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D: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 영화(Cinema)
*이 작품의 모든 글은 해당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문 대사의 경우,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번역을 존중하되
독자적 영화 해석에 따른 필요로 인해 필자 본인이 되도록 직접 번역합니다.
*조금 더 원활한 설명을 위해 때론 직역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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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제목과 작품에 나오는 대사, 작품 속 고유명사에는 작은따옴표를 달았습니다*
***해석은 얼마든지 바뀝니다.
고로, 절대적이고 완벽한 해석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 중점적으로 다룰 영화
영화 ‘해리 포터’ Harry Potter 시리즈 _ N차 관람, 원작 _ 2차례 정독
- 글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 : 뇌리 _ 약 2년, 문서화 _ 약 3개월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마법 세계는 왜 이리도 친밀할까.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꼭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세계가 깨우는 건 잃어버린 상상력과 이상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볼드모트가 만든 호크룩스를 찾으러 나서는 여정에 앞서, 애초에 별다른 단서가 없던 해리 포터(Harry Potter)와 친구들은 호크룩스와 별 상관도 없을 법한 전혀 엉뚱한 이야기부터 접하게 된다. 바로 이미 세상을 떠난 덤블도어의 일생과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다름없는 ‘삼형제 이야기’다. 호크룩스에 대한 단정적 실마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해리포터와 친구들은 덤블도어가 남긴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충실하며 호크룩스를 추적해 나간다. 그러나 그 여정은 곧 해리 포터가 아기였던 시절 부모님과 살았던 생가를 방문하고, 호그와트 창립자를 상징하는 신성물을 수색하는 노정으로도 밝혀진다. 전진할 줄 알았던 서사는 생뚱맞게도 번번이 근본으로 거스른다. 상세한 예를 들면,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에게 살인 저주를 맞으러 가기 전 숲에서 ‘부활의 돌’을 굴려 돌아가신 부모님을 잠시 대면한다. 또한, 살인 저주를 맞고 나서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나는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반복되는 전개 방식,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거나 과거를 되짚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전개 방식에서 이 ‘해리 포터’ 시리즈가 나의 삶에 일종의 ‘삼 형제 이야기’처럼 남을 거라 확신했다.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허구이지만 합리적인 지침서 이상으로, 확대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모네 집 계단 아래 벽장에서 잠에 들고 일어나는 해리 포터는 일찍이 부모님 두 분을 다 여의고 이모네 가족과 산다. 본인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잘났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촌 두들리의 다 늘어난 옷을 입고, 익숙하게 학대와 홀대를 감당한다. 이따금 제 주변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가령, 뱀과 대화가 된다거나 눈 앞에서 유리벽이 사라진다거나 해도 자신과 상관없는 우연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요상한 사건들이 사실, 자신과 관련 있어 일어난 것이었다면? 해리 포터는 해그리드에게서 자신이 마법사라는 말을 전해 듣고 망설임없이 문 밖을 나선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는 해리 포터의 자각에서 시작된다. 아니, 자각에서 시작해서 자각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7편에 이를 때까지 영화가 주력하는 건 마법사로서 능력이 아니다. 물론 1학년이 퀴디치 수색꾼이 될 만한 역량을 갖출 정도로 빗자루를 잘 타는 건 쉽지 않지만, 영화는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데 그런 능력을 중점에 두지 않는다. 해리 포터가 마법사로서 각성하는 순간은 어떠한 능력의 발휘보다도 정의와 사랑 앞이다. 당장 본인의 특기가 될 줄 몰랐던 빗자루 타기부터 따지자면, 빗자루에 오르게 된 것도 말포이가 공중으로 던진 네빌의 리멤브럴을 잡기 위함이었다. 해리 포터가 마법사로서 존재감을 내비치는 건 이처럼 용기를 내는 때다. 저학년이 배운 마법이 뭘 그리 많다고, 헤르미온느가 있는 화장실로 트롤이 걸어가는 걸 보고 주저없이 뛰어가고, 퀴렐이 ‘마법사의 돌’을 차지하는 걸 막기 위해 무작정 향한다. 그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덤벼 드는 것처럼 비치지만, 그런 전투적인 태도에는 해리 포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마음이 언제나 기반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을 실행하는 데 있어 머뭇거리지 않을 뿐이다. 위험 앞에서 시리우스를 구하러 갈 때는 앞뒤조차 재지 않는다. 그런 정의로움과 사랑은 때때로 해리 포터에게 평소에는 발현되지 않는 상당한 고등 마법과 상상도 못한 마법을 선사한다. 시리우스가 디멘터 무리에 잠식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때까지 선보인 ‘엑스펙토 패트로눔’ 마법보다 더 큰 위력을 일으킨다. 죽음을 먹는 자를 피해 버로우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볼드모트를 맞닥뜨렸을 때도 지팡이가 저절로 움직이는 듯 실행된 경이로운 마법으로 간신히 대처하기도 한다. 해리 포터는 그 무엇도 아닌 사랑과 정의로 스스로가 마법사임을 증명하는 마법사이며, 사랑과 정의가 담긴 마법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전에, 어떠한 마법사라고 해리 포터를 일컬을 수 있다는 건 곧 해리 포터가 어떠한 소년이라고 입증하는 것과 같다. 