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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Sep 24. 2021

이 아이는 자라도 자크뮈스 그대로입니다

2014 봄~2021 가을 컬렉션, 2020 여름 캠페인 감상문

이 아이는 자라도 자크뮈스 그대로입니다

2014 봄~2021 가을 컬렉션, 2020 여름 캠페인, 르 치키토(Le Chiquito) 가방 모양 참 악세서리 라인 




당신은 어떤 아이였는가, 묻는다면 답하기 그렇게 까다롭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가, 당신은 그 아이가 어른이 된 모습과 일치하는가? 그 아이는 지금 이 사람이 맞던가?

“어쩜 아직도 소녀 같니?” 

“얼굴이 앳돼 보인다”

“너는 참 그대로야.” 

나는 이런 말이 순수하지 않음을 안다. 이와 같은 말이 이 사회에서 칭찬이 될 수 없음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이 말들 뒤로 따라오는 말들 때문이다. 

“얼굴이 어려 보여서 반말하려고 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았네요.” 

“네가 어려 보여서 널 함부로 대하는 거니까 화장 좀 해.” 

“그렇게 해서 사회 생활은 하겠니?”  

이런 말을 듣는 나는 손목이 참 얇다. 때때로 내 손목을 보면서, ‘자라서는 안될 사람이 자랐나’ 상념에 잠긴다. 

“쟤 손목 좀 봐. 저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어.”

아무리 마른 몸매와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타고 났다 한들 내가 봐도 손목은 유독 가늘다. 가끔은 ‘꼭 누군가 손목을 일부러 늘려 놓은 것 같다’고 재미있는 의심을 심심풀이 삼아 하다가 덜컥 심각해진다: ‘나는 어른이 될 예정이 없던 아이였나?’

“야, 너도 와서 얘랑 손목 좀 대 봐! 너무 심하지 않아? 징그러워!” 

세상사에 들리고 내쳐질 때마다 나의 손목은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이 손목만큼 나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없다. 즉, 이 손목만큼은 어느 순간에나 그대로였다. 내가 아이였을 과거에도, 어른인 지금에도 그대로다. 

나는 항상 나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이였을 때도 나는 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나임을 꾸준하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나는 그렇지 않나 보다. 어려서는 ‘애어른’이라는 말을 주구장창 들었다. 

“애가 하는 말이 어른이야.”

그런 말을 들는 매번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저 나의 생각을 말한 것뿐인데, 주변 어른들은 혀를 내두르거나 혀를 찼다. 그런 내가 커서는 ‘아이 같다’는 말을 들을 줄 꿈에도 몰랐다. 

“언제 철들래?”

자격증을 따거나 취업 스터디에 나가지 않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한 말씀하셨다. 사회가 부여한 의무를 끝내고 나서 나는 어린 시절에 했던 이야기 짓기, 그림 그리기, 피아노 치기에 자연스레 돌입하였다. 어린 시절의 놀이를 재개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나는 나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이보다 나다울 수 없었다. 애써 되찾은 나였다. 아니지, 어떻게 되찾은 나인데, 내가 나대로 살기 위해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아무리 글을 쓰고 뭘 해도, 어른들은 이 행위를 응원하기는커녕 도무지 가만두지를 않는다. 나는 나로 인정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자크뮈스의 컬렉션을 들여다보면 꼭 부모님이나 그 어떤 어른들도 기록하지 않은 나의 어린 시절을 담은 앨범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그 어린 시절이란 단순히 어린 아이였던 시절이 아니라 한 인간의 초창기인 것이다. 

