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쟁이에서 질문장이를 향해

My Life but Better : 질문이 이끈 삶의 변화

by 전해리

질문쟁이에서 질문장이를 향해

_ 질문이 이끈 삶의 변화

__ My Life but Better

___ 둥글게 둥글게



원래는 질문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질문은 좋은 것’이라고 아주 일찍이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읽은 책들의 주인공 대부분은 질문을 잘했다. 질문은 주인공을 종국엔 좋은 결과로 이끌었다. 예를 들면, ‘빨간 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같은 인물들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인물들처럼 당돌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소심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께 따로 여쭤 보았지만 그것조차도 쑥스러웠다. 아주 간혹, 용기를 내어 학우들 앞에서 손을 들긴 했으나 반장을 놀리는 초등학생은 어디에나 있어, 질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머리카락 안으로 남몰래 빨개진 얼굴을 식히곤 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2학년 전까지의 이야기다.

집에서는 나를 학원이나 과외에 더 이상 보내줄 수 없었다. 어떤 과목이든 상관없이 나는 헤매고 있었지만 혼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잘하지 못했고 무얼 잘하는지도 몰랐다. 오직 아는 건, 잘하고 싶은 것과 그렇다면 잘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오래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공부 잘하는 비법’을 써보는 수밖에 없었다. 노트 정리, 교과서 읽기, EBS강의 듣기는 돈이 들지 않는 공부법이었다. 노력에도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결국은 하나 남은 비법을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다. 그게 바로 질문하기였다. 대학 아니, 20살이 되기 전까지 두 해 남짓한 시간만 남았으니, 낯가리다가는 인생이 끝날 태세였다. 다만, 수업 도중 질문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어서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을 부리나케 붙잡고 질문을 하거나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을 찾았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나 비는 시간마다 질문을 하러 다녔다. 옛날 같으면 질문을 어떻게 만드나 고민했겠지만, 어떤 질문이 좋고 맞는지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했다. 공부하다가 모르면 질문했고, 모르지 않아도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해 질문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거에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면 다시 질문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면, 이해하지 못했어도 다시 질문하기가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라서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던 과거 수학 과외 시간이 상기되어 속으로 쓴웃음을 짓곤 하였다.

“저번에 질문했는데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시 설명해 주세요.”

질문의 질문 끝에 그제야 성적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한편, 변화는 성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어느샌가 무언가 잡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공부라는 게 무한한 의무감에만 머물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근본적 이유 없이 성적 향상을 위한 단순한 질문만 해댔지만, 그러던 중 헬렌 영어 선생님께서 나의 질문에 본격적으로 물음표를 달아 주셨다.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이렇게 질문했더랬다.

“선생님, 저 이 문장 잘 모르겠어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아주 다정하게 답을 주셨다.

“먼저 한번 해석해 볼래? 한번 해 보자.”

나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떠듬떠듬 영어 문장을 해석했다. 해석이 좀처럼 되지 않는 문장을 틀리게 해석했다는 생각에 나는 위축된 상태로 곧바로 선생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따스한 눈빛을 하고 계셨다.

“정말 잘했어. 그래도 선생님 생각에는 (펜을 들고 직접 표시하시면서)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것 같아. 어때? 다시 해석해 보자.”

나는 다시 해석했고, 처음과 나중의 해석을 비교하며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다. 오직 질문의 힘이었다. 정확한 질문이 정확한 답을 끌어냈다. 동시에, 8살 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18살이 될 때까지 그 어떤 선생님도 학생인 나에게 의견을 물은 적이 없었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질문의 주체가 무엇 아니, 누구여야 하는지 처음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질문을 다르게 하였다.

“저는 이렇게 보는데, 선생님이 알려 주신 거랑 EBS 참고서와 해석이 달라서요. 어떻게 해석하는 게 맞는 거에요?”

“저는 해석을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해석하면 뒷 문장들과 연결이 안되어서요. 어떤 부분이 문제인 거에요?”

“이 나라의 사건이 다른 나라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교과서만의 설명으로 부족해서 그러는데, 선생님께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안 돼요?”

질문의 중점을 문제 그 자체보다도 나의 견해로 옮기니, 드디어 질문하는 것이 즐거웠다. 더는 질문하는 것이 뻘쭘하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질문에 변화가 또 한 번 찾아오니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다소 의아하고 받아들이기 난감한 변화였다. 성적 향상과 같은 단순한 변화는 없었다. 나는 질문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는 대신 내가 질문해야 하는 것의 근본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왜 정답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 외의 답은 정답으로서 가치가 없는가?”

“한번 정답은 영원한 정답인가?”

내가 생각한 답은 시험지 답란에 없었고, 연이어 선생님과 참고지에서 알려준 답에 반발심이 들었다.

“왜 내가 생각한 답은 정답이 될 수 없나?”

