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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Mar 31. 2022

티가 섞인 옥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그래, 그는 확실히 옥의 티 같은 존재였다. 마초들의 거친 움직임에 비하면 나비처럼 팔랑거렸고, 야수들의 거침없는 언행과 대조적으로 꽃처럼 나풀거렸다. 옥의 티처럼 짐승들 사이에서 그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독보적인 존재였지. 그는 차라리 티가 섞인 옥에 가까웠다. 곧 물러 터질 듯 보여도 똑 부러진다. 저들과 달리 순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진무구하라는 법은 없다. 

피터(Peter)는 종이꽃을 만들 정도로 세심하고 스크랩북을 꾸밀 정도로 섬세하다. 피터의 엄마 로즈(Rose)는 피터의 그러한 면모를 따스하게 보듬지만, 카우보이들은 비아냥을 퍼붓기 바쁘다. 피터는 카우보이의 조롱에 벌처럼 쏘지 못하고 그 자리를 태풍에 날라가는 옷가지처럼 벗어날 뿐이다. 로즈의 재혼 후 처음 맞이한 학교 방학으로 피터가 필(Phil)과 조지(George)의 목장집에서 머물게 되자 엄마는 아들에게 카우보이 모자를 사 준다. 피터는 여타 카우보이처럼 모자를 쓰지만 백조 사이에 낀 흑조처럼 여전히 튄다. 카우보이들은 꼭 전장을 기세 좋게 누비는 장수나 다를 바 없이 말에 올라 피터를 겁주고 그는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기 바쁘다. 게다가 말 타는 법을 알려줘도 넘어지니, 이거 원, 천생 샌님 아닌가. 탐구적이고 탐미적인 외양만 보면 왠지 흰 셔츠에 때가 타거나 바지가 구겨지는 걸 질색하고 칼라가 플라운스인 실크 블라우스만 고집할 것 같지만, 천부당만부당하다. 피터는 언제나 같은 스타일만 고수하는데, 그 옷차림이 바로 오트밀 색상의 셔츠와 셀비지 데님이다. 의외인 듯하여도, 전혀. 

그 새까만 머리에 창백한 얼굴은 순수한 백색 셔츠가 잘 어울릴 텐데, 굳이 혼합색의 셔츠를 입는다. 필과 카우보이들이 서빙하는 피터에게 괜한 심술을 부릴 때, 피터는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런 피터가 바깥에서 하는 행동은 주저 앉아 울기가 아니다. 피터는 훌라후프를 돌린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 전 사정을 아예 모르면 이 청년이 놀림을 받아 도망쳤는지 예감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 피터는 상처받지 않는다.  피터는 닭도 척척 잡고 토끼를 아무렇지 않게 해부한다. 피터는 심약해 보이지만 심약하지 않고, 강인해 보이지 않지만 강인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모습이 이중적이고, 그래서 단일하지 않은 색상의 셔츠를 입는다고 말할 수 없다. 강인하다고만 말하기에 피터는 예민하다. 그렇지만 피터는 아무 문제에나 예민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종이꽃을 두고 필의 무리들이 우롱함이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칭찬하고 아빠의 무덤 앞에 놓은 종이꽃을 그들이 우롱해서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와인이 옷에 묻을까 팔에 두른 헝겊을 두고 필이 놀려 댐이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생계에 힘겨운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 의미가 폄하됨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서, 카우보이들이 피터가 지나갈 때 야유하고 말을 탄 채 골려 줄 때 피터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피터는 잠시 반응하거나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까 피터는 엄마의 안위가 걸린 문제라면 그냥 넘길 수 없다. 왜냐하면 아빠가 엄마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였고, 또 ‘그렇지 않으면 사나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인함과 예민함을 표리(表裏) 없이 드러내는 피터는 새하얀 쌀밥색이 아니라 잡곡색의 셔츠를 입는다. 또한, 시대상이 아무래도 반영되었겠지만, 피터는 맨투맨이나 가디건, 티셔츠가 아니라 꼭 셔츠를 입어야 한다. 피터의 복수는 재단이 살아 있는 셔츠처럼 우아하지만 맨투맨, 가디건, 티셔츠와 달리 꼭 편안하진 않은 까닭이다. 이 점에서 피터에게 또라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와 같은 별칭을 붙일 수 없다. 

오늘날 탄성과 유연성이 강하고 디자인과 색상에 멋을 들인 청바지는 1980년대에 발달된 것이다. 그전까지의 청바지이자 그 근원은 구형 셔틀 방직기를 사용하여 표면이 거칠고 바지선은 투박하였다. 피터가 입는 청바지가 바로 그 셀비지 진이다. 아무리 의대에 진학할 만큼 영리한 피터라 할지라도 엄마를 교묘하게 괴롭히는 필에게 복수할 방법을 치밀하게 계획할 만큼 영악하지 않다. 엄마가 필이 질색팔색하는 걸 알고도 인디언에게 가죽을 판 것을 안 피터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그의 모습에 당장에 안절부절 못한다. 그런 후 바로 섬뜩한 대책을 실행함과 미묘하게 비교된다. 즉 피터는 결코 계산적이지 않다. 다만, 약삭빠를 뿐.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역동에 특화된 질긴 청바지가 그러므로 피터에게 어울린다. 행동거지가 우락부락하고 푹푹한 사나이 필의 비밀을 우연히 알아버린 피터는 기회를 바로 직감한다, 우위 선점의 기회. 자신의 약점 아닌 약점을 들키고 만 필은 피터에게 눈에 띄게 잘해 주기 시작한다. 말 타는 법, 밧줄 꼬는 법 등 카우보이로서의 자격을 알려주고 카우보이 전용 부츠를 신도록 만든다. 필의 목적은 필시 다른 카우보이들처럼 피터 또한 자신의 기묘한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일 터. 그런데 피터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되려 이염시킨다. 필은 곧 피터에게 압도당한다. 필은 자신이 선망하고 경애하는 브롱코 헨리(Bronco Henry)의 총명한 기질을 피터에게서 발견하고 특별하게 여기는데, 피터는 이를 적극 활용한다. 필의 앞에서는 카우보이 모자와 부츠를 반드시 착용한다. 또 필이 가르치는 대로, 하라는 대로 그를 따른다. 혹은, 따르는 척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으로 주변에 위압감을 행사하는 필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고지식한 셀비지 진에 섬섬한 들꽃송이를 꽂고 다리를 다친 들토끼를 상냥히 쓰다듬고 편안히 보내는 피터는 제 셔츠처럼 행동한다. 가끔은 창백하고 가끔은 가뭇가뭇한 마음을 숨긴 적 없다. 피터는 그저 엄마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예상치 못하게, 뜻대로 치운 것이다. 

개의 세력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구출한 사나이 중 사나이는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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