나는 2014 가을 컬렉션 마지막 착장을 보고 반가우면서 당혹스러운 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렸다. 이전 봄 컬렉션을 포함해 가을 컬렉션 마지막 착장 바로 직전까지의 옷들은 파리(Paris)의 소녀들이 입을 법하면서 예쁘지만 재미는 없었다. 이 세상에 파리와 소녀를 토대한 예쁜 옷은 이미 너무 많다. 그런데 마지막 착장은 그 이전과 분명 다르고 비교되었다. 마치 이제까지 학습한 전형들은 버리겠다는 듯, 마지막 착장에는 뜬금없이 누군가가 꼭 가위로 서툴게 오린 것 같은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아이였다. 어른의 손때가 아닌 아이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그 착장을 시작으로 이후 컬렉션부터 디자이너는 규약이나 선입관이 존재하지 않는 백지의 세계를 탐험한다. 그 속에서 아이스러운 상상력이 자유롭게 뛰어 논다. 옷은 착용하기 적합(wearable)해 보이지 않고, 쿠튀르(couture)적이지도 않다. 다만 관념적이다. 제대로 정비된 이론이나 법칙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그 자체로 순수하다. 그러니까 아직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어 무엇이든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아이가 만든 옷 같았다. 2015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진지하지만 즉흥적으로 색종이를 요리조리 자르고, 그림책에 있는 선을 지키지 않고 삐뚤빼뚤 그림을 그리는 아이처럼 느닷없이 치마에 동그라미를 더하고, 어떤 규칙도 정하지 않고 천을 두르거나 오려 붙인다. 모델의 얼굴에는 낙서가 있거나 같은 크기와 모양의 동그라미 종이로 가려져 있다. 특히 한 모델의 목에는 검은 손과 팔이 둘러 있다. 유령이다! 나는 어렸을 적 상상 속 차가운 파란 도깨비를 다시 만났다. 컬렉션을 감도는 어딘가 기괴하고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어린이가 색종이를 자르고 색연필을 움직이면서 만들었을 이야기를 감지했다. 그 이야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나, 가끔 상상력이 지나쳐 나도 모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손길을 보는 순간 이 천진난만한 컬렉션이 애틋해졌다. 하지만 어찌하여 약간 슬픈 걸까? 동시에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성인의 패션 컬렉션에서 동심은 타당한가? 이 질문은 얼마나 우스운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나를 두고 아이니 어른이니 가타부타 말을 던지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디자이너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Simon Porte Jacquemus)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19살에 그녀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설립한다. 이는 몹시 유명한 이야기면서 이 브랜드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실마리다.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는 어떤 컬렉션이 되었든 어머니와 고향 지역인 남프랑스를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작가로 따지면, 사회상을 담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는 셈이다. 사적인 인생을 근본으로 다루는 브랜드는 많지만 유년기의 색채까지 가미하는 브랜드는 드문 걸로도 모자라 마땅하게 생각조차 잘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크면서 어린이다운 면모를 버려야 했다. 어른이 되어서, 집단 행동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 적은 언제인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신나게 집중한 적은? 매사 피로감이 아니라 호기심부터 느낀 적은? 어른이 되고 난 뒤 테두리 안을 꼼꼼히 채우는 걸 잘하게 됐는지 몰라도 그때처럼 선을 삐죽빼죽 그려 새로운 그림을 만들 줄은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던가 질문하면, 당신은 자신 있나? 내가 어린 시절에 했던 이야기 짓기, 그림 그리기, 피아노 치기를 다시 하게 되니 이제 알겠다, 그건 어릴 때나 하는 거라고 괄시한 사람은 나부터였다는 것을. 

