지 않고, 애꿎은 청소부의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에스텔라는 능력을 숨기지 않으나 여전히 본인을 숨기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매력적이면서도 우울한 고스 룩(Goth Look)으로 옷을 갖춰 입었지만 그건 정작 본모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요상한 자주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자주색 머리는 본인을 가리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좋아서 한 게 아니란 의미다.

자신의 특별한 머리를 가리는 걸 원체 싫어했던 크루엘라는 능력으로 본인을 증명한다. 본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야 할 이유가 생기자 염색을 멈추고 흑백의 머리부터 되찾는다. 크루엘라가 처음으로 세상에 정체를 드러낼 때, 스스로를 가리는 망토를 불태워버리는 퍼포먼스로 자아의 표출과 복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화끈한 데뷔쇼를 기점으로 크루엘라는 남작 부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행사장 곳곳에 깜짝 출몰하는데 그 자태가 가히 파격적이다. 오로지 흑백으로 채워진 가장 무도회에서 횃불 같은 빨간색 드레스를 입는 건 차라리 양반이었다. 크루엘라는 풍성하다 못해 흘러 넘치는 프릴과 러플이 달린 치마 위에 나폴레옹이 입을 법한 제복 상의를 입고 자기 머리색을 옮겨 놓은 왕관을 쓴 다음 남작 부인의 차량 위로 성큼성큼 전진하더니 그 정상을 정복하며 핏빛 찬물을 끼얹는다. 그 후로도 남작 부인의 진로에 번번이 훼방을 놓으며 대중의 시선을 크루엘라 본인에게로 돌린다. 강렬한 파워 숄더 바이커 룩을 입고 나타난 크루엘라의 얼굴에는 ‘The FUTURE’, 즉 미래가 있다. 그런가 하면, 크루엘라를 예찬하는 신문지와 뷔스티에(bustier)로 만든 보디스(bodice)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쓰다 남은 천 더미를 길게 이어 붙인 그 드레스 자락을 런던의 거리에 휘날리며 쓰레기 차를 타고 사라지면서 세간의 호기심을 증폭시킬 줄 안다. 정점은 배러니스의 새 컬렉션을 망친 뒤풀이 같은 락 콘서트의 무대에서 남작 부인의 속을 뒤집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그녀의 애완견인 달마시안의 무늬를 본뜬 코트를 입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코트는 옷을 안팎으로 입을 수 있게 만든 리버서블(reversible)이다. 불행을 선사한 남작 부인을 농락하는 순간에는 칼라(collar)가 길고 둥근 달마시안 무늬 코트지만, 잠시 몸을 낮춰 쾌락을 홀로 즐겨야 할 때 크루엘라는 그 코트를 뒤집어 검은색 망토 아래 있었다. 그렇게 크루엘라는 모든 순간에서 단 한 번도 얌전빼지 않았다. 대신 그 이름처럼 또, 타고난 대로 발칙하고 진취적이고 못됐다(cruel). 