학습은 어림없는 관습이고 오지선다형은 여지없는 관행임을 지각했고, 서글펐다. 나는 더 이상 정답을 알아도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정답을 외워야 하기로 규정된 것이었다. 정답이란 건 결국 정해진 답에 불과했다. 나는 학교 공부에 완벽하게 질려 버렸다. 학생이 이따금 공부가 하기 싫을 때도 있으니, 그때마다 싫어도 왜 해야 하나 자문하긴 했다. 그리고 자답했다. 수도 없이 자답했다. 그렇지만 나의 질문이 뭐가 되어도 나는 이 주입식 교육의 환경이라는 정답 속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 되기엔 나 자체가 이미 이 정답의 오답이 되어 버렸다. 질문의 정답을 알면 알수록 납득하기 거북했고, 외우기가 버거웠다. 머리가 복잡해졌고 모든 것을 가만두지 못하고 ‘왜?’를 덧붙였다. 학교 공부와 주입식 교육에 전의를 상실하니 성적은 끝내 향상을 멈췄다. 나는 싫어도 학교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중 가장 절실했던 이유를 실현하지 못한 채 애증의 고등학생 시절의 문을 닫았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질문만 멈췄더라면, 오직 정답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순순히 공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을 획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나는 또 질문하고 있었다. 풀어야 할 문제가 이젠 없는데도 나의 질문이 나의 앞날을 망친 주범이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질문은 늘 같았고, 질문에 대한 답은 통 찾을 수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정답이 아닌 질문을 따른 삶의 대가는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았다. 나는 벗어나고팠던 삶 안에 여전히 갇혀 결코 원한 적 없던 반복만 계속하는 꼴이었다. 나는 같은 질문만 거듭하면서 어떤 답도 구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질문을 중점으로 똑같은 일상만 내내 에돌기만 했다. 그러나 사람은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작심한다 해도 원은 삐뚤다 못해, 어떤 원은 시작점과 끝점조차 어긋난다. 즉, 반복에도 틈은 있다. 거기서 거기였던 대학 수업 중 열외를 본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수님은 중국에 관해서라면 뭐든 끊임없이 의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학생들이 교수님의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아도 교수님은 답을 판단하지 않으셨다. 대신 질문하셨다. 덩달아 교수님은 정답이란 건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시곤 하셨다.

“과연 그럴까?”

나는 교수님의 수업에서 답을 들은 기억이 없다. 지금으로선 그 수업에서 수학한 지식도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는 건 질문에 답이 반드시 있을 필요 없다는 수확이다. 교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나는 ‘뭐가 잘못된 걸까’ 질문에 ‘과연 그럴까’ 반문했다. 순간 모든 것이 간단해졌다. 과연, 잘못된 건 없었다. 옳은 질문은 곧 옳은 답이었고, 의문도 질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미답(未踏)으로 들어섰다. 정답과 해답이 없는 그곳으로 영원히. 그리고 익숙하게 다시, 질문을 했다. 다음 질문, 또 다음 질문, 그 다음 질문… 오직 질문뿐이었다. 그런 삶이 되었다, 답이 없는 삶. 답 하나 없이 삶은 이어졌다. 그럼에도 공허했다. 정답은 물론 오답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삶인데도, 오답을 찍어서 손해보는 삶이 더 이상 아닌데도, 답을 걱정하지 않고 질문을 마음껏 해도 되는데도 나는 사실 답이 절실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의 공백에 멈칫할 때마다 실질적으로 같은 질문만 하고 있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답의 공백이 나에게 너무 컸던 것이다. 질문만으로 충분한 줄 알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답은 정해져 있던 셈이고, 그 답이 나에게 너무도 절박해서 그 답이 나올 만한 질문을 형태만 바꿔서 했다. 정해진 지 오래지만 나오지 않는 답이 있는 그 질문에 따라 삶이 움직였다.

행복하고 싶어서 질문했다. 나의 삶을 행복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일 것 같을 때마다 질문을 찾았다. 잡지에 실릴 글을 전혀 관심도 없던 장소를 주제로 써야 할 때, 나는 질문을 꺼냈다.

“당신은 그곳에서 행복한가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바탕으로 글을 써서 잡지사에 보낼 수 있었다. 질문 덕분에 나의 글을 한 번이라도 더 남들 눈에 띄는 곳에 걸 수 있었다. 오늘날 20대에게 필수라는 인턴 경험의 기회를 이미 잡았을 때는 기쁘기는커녕 행복하지도 않아 질문을 했다.

“다들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꼭 행복할 수 있는 길일까?”

나는 기회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여행 경비와 카메라를 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런저런 대회에 나갔다. 그렇게 힘겹게 여행길에 올랐고, 불행하지 않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여행 에세이 출간이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는 생각에 행복하다고 믿어, 질문에 욕심을 냈다.