반면, 자크뮈스는 어린 아이의 놀이를 진지하게 여긴다. 색종이와 색연필을 옷감과 재단가위로 성장시킨 건 그에 관한 존중, 또 추억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그러니까 어린이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즐거운 디자인 놀이를 하며 놀았던 걸까? 2016년 리조트 컬렉션 마지막 컷에는 여인이 남자 아이와 서 있다. 이전과 달리, 2016년 리조트 컬렉션에서는 천의 보전보다는 옷의 변형이 눈에 띈다. 셔츠는 재조립으로 블라우스와 원피스가 되고, 재킷은 해체되어 뷔스티에와 홀터넥 드레스가 된다. 치마의 아코디언 주름은 옷의 장식으로 재해석된다. 2016년 봄과 가을 컬렉션은 이 리조트 컬렉션에서 확대된다. 2016 봄 컬렉션의 모델들은 웃고 있지 않으며 어딘가 몽롱하다. 모델들은 맨발이며 옷을 불완전하게 입어 원초적 분위기를 풍긴다. 재킷을 묶어 치마를 만들고, 셔츠의 소매는 바지가 된다. 넥타이는 목도리가 되거나 가장자리 선이 된다. 또 등장하는 동그라미가 흡사 반창고처럼 붙어 옷의 조각과 옷의 조각을 연결해 조형적인 의상을 만들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천 뭉텅이를 입은 두 여인의 뒤로, 한 아이가 똑같은 천 뭉텅이를 다소 힘겹게 들고 뒤쫓아 간다. 이윽고 컬렉션의 모델들이 빙 둘러 원형을 만들고, 그 아이는 본인과 같은 흰 셔츠와 바지를 입은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와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 정경이 꿈처럼 아득하고 망막하다. 나는 어머니 비너스의 신전에서 놀다 떠나는 에로스를 보았다. 에로스는 평소에는 아이의 모습이다가 사랑을 느끼고 어른의 모습을 갖춘다. 즉, 아이와 어른 모두 에로스다. 21세기에서 에로스가 느끼는 사랑에는 경계와 한계가 없다. 사랑을 깨우치며 어른이 된 에로스는 사랑을 표현한다. 따라서 2016 가을은 구체적 형태를 다시 아니, 비로소 갖춘다. 의상은 재킷의 변형, 동그라미, 매듭으로 만든 탑과 여러 옷이 분해되고 연결되어 이전 컬렉션과의 일관성을 시사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잘록하게 만들어 강조했지만, 어깨 부분은 과장한다. 한 의상에 다양한 소재를 조합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2017 봄과 가을이 그 성장사를 함께하면서 자크뮈스의 고유성은 더더욱 견고해진다. 셔츠는 이전 컬렉션에서 해체와 재조립을 거치더니 마침내 소매를 여러 방식으로 부풀리면서 새로운 셔츠를 창조한다. 늘상 쓰던 동그라미 형상은 2017 봄에서 구체적인 사물로 진화한다. 거대하고 둥근 밀집 모자는 런웨이를 비추는 원형 조명 군집에 조응하며 의상에 목가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그로 인해 자크뮈스의 원은 태양에 관한 비유임이 명확해진다. 2017 가을은 어떤가. 어쩌면 또다시, 예쁘지만 무난할 수 있었다. 특유의 실루엣과 깜찍한 모자를 감안해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017년까지 이르는 자크뮈스의 발달을 다 지켜보지 않았던가. 특히 2018 봄을 고려하면, 이 2017 가을은 무난하지 않고 예쁘다. 성년이 되기 직전의 성장 과정을 마무리하는 디자인처럼 보였다. 본인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확인하는 듯했다. 복고적인 실루엣 속 세부 양식은 여성스럽다. 여성의 몸을 왜곡하지 않는 것 없이 자랑한다. 디자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사랑스럽고 활달함이 가득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분홍색으로 무대, 의상, 그리고 용모까지 조화시키며 관객에게 컬렉션의 분위기와 더불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한다. 그 와중에 자유로움은 여전하다. 이렇게 옷 말고도 이야기를 짓는 디자이너는 2018년 봄 컬렉션에서 그간의 잠재력을 거침없이 펼치며 여성에 관한 패션의 신기원을 활짝 연다. 여느 때의 자크뮈스 컬렉션처럼 헐겁거나 파인 옷을 입는 모델들은 요염하지 않고 관능적이며, 재단되지 않은 명랑함을 자아낸다. 이렇게 대담하고 자유로운 여인을 어느 브랜드의 어느 컬렉션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햇살로 반짝거리는 힘찬 바다에서 막 수영을 마치고 나온 여인이 입은 옷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녀의 뺨은 생기로 발그레 하며 살갗은 모래처럼 탔다. 파도를 새기고 대지를 닮은 옷을 바람처럼 가벼이 입었다. 옷마다 물결이 지고 살랑거렸다. 컬렉션마다 선보였던 특유의 매듭은 햇살이 퍼지는 모습과 닮아 그 자체로 태양이었다. 감각적이면서 순수하고 산드랗다. 그런 여인이 입은 옷은 여 보란 듯 입은 옷이 아니다. 몸을 두르는 옷은 물놀이 후 나온 몸을 부드럽게 감쌀 뿐이었다. 젖은 머리는 스카프로 두르거나, 마르면 뙤약볕에 그늘을 만들어줄 밀집 모자를 쓰면 된다. 내 눈에는 남프랑스의 여인이 보인다. 누군가의 어머니지만 한 명의 여자이기도 하다. 즉, 자크뮈스는 어머니에 대한 헌사이면서 여성에 대한 찬사다. 2018 봄 컬렉션은 앞서 공개된 컬렉션들로 관객에게 서사적으로 설득이 가능하지만, 이 컬렉션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건 논질과 이해타산이 아니다. 그저 느끼면 된다. 