에스텔라는 직장에서, 크루엘라는 세상에서 각각 환상적인 옷을 만들며 잘나가지만, 어째서 에스텔라 대신 크루엘라가 살아남는지 그 둘의 차이점에서 뜯어볼 수 있다. 에스텔라의 인정은 남작 부인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남작 부인의 승인을 받아야 에스텔라가 만든 옷은 살아 남는다. 에스텔라가 디자인하고 남작 부인이 용납하는 의상이 구식(舊式)이라거나 구리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작 부인이 입고, 또 배러니스에서 선보이는 옷은 다소 잘록한 허리와 과장되거나 디자인적 기교가 강조된 어깨, 가슴, 그리고 치마가 대비되는 드레스다. 종종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가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디올의 뉴 룩이 떠오르는데, 그 옷에는 전쟁으로 피폐된 마음이 찾는 벨 에포크(Belle Epoque)가 담겨 있다. 그래서 디자인 상으로 볼 때 배러니스의 옷은 아름답지만 미래가 없다. 굳이 전쟁을 언급하지 않고도,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인 후 가슴이 파이고 치마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서 춤을 추는 1900년이 되기 훨씬 이전 과거를 상기하기 수월하다. 아름다우나 사치스럽다. 고상한 나머지 그 옷을 입고 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는 넓지 않다. 게다가 배러니스라는 이름이나 남작 부인이라는 호칭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권위적이다. 에스텔라가 만드는 옷의 속성과 그 옷에 복고적 인물인 남작 부인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부합하면, 에스텔라의 옷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그녀는 주도적이지만 전통적 권위의 체계 안에 속해 있다.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옷을 만들고, 그렇게 인정을 받는 삶을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크루엘라는 지나간 과거나 권력의 인정이 필요치 않다. 크루엘라가 필요한 건 자기자신이 타고난 모습대로 사는 것이다. 남과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구별되는지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는 데 겸손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되갚아 준다.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 나가는 크루엘라가 입는 옷은 과거의 영광을 끌어오는 옷이 아니다. 빳빳한 새 천이나 우아한 선은 없다. 크루엘라에게 옷이 되지 않는 재료는 없다. 잉여 옷감이나 사람들이 읽는 신문지, 남자들의 제복이 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옷의 소재만으로 사람들이 배러니스에서 눈을 떼고 과격하고 과감한 크루엘라의 옷에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크루엘라에게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이연은 패션의 확대와 하위문화의 포용에 존재한다. 배러니스의 컬렉션과 파티에는 상류층의 사람들이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있지만, 크루엘라가 남작 부인의 성공에 초를 치기 위해 선택하는 곳의 대부분은 은폐된 특정 장소보다도 그 안에 들어서기 전인 길거리다. 즉, 배러니스는 초대받아야만 관람할 수 있는 데 반해, 크루엘라의 옷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도 길을 지나가다가도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패션은 그렇게 상류에서 하류로 범람하고 확대되어 다양성을 끌어안는다. 배러니스의 옷은 좋았던 옛 시절의 상징에 그치지만, 크루엘라의 옷은 상징을 넘어 메시지까지 전달한다. 본인과 본성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크루엘라는 비주류를 주류로 만들며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다. 바이커의 반항미에 미래(The Future)라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거나, 옷과 음악을 합체함으로써 락의 저항 의식을 끌고 오며 옷이 있는 곳이 곧 무대임을 선보인다. 리버서블, 재활용, 하위 문화와의 융합 외에도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전통 복식의 해체와 재탄생이다. 쓰레기 차에서 나온 드레스의 소재만 새 고급 천으로 바꾼다면 그 옷은 놀랍게도 이미 이전에 있던 옷이다. 실루엣이나 장식만 놓고 본다면 꽤 낯익지 않던가? 크루엘라의 쓰레기차 옷이 신선했던 건 드레스의 윤곽은 그대로 둔 채 내면을 달리 채워서다. 그 속은 사실상 속옷인 뷔스티에를 노출하고, 일반적으로 드레스에 쓰지 않는 소재를 썼다는 데서 발상의 전환과 외면 받고 버려지는 것들을 끌어 안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주목받게끔 탈바꿈시키는 인정(人情)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과감한 오트 쿠튀르의 옷을 만드는 크루엘라는 평소에 에스텔라처럼 검은색 옷을 입지만 에스텔라와 다르게 그 일상복은 험난한 환경에서도 활동성이 좋고 번쩍번쩍하며 단단하다. 마치 갑옷을 입은 듯 말이다. 크루엘라는 그 생활 갑옷을 입고 가족과 친구들과 합심하여 크루엘라 본인과 이 세상의 크루엘라들이 거리낌없이 누빌 세상을 만드는 데 착수한다. 그리고 그 세상에 정정당당한 실력 대결을 거부하는 권력적인 남작 부인은 없다. 크루엘라가 아니라면 누가, 그 세상을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본인을 드러내기 주저하지 않고, 주목받지 않은 존재들에 손을 내밀고, 불의를 정의로 이기려고 한 크루엘라가 아니면 과연 누가?

다만, 이렇게나 다른 에스텔라와 크루엘라에게서 교집합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옷은 무기가 된다는 것. 비록 에스텔라는 실력을 증명하는 기술로, 크루엘라는 본인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데서 능력을 대하는 가치관이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옷이 그 활용 도구가 되었다는 데서는 후론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영화는 왜 에스텔라를 떠나 보내고 크루엘라를 남겼을까? 시대는 변하기 때문이다. 디올의 뉴 룩 이후 패션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진보했다. 메리 퀀트(Mary Quant)의 미니 스커트,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르 스모킹(Le Smocking)이나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의 리틀 블랙 드레스(LBD)가 탄생했으며 히피, 보헤미안의 문화 영향, 일상에 있어 청바지의 대두, 비틀즈와 트위기의 등장 등 인간의 자아 발산에 있어 즐거운 혁명이 발생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데이비드 보위 등 팝과 예술이 결합했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 일본 디자이너들의 아방가르드 등 새로운 패션이 등장하였다. 즉, 기존 체제에 반발하여 새로운 철학과 관점이 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대의 흐름은 늘 변화와 혁신으로 통한다. 한 디자이너의 디자인이 다른 디자이너의 디자인에 비해 못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는 진화한다는 것. 그러므로 다가올 새 시대에 걸맞는 인물은 크루엘라가 된다. 따라서 크루엘라는 본인으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개인적인 복수를 초월한다. 크루엘라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 관습을 비틀고, 괴짜와 외톨이에게 다가간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이런 크루엘라로 인해 남작 부인의 시대는 그렇게 갔다. 이제 크루엘라의 시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크루엘라처럼 선택의 시간이 온다. 에스텔라가 될 것인가? 크루엘라가 될 것인가? 선택이 어렵다면 이렇게 질문해보자: “당신은 누굴 기억하는가?” 우리의 뇌리에 남아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건 누군가?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만든 건 누구였던가? 만약 갈피를 영 못 잡겠다면,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중 누가 더 행복해 보이던가?  

시대에 순응할 것인가, 시대를 추진할 것인가. 다시 말해, 에스텔라 할래, 크루엘라 할래? 시대를 이끄는 크루엘라는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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