“다들 의심하지 않는 행복을 포기하고, 다들 의심하는 행복을 찾는 데 용기를 내야 할까?”

그리고 나는 말 그대로 ‘죽으라’ 노력해서,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의무와 도리의 족쇄를 끊어 내고, 길지 못한 여행을 떠났다. 두려움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릴 때 질문을 토했다.

“이게 맞는 걸까?”

질문을 약처럼 삼켰다.

“행복을 앞에 두고 포기할 거니?”

불신과 확신을 번갈아 질문하며 여행을 하였다. 곧 질문의 여행이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행복을 질문했다.

“이곳에 와서 행복했어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뭘 할 때 특히 행복해요?”

“지금의 직업에 만족해요?”

“앞으로 또 뭘 하고 싶어?”

“여기에 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어요?”

“장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이번 주말에 같이 브런치 먹으러 갈까?”

“우리 살면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살면서 행복만 질문할 수 없었다. 아니, 행복을 질문만 할 수 없었다. 질문의 형태가 필시 질문이지 않아도 됐다. 여행지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행복이든 뭐든 질문하지 않고 곧장 행동으로 옮기고 행복할 뿐이었다. 나는 행복에 관한 질문을 멈췄다, 마침내 한 가지 답을 내고.

“질문함으로써 행복하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궁금하지 않았다. 생존과 행복을 위해 질문하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대신 처음으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나는 왜 질문하는가.”

호기심으로 시계 토끼를 따라가다 이상한 나라로 떨어진 앨리스도 나보다 어리둥절할까. 위워크(WeWork), 이케아(Ikea), 그리고 매거진B까지, 내 눈에도 물론 남들의 눈에도 몹시 근사한 것들의 화합의 장이었다. 그 안에는 대단히 ‘프로페셔널’하고 ‘인텔리’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있었고, 나의 옆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가장 설레면서 가장 편했다. 왜냐하면 나는 앨리스처럼 얼떨결에 그 자리에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매거진B와 이케아에 관한 질문을 인스타그램 댓글에 올린 몇몇을 뽑아 초대된 자리였다. 그때까지 나의 시원찮은 능력으로 이뤄낸 몇 안 되는 감사하고 기쁜 성취 중 가장 덜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부담 하나 느끼지 않고 그저 즐기면서 어느덧 매거진B의 에디터와 이케아의 담당자 간 대담의 시간이 끝나고 질의응답의 시간이 찾아왔다. 일찍이 인스타그램으로 받은 질문에 두 사람이 답하는 차례였다. 아쉬우면서도 여전히 신나는 기분으로 질문과 대답을 경청하는 와중에 들은 마지막 질문에 나는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저널리즘으로서, 브랜드로서, 혹은 잡지 저널리스트로서 매거진B는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나요?”

내 질문이었다. 그건 내 질문이었다. 에디터가 중요한 질문이라 칭한 질문이 바로 내가 쓴 질문이었다. 죄송하게도 그 답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지금도 그 순간이 몹시도 생생하다.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삶의 층위가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질문의 이유를 그때 처음 어렴풋이 인지했다. 한편으로는 선생님께 질문을 하러 다녔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와 본질은 다를 바가 없음을 지각했다. 심장이 철렁했다.

나의 질문이 제 몫을 할 수 있는 기회라면 나는 득달같이 달려 들었다. 얼마든지 손을 들었다. 예를 들면, 쥬드 프라이데이의 ‘진눈깨비 소년’ 후기로 마련된 인터뷰도 있다. 감사하게도 내 질문이 첫 질문이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질문을 할 때면 어찌할 도리도 없이 손과 목소리가 떨렸지만, 심장만큼은 두려워 떨리는 것이 아니라 설레어 두근거렸다.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네 분의 작가님들은 본인의 그림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쓸모가 되길 바라시나요?”

하지만 굳이 그런 기회가 없어도 언제 어디서든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질문이 재밌어요.”

“꽤 철학적인 질문이네요.”

“질문이 깊어서 놀랐어요.”

그럴수록 내가 질문하는 이유를 절감하였다. 기회가 없는데도 굳이 달려가서 정중히 인사하고 어리숙하게 질문했다.

“글 쓰는 사람은 모집 안 하세요?”

점차 고민이 되었다. 더더욱 망설여졌다. 나는 또 손을 번쩍 들었다. 기회가 또 넘어왔다. 순간, 머릿속에서 단정하게 정리한 질문 대신 단전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제가 어디까지 떨어져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정욱준 디자이너님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하였다.

“스스로한테 지지 않으면 돼요.”