옷은 곁에 없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옷 만들기는 어머니가 떠난 세상과 현재에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크뮈스의 방식이다.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무한한 영감(靈感)의 화수분이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추억으로 어머니를 그린다. 햇살이 내리쬐는 고향 남프랑스에서 아들 자크뮈스와 시간을 보내는 한 여인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은 누군가의 독점이 아니다. 낮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밤에는 해안가에서 산책을 하는 여인이라면 누구든 이렇게 입을 수 있다. 찬란한 햇살 아래 아들과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온화한 달빛 아래 아들에게 옛날 옛적 동화를 읽어주는 여인이라면 누구든 이렇게 입을 수 있다. 고로, 이 2018 봄 컬렉션으로 자크뮈스는 개인성을 넘어서 보편성까지 완벽하게 획득한다. 그러면서도 이 자크뮈스가 패션의 일부로 자리잡는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뒤죽박죽하고 삐죽빼죽하며 알록달록한 유년기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니멀리즘, 스트릿 패션, 오버 사이즈, 파리지엔느, 모노그램 외에 별다른 뉴스가 없던 치열하고 냉정한 패션계에서 자크뮈스가 젊은 세대들의 지지를 얻으며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현상에 관해 이렇게 질문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 본능적이고 천진난만한 자크뮈스를 왜 사랑하는가? 답은 이 질문 안에 있다. 자크뮈스가 본능적이고 천진난만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크뮈스에서 우리를 본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적인 브랜드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발견하는가? 자크뮈스는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를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즉, 개인이 브랜드가 되고, 이를 사회에서 인정받는 건 누구나 바라는 바인데, 자크뮈스는 해냈다. 자크뮈스는 유년기를 어른이 되기 위해 지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체로 인정한다. 브랜드 운영이나 컬렉션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크뮈스는 아이들의 장난기를 기꺼이 드러내며 실력을 선보이기보다 스스로를 기꺼이 근본부터 탐구한다. 전혀 상관없거나 불충분한 재료에서 세상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세계를 창조했던 어린 시절부터 말이다. 이불을 둘러도 파티장에 입성하고 종이만 잘라도 이야기를 생각해내는 어린 아이처럼 불균형하게 붙여지거나 불완전하게 이어진 의상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되레 샘솟는다. 자크뮈스의 컬렉션으로 어린 시절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본래적인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뿐만 아니라, 자아 형성과 확립을 컬렉션에 그대로 반영하는 패기는 어떻고! 이 험난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승자독식을 세뇌 당하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성취 전까지의 과정은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성취만이 자랑거리가 되고 실패는 숨기기 급급했다. 서툰 솜씨나 실수는 비난 받아 마땅하거나 발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2018 봄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자크뮈스의 컬렉션들을 되새겨 보라. 숙련된 여타 패션 컬렉션과는 거리가 멀지만 직감적이고, 어수선하지만 희망과 가능성이 충만하고, 충분하지 않지만 어엿한 시간이었다. 온갖 시도가 존재하기에 얼마나 용감하고 기특하고 대단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해 보인다. 이 점이 자크뮈스의 장점이자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강점이다. 잘하고 싶어서 애쓰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찾고 몰두하는 그 모습이 보기만 해도 기운난다. 기조는 고향의 자연과 어머니에서, 형태는 어린이의 가위질, 색감과 세부 디자인은 취향에서 딴, 그러니까 어린 시절부터 본인을 그대로 간직하고 보전한 자크뮈스로무터 우리는 심리적 위안과 대리 만족을 느끼며 몰입한다. 그러니 자크뮈스의 컬렉션이라는 성장사를 함께하며 옷을 만드는 것이 자크뮈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저절로 인지하게 된다. 옷 만들기는 아이 자크뮈스에게 즐거운 놀이였고, 자크뮈스는 옷 만들기 놀이를 즐긴 아이였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자라서 자크뮈스가 되지 않는다. 이 아이는 자라도 자크뮈스 그대로다. 