많고 많은 마법사 중 하필 마법으로 사랑과 정의를 지킬 줄 아는 마법사로 성장할 수밖에 없던 배경에 이 소년의 안타까운 삶이 자리하고 있다. 머글로서는 이모네 가족에게서 단 한 번도 따스한 보살핌을 받은 적 없고, 마법사로서는 어딜 가나 원치 않는 유명인사 대접을 받는다. 볼드모트가 부모님을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해리포터는 친구 론이나 헤르미온느처럼 부모님의 무한한 애정과 관심 속에서 여느 평범한 아이처럼 자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해리포터 특유의 대담성, 고운 심성, 그리고 빗자루를 잘 타는 역량은 해리 포터가 비범한 초인이거나 비극적 과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규칙을 과감히 어기고 퀴디치 선수이며 선량한 마음씨를 지닌 건 그의 부모님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임스 포터와 릴리 포터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통의 아이가 되어야 할 소년이 ‘살아남은 아이’가 되어 혹독한 환경 속에서 보육되면서 외로움이 뼈아프게 발육한다. 단순하게 가족이 부재해서 외로운 것보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위험과 오해에서 느끼는 홀로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외로움이다. 모략으로 연령 미달임에도 트리위저드 시합에 참여하게 될 때나 볼드모트가 돌아왔다는 증언을 아무도 믿지 않을 때 해리 포터는 억울함, 분노, 고독이 뒤섞인 속내를 터놓고 털어놓거나 오롯이 의지할 사람이 없다. 아무리 친구라도 그만의 사정이 있기에 삐지거나 전부 공감해 주지 못하는 눈치다. 세스트랄의 존재는 외로운 해리 포터의 처지를 설명하기 적합하다. 모두의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목도하는 이의 육안에마저도 흉측하게 비친다. 존재의 가시성은 사랑하는 사람을 목전에 잃은 사람에게만 허용되니 그 존재를 외로움이라 일러도 크게 무리는 아닐 터이다. 외로움을 고스란히 느끼는 해리 포터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결여된 외로움을 너무 잘 알기에 더는 그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 누군가 목숨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기를 쓰고 자못 우악스레 뛰어드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일생에 걸쳐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트리위저드의 두 번째 경합 당시, 호수 아래서 누구보다 먼저 인질들을 발견하지만, 게임이자 시합인 걸 잊고 다른 경쟁자들이 와서 각자가 맡은 인질들을 구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본다. 게다가 본인은 론만 구출하면 그만인 것을, 플뢰르가 기권하는 바람에 남겨진 그녀의 동생 가브리엘까지 함께 데려가느라 참가자 중 가장 늦게 물 밖으로 올라온다. 게임이 어른 마법사에 의해 주최되고 진행되니 가브리엘은 안전한데, 해리 포터에게는 승리와 패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누군가라도 잃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잃을까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해리 포터의 보가트는 디멘터가 된다. 디멘터를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살아 생전 다시는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든다고 한다. 삶의 의욕을 상실시키는 디멘터는 두려움이다. 보가트는 개인이 가장 두려운 대상으로 변신하며 ‘리디큘러스’ 주문에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변모한다. 네빌이 두려워하는 보가트 스네이프 교수는 할머니의 옷을 입고, 론이 두려워하는 보가트 거미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어 웃음을 자아낸다.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넘기는 훈련이다. 한편으로는, 다들 보가트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등장할 때마다 흠칫 놀라거나 얼어붙는다. 보가트는 실제로 자신을 해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나타내는 것이니 겁먹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감정의 동요가 이는 건 두려움은 기억에 기반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려움은 실체가 아니라 감정이고, 우리는 이 감정에 속절없이 휘둘린다. 특히 두려움은 해리 포터의 취약점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이미 잃었는데 사랑하는 친구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때 그들마저도 혹여 영영 잃지 않을까 두려운 해리 포터에게 두려움은 불필요하다. 위험 앞에 두려움이 일어서 자칫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사랑하는 이를 지킬 기회를 완전히 놓칠 수 있다. 두려움을 느끼기 두려워하는 해리 포터는 두려움을 웃음거리로 승화할 수 없다. 그러니 여타 학생들과 달리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고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디멘터를 물리치기 위해 ‘엑스펙토 패트로눔’ 주문을 익혀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다. 행복한 기억, 그것도 사소하게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 행복이 강렬한 기억이어야 ‘엑스펙토 패트로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행복한 기억은 학대 속 외톨이로 자란 해리 포터에게 두려움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약점이다. 행복이 거의 없다시피 한 유년 시절을 보낸 해리 포터에게 호그와트 생활과 친구들은 살면서 처음 겪은 행복이다. 수상쩍고 위험한 사건들은 그런 해리 포터의 행복을 틈만 나면 앗아가려 하니, 두려움은 행복을 인질로 잡으려 든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행복의 존재와 힘을 더더욱 믿어야 한다. 