우문이었고, 현답이었다. 심장이 내려 앉았다. 이윽고 자성하고, 인정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질문은 결국은 나를 대변했던 것이다. 나의 관념과 감정을 드러내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상징이었다. 나는 질문함으로써 나 자신을 확인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를 예술로 표현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글을 쓰려면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나대로 살기 위해 글을 썼고, 글을 쓰기 위해 질문해야 했다. 이야말로 유일하게 정해진 정답이었다.

“늦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지금 다시 시작하면 그때보다 더 새롭고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술을 함에 있어 늦고 이른 때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예술을 꽃피우길 적합한 시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당신에게 꼭 상처만 남긴 건 아닐 텐데요. 정말 상처만 남겼다 할지라도, 우리는 살면서 신기하게도 그 상처가 도리어 힘이 되는 경우를 만나지 않던가요?”

“왜 그게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단정지어요?”

나는 질문을 한 덕에 얼마나 큰 세상에 갔던가. 얼마나 많은 세계와 이야기를 만났던가. 그 인생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역량이 되었던가. 그리고 당신의 삶도 하나의 삶이고, 하나의 이야기로서 어엿하다는 응답은 누구의 입에서 들었던가. 그들은 어느 곳에 서 있었던가. 그러니, 삶은 오르거나 높일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길 위에서 그대로.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How to keep being yourself all the time in this messy and confusing world?)”

나의 질문이 다섯 명 중 하나로 채택되어 나는 또 이상한 나라에 와 있었다. 릭 오웬스(Rick Owens)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줄에 서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세계 속 결정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학교 때 학생 주임 선생님이 보면 기겁을 할 의복을 입은 사람들, 이런 세상이 익숙해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나의 질문을 선택한 잡지사에서 준 릭 오웬스의 책을 손에 꼭 쥐고 저절로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어느새 눈 앞에는 잡지 속에서나 보던, 패션의 역사로 알던 그 릭 오웬스가 서 있었다. 나는 참 멀리도, 또 높이도 왔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잡지사를 통해 남겼고, 당신의 답변을 기대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의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나의 목소리는 끝내 묻히고 말았다. 나의 기대와 달리 사진 한 장과 사인 하나로 싱겁게 릭 오웬스와의 아주 짧은 순간은 끝이 났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위의 호화롭고 낯선 사람들을 스치면서, 평생 사서 입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를 릭 오웬스의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귀 기울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되새겼다. 그 사람들의 얼굴이야말로 셀 수 없었고, 그들의 답변이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내 안과 내 삶에 녹아 있었다. 나락에 있던 나를 꺼내 준 건 나의 질문에 화답해 준 그들이었다. 이름마저도 이젠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간 보통의 그들이었다. 세계와 역사에 이름을 떨친 특별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후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평생 모르기로 결정하고 애써 구매한 잡지를 반품하였다. 나에게 정해진 답변은 하나면 족했고, 그 질문에 낼 수 있는 답변이란 답변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그 이후로 나는 화려한 파티장에 간 적 없다. 대신 변변찮은 대장간에 앉아 질문을 연단하고 있다. 나를 이끌어 준 사람의 이야기가 흙 속에만 묻히지 않도록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도구를 단련하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와 태양의 빛을 보도록 말이다.

질문을 읽으려면 누군가의 인터뷰를 읽으면 됐다. 그 어떤 글보다 인터뷰를 많이 읽었던 시절이었다. 어떤 인터뷰를 읽어도 좋은 질문을 질문했으며, 그러므로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를 가장 좋아했다. 매 인터뷰마다 연신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질문을 고안할 수 있을까, 질문 하나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끌어 낼 수 있을까 그 능력에 흠뻑 빠지고 그 실력을 흠모했다. 나는 또 용기 내어 기자님께 연모를 고백하면서도 질문을 포함한 이메일을 보냈더랬다.

“소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캐릭터를 캐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에 대해 기자님만의 해답이 있으신지요?”

“날카로운 질문을 부드럽게 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나요?”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글에 대해서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답장을 질문자(인터뷰어)로서 경전 삼아 ‘인터뷰 프로젝트: 나, 영수’를 비로소 공개적으로 시작한다. 나는 이 자리, 이 길 위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남긴다.

나는 질문함으로써 생을 이끈다.






덧붙이는 글

나는 아무래도 나약한 사람인지라 강인함을 스스로 확인시켜야겠다. 2018년 4월이었다.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제 본질은 글 쓰는 사람이고자 합니다. 글의 형식에 한계를 두지 않고 여러 종류의 글에 도전해 조그마한 결과를 계속 내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또한, 곧장은 아니지만, 제 글을 예술로 활용해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큽니다. 이 전시회의 핵심은 아마 글의 본체를 평면에서 입체로 바꾼다는 것에 있게 될 예정입니다.”

기자님, 이 글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한번, 답장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질문장이가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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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자 합니다



<둥글게 둥글게>

- 원체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마지막 편지

-샴페인 잔에 담은 우유

-

-하농

-My Life but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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