한국의 공교육권 안으로 편입된 후,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좋아했던 걸 실컷 좋아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짓는 대신 교과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은 내가 멋으로 청자켓을 망토처럼 입기 위해 가장 윗 단추만 잠그고 어깨에 걸치자 똑바로 입으라고 지적하셨다. 어린 시절에 했던 건 어린 시절에 놓고 오라고 나에게 얼마나 수많은 어른들이 말했던가. 초등학교 2학년, 꿈을 그리라는 학교 수업에서 그린 모델 그림을 가져가자 ‘너는 수학 못해서 안돼’라며 버럭 화부터 낸 엄마가 아직도 내 눈에 선연하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꿈을 쓰라고 해서 빈 칸에 마술사와 과학자를 같이 써야 했고, 그 다음해부터 장래희망란에 주구장창 의사만 썼다. 내가 좋아하는 걸로는 밥값도 못 번다고 얼마나 수많은 어른들이 말했던가. 잘해야 하는 수학은 나는 잘하지 못했고, 잘해도 되지 않는 미술에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울면 어른들은 당황했고, 실수하면 어른들은 윽박질렀다. 그래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얼마나 수많은 어른들이 말했던가. 어른들의 사정 속에서 나는 알 권리를 박탈당하고,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나 자신을 인정받을 권리가 묵살된 채 나는 자크뮈스가 보여주는 유년기와 전혀 다른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내가 만약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가 되어 컬렉션을 만든다면 그 컬렉션에는 색깔이 점점 실종되고 옷은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어떤 색깔과 생김새는 철저하게 때려 부숴지고, 깨져서 헐었으니까. 그리하여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의 2018 봄 이전까지의 컬렉션을 보면 보상심리를 느낀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었고 인정받아서 삶을 이어온 사람의 모습은 저렇게나 눈부시구나 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은 저렇게나 행복해 보이는구나 하고. 항상 웃으면서 컬렉션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에게 그의 어머니는 패션에 있어서 모티브이며, 브랜드를 전개하는 의욕에 있어 원천이다. 같은 맥락으로, 자크뮈스가 제멋대로 천 조각과 천 조각을, 옷 조각과 옷 조각을 이어서 의상을 짓는 것에서 용기를 얻어 나도 이미 망가진 삶과 부서진 삶을 이어 글을 짓고 있다. 내가 쓰는 글에는 내가 겪은 상흔과 멍 자국, 통증이 가득하다. 자크뮈스가 본인의 삶을 닮았듯이 나의 글도 나의 삶을 닮았다.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는 정확하게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글을 쓰면서 나의 삶을 되짚느라 너무 아프다. 글만 하기 시작하면서 잊혔던 삶이 되살아난다. 모든 것이 다 변했는데, 이야기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피아노를 쳤던 그 아이의 삶을 나의 수완(手腕)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같은 수완으로 이야기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친다. 창작을 할 때면 타인에게서 손목에 대한 모욕을 듣지 않는다. 아무리 평소에 공황장애와 우울 증상에 시달리더라도 창작을 할 때만큼은 건강하고 순수한 나 자신을 느낀다. 나는 창작을 할 때면 좋아하는 것에 한도 끝도 없이 몰두했던 어린 시절을 환기하며 그때의 아이와 지금의 어른이 사실은 같은 인감임을 실감한다. 동시에, 2015년 가을 컬렉션을 만드는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가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헤아린다. 제멋대로의 짜임새나 자의적인 구조만 논하는 것이 아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과 자신의 미래 앞에 서서 미숙한 어린 아이와 고르지 않은 성장 과정을 선보인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용기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나는 자크뮈스의 컬렉션처럼 완벽하지도 능숙하지도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한다고 믿는 창작을 한다. 나는 실력에 괘념치 않고 내 안에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꺼내 보고 싶다. 그게 다소 미숙해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에세이의 범위는 여행에서 음악, 영화, 음식으로 넓어졌고, 글의 영역은 에세이와 시에서 소설로, 글의 형식은 실체에서 추상 예술로 넓어졌다. 마음을 따라가니 그토록 간절했던 그림이 돌연 그려졌고, 악보를 외워 피아노를 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 과정은 순조롭지 않은 자크뮈스의 2018년 봄 이전까지의 컬렉션을 가히 닮았다. 차라리 다른 일부터 먼저 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사람도 있다. 실력이 조금 더 원숙해진 다음 글을 쓰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 건 취미로 하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자크뮈스의 컬렉션을 내내 주시하지 않았던가. 무언가 할 때 있어 잘하는 건 중요하나 관건은 아니다. 관건은 개아(個我, identity)와 개인사(個人史, originality)다. 

2018년 봄부터 자크뮈스의 뼈대는 이상한 나라를 방랑하는 어린이나 자아를 실험하는 십대가 아니라 과감하고 활달하며 따사로운 여인으로 잡힌다. 2018년 가을 컬렉션에는 그 여인이 입을 니트와 코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몸에 밀착되어 가슴이 파인 드레스에는 긴 소매가 생기고, 치마 외에 망토에도 주름이 진다. 전체적인 색감은 무르익는 계절을 따랐다. 심지어 여름에만 쓰는 줄 알았던 밀집모자에도 색색이 물들었다. 획기적인 2018년 봄 컬렉션에서 바로 이어지는 가을 컬렉션은 변형이나 변천이 아니라 변주에 가깝다. 물론 변주의 주제는 한 여인이고, 컬렉션 자체도 더할 나위 없지만 질문이 생긴다: 신체적 성장을 끝내고 비로소 어른이 된 인간은 무얼 시작해야 하는가? 영혼의 성장? 정신적 성숙? 자크뮈스는 느긋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오로지 성장만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자크뮈스는 멈추지 않는 방법으로는 꼭 성장일 필요 없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올라가는 대신 나아간다. 자크뮈스는 너른 대지 위를 내달린다. 어른이 되었다고 본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점점 더 드러낼지언정. 2019년 봄부터 자크뮈스의 색깔은 강렬해지다 못해 눈이 부신다. 어머니 자연 속에서 소재를 충돌시켰던 방식대로 색깔을 충돌시키고, 바람이 불면 아름답게 부푸는 치마와 바지를 고안한다. 게다가, 한 남성이 출현한다. 2015년 가을이나 2016년 리조트 컬렉션에서 보았던 남자 아이가 이렇게 자란 것처럼 넥타이를 매면서도 무늬 셔츠의 단추를 다 따고 중절모 대신 버킷햇을 쓰고 있다. 진지하지만 장난스럽고, 우람한 체격을 지녔지만 애리하다. 이 청년들은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나 다름없다. 이 청년들이 해변가에 이어 목장에도 나타나면서 그 존재가 확고해진다. 육감적이면서 감성적인 자크뮈스 인물의 또다른 등장으로 자크뮈스의 세계는 넓어지면서 기존 세계의 속성도 진화한다. 2019년 가을 컬렉션은 앞선 봄 컬렉션 대신 같은 가을 남성 컬렉션을 닮는다. 여성의 육체를 부담스럽게 옥죄지 않으면서 과긍하는 방향에서 은밀히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어깨의 끝과 허리선이 같은 자켓의 가장 윗 단추만 잠근 채 바지에 손을 넣어 복부를 슬쩍 노출한다.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건 바지에 품이 생겨,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레 흩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셔츠를 이리저리 자르고 붙이던 자크뮈스는 청년 자크뮈스가 입는 셔츠를 여인에게 그대로 입히면서 직선적 옷의 형태에서 곡선적 실루엣이 은근하게 부각되도록 둔다. 즉, 어머니의 본에서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 본인의 취향을 가미하는 것 이상으로 성향과 경향을 확립함으로써 어머니라는 고유성을 지키되 본인의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2020년 봄부터 자크뮈스는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합친다. 여인과 청년은 부피감이 큰 자켓을 같이 입지만 그 외에는 각자의 신체적 특징을 내세우는 옷을 각각 입는다. 편안을 공유하면서 본래적 성질이 유지한다. 그러고는 2020 가을 컬렉션에서 또 한 번, 2018 봄 컬렉션에 필적하는 또다른 기원을 이룩하면서 자크뮈스라는 역사의 연장선상을 확인하는 금자탑을 이룬다. 컬렉션이 진행되는 곳은 실제 자연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자연성을 의상의 색깔에서 발현시킨다. 자크뮈스는 한 형상에서 어떠한 성질을 포착하여 보이지 않는 분위기나 이야기를 형성하는 재주가 있는데, 이번 경우는 색깔에서 자연을 느끼게 했다. 바로 이전 컬렉션에서 대두된 의상에 있어 편안함 또한 눈에 띈다. 3번 착장의 바지는 자크뮈스가 줄곧 쓰던 시가렛팬츠의 유형이었는데. 그 소재가 니트 소재로 바뀌면서 활동성이 늘어나 홀가분해졌다. 덩달아, 여인과 청년의 의상에 있어 신체적 디자인의 기본을 견지하면서 각자 의상 속 특색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31번 청년의 니트 폴로 상의처럼 남성의 의상에는 여성 의상에서 그러하였듯 가위질이 나 있어 훨씬 섬세해졌고, 50번 여인은 청년처럼 바지 안에 언더웨어를 드러내어 색달리 대범하다. 2018년 봄에서 실현한 보편성은 2020년 가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활성화되며 확장된다. 보편성에 관해서라면, 2020년 여름 캠페인은 반드시 논해야 한다. 2020년 여름 캠페인은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의 할머니가 2020년 봄의 핵심 의상을 입고 그녀의 손자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그 어느 캠페인보다 뭉클하고 독창적이고 기발하다. 시간을 각별히 다루는 자크뮈스의 옷은 어느 세대에나 통한다. 자크뮈스의 옷은 몸을 가리거나 드러내는 용도가 아니라 육신을 포용한다. 그 육신에는 구속이 없다. 누구든, 어떤 몸매든 자크뮈스의 맵시를 낸다. 그나저나, 앞서 선보인 장난기 많고 순수한 면모는 어디로 갔나? 자크뮈스 컬렉션에서 많은 모양의 가방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 삼각형의 옆모습과 사각형의 앞모습을 지닌 가방은 거의 매 컬렉션마다 등장할 만큼 자크뮈스의 상징기도 하다. 특히 2019년 가을 컬렉션 3번과 34번 착장의 여인이 들고 있는 그 상징은 자크뮈스의 정수나 다름없다. 그렇게 가방을 거의 축소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초소형 ‘르 치키토(Le Chiquito)’ 가방은 꾸준히 등장한다. 하지만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뭐든 상징이 될 순 없다. 혹자는 줄 없는 이어폰을 넣기 적당한 가방이라고 여기겠지만, 2014년의 컬렉션부터 쭉 미루어 보아 나의 의견은 다르다. 그건 내가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인형의 가방이었다. 보자마자 나는 자크뮈스가 한결 더 애틋해졌다. 그 인형 가방은 어른의 가방에 이어 악세서리의 참으로도 활용된다. 이렇게 자크뮈스는 자크뮈스를 추구(追求)하고 또 추구(推究)한다, 동그라미 조각천이 원형 조각상이 되어 다른 도형들과 함께 굽으로 쓰인 신발을 신고서.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사랑을 입고 신은 그대로 진보한다. 

자크뮈스는 지금껏 그랬듯이 이 코로나 시대 아니, 시절마저도 본인답게 산다. 일찍이 2020년 봄 컬렉션에서 라벤더 밭 속 꽃분홍색 런웨이는 환상이 아니라 추억이었다. 라벤더 밭은 어머니의 이름을 딴 2016 리조트 컬렉션에서 이미 등장했다. 그리고 인류가 또 한 번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에 막 들어섰던 차, 때마침 공개된 2021 봄 컬렉션에는 고향의 밀밭이 등장한다. 자크뮈스는 두려움 앞에서 모두가 약해질 때 도리어 강해지는 존재감을 확인시킨다. 자크뮈스는 추억의 장소를 통해 사랑하는 존재가 멀리 있어도 그 사랑은 곁에 실재하고 있음을 보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실재했던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살아갈 희망과 기운을 전파한다. 우리는 이 행복했던 추억처럼 강하다. 아직 코로나의 터널 속에 있는 현재, 2021 가을 컬렉션은 낯설고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자크뮈스식 아웃도어를 선보였다. 그건 진짜 산이 아니었다. 가짜였다. 자크뮈스는 이로써 이 시절에 대해 남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거나 다름없다. 이 고비는 어쩌면 실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고비야말로 환상이다. 고비를 느끼는 건 마음이다. 반면, 태양과 친구들, 가족과 바다, 그리고 추억과 자기자신은 옷으로 여전히 공존했다. 바닷가에서 입던 바지와 브라탑, 화사한 색깔과 꽃 무늬는 그대로되 조금 더 튼튼해지거나 장비가 더해졌다.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들은 더욱 다양해졌다. 즉, 힘든 시기를 넘기는 방법은 힘들기가 아니다. 사랑과 추억을 실존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본인다운 모습으로 표현하며 말이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색깔, 엉뚱하게 조각난 상의, 그리고 손바닥만 한 ‘인형 가방’은 변함없이 함께한다. 본연의 해맑은 모습은 여전하다. 이 디자이너는 삶을 사랑하고 살 줄 안다. 언제나 쏟아지는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크뮈스를 사랑하는 이유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크뮈스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준비되어야 하는 건 자격증이나 주변 여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자크뮈스는 19살 때부터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준비됐다. 한 배우는 자신의 아기 조카를 돌보면서 ‘인간은 날 때부터 완성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철저히 공감한다. 인간은 본디 완전한 인격체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이 진실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성숙해지고, 늘 스스로를 채우고 다듬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 아니, 그렇게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기 전 미성숙하고, 채우고 다듬고 고치지 않으면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각자마다 못하고 잘하는 점이 있길 마련일 뿐, 그게 시간에 따른 변화가 아니다. 그러니 인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산해야 함이 옳다. 그러므로 나는 덜 자란 어른도 아니고, 일찍 자란 아이도 아니다. 아이와 어른의 모습을 둘 다 갖춘 것도 아니다. 내가 앳된 얼굴을 하고, 소녀가 입을 법한 옷을 좋아하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손목을 움직인다. 어릴 적의 이야기는 커서 한 편의 소설이 된다. 어릴 적부터 있던 피아노 건반 위에서 좋아하게 될 줄 몰랐던 곡을 치고 노래한다. 상상을 그리기 위해 무거운 캔버스를 들고, 보고 싶은 것에 가까이 가기 위해 카메라를 지탱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 손목을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의 소재로 적용하기 위해 손목을 움직인다. 이 손목이 수완(手腕)이다. 나는 수완을 부린다, 이 손목 그대로. 지금껏 이랬으니까. 이따금 이 손목의 맥박을 잰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맥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아이도, 이 어른도 같은 인간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면 답하기 그렇게 까다롭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바로 당신의 본모습인가, 묻는다면 당신은 자신 있나? 지금 이 사람은 그때 그 아이와 동일 인물인가?


<Homage to Jacquemus>

제가 자크뮈스로부터 영감 받아 만든 개인 작업물입니다. 

*제 그라폴리오에서 개별적으로 감상 가능합니다. 

*자크뮈스의 옷 없이 자크뮈스의 정서를 반영한 스타일링 관련해서는 

제 블로그를 참고해주세요.

**댓글란에 링크 있습니다


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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