영화에서 해리 포터는 빗자루를 처음 탔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족하니, 호그와트에 다니고 나서 처음 체감한 부모님의 존재를 생각하며 보가트 디멘터 방어에 성공한다. 행복은 순간적 감정을 넘어 불변적인 근본에 가깝고, 해리 포터의 행복은 능력의 발휘보다도 사랑의 감지에 달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억이란 과거에, 감정은 현재에 존속하기에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대부 시리우스를 잃을 상황에 처하자 현재의 불안한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히며 ‘엑스펙토 패트로눔’ 주문 성공에 좌절을 겪는다. 행복한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현재 직면한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기억에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대신 현재에서 감정을 느낄 때, 그리고 그 감정이야말로 눈 앞의 두려움을 타파할 행동을 끌어오는 법이다. 자신이 아니면 시리우스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는 두려움, 가족을 지키겠다는 절박감 속에는 소중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이 가득하다. 고로, 해리 포터에게만큼은 두려움이라는 어두운 감정은 빛을 낸다. 지키고 싶은 이를 잃을까 겁나는 두려움을 지키고 싶은 이를 본인이 못 지키면 어쩌나 염려하는 두려움으로 이겨낸다.
해리 포터는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대적하지만, 본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상황이 벌어지자 큰 분노를 느끼고 이를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주문이야 본인이 연습하면 언젠가는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이 본인이 외치는 주문처럼 용이하거나 혹은 유리하게 돌아갈 리 만무하다. 아무리 곧은 천성과 고운 성품으로 용감하게, 혹은 다소 무모하게 온갖 사건 사고와 악의 세력에 응전한다한들 그 결과는 바라는 대로 해결되기는커녕 노기만 키운다. 그럴 때마다 해리 포터는 분에 못 이기며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볼드모트의 귀환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데도 무시하는 엄브릿지에게 대들다가 벌을 받고, 론의 아빠가 고문 당하는 것을 꿈에서 본 후 격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어른들이 제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같자 그만 울화통을 터뜨린다. 왜 사람들은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온전히 믿어주지 않는 거지? 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꾸 해를 당하지? 그 사이, 불길한 생각들이 분노로 물러진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결국 가장 걱정하던 일이 터진다. 바로, 시리우스가 죽음을 먹는 자들에게 잡힌 것. 이성을 상실한 해리 포터는 오직 ‘시리우스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히며 전처럼 경솔하게 행동에 착수한다. 그러나 때론 아니, 본래 삶은 근심하는 대로 실제로 일어날 수 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과연 뜻대로 일이 풀리게 될까 과하게 걱정한다고 해서, 또 그렇다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분노한다고 해서 사람은 본인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 그리고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오로지 한 명에게만 온전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해리 포터가 시리우스의 죽음에 굉장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다. 시리우스의 복수를 하겠다며 벨라트릭스를 쫓아 가는 해리 포터의 뇌리 속에 볼드모트가 침투한다. 분노는 악을 직접 행하라고 유혹하며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해리 포터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애당초 해리 포터는 왜 분노했는가. 분노의 원천은 복수나 악도 아닌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그 사람과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사랑이 변하지도, 떠나지도 않는다. 해리 포터가 시리우스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처럼 시리우스도 해리 포터와 같았던 것이다. 해리 포터와 시리우스 모두 사랑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기에 다소 무분별했던 행동, 지나치게 용감했던 결단, 그리고 그 비극까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은 악에 의한 복수가 아니다. 해리 포터는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 아니라 악에 사랑으로 대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해리 포터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보여주는 건 능력이 아니란다. 바로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지. (It is not our abilities that show what we truly are. It is our choices.)”
부모님의 죽음에 이어 대부 시리우스의 죽음, 게다가 점점 조여오는 볼드모트의 손아귀까지, 이런 삶을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해리 포터는 겪고 있다. 왜냐하면 볼드모트가 트릴로니의 예언을 듣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해리 포터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7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나는 아이는 해리 포터뿐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해리 포터가 아니라 네빌이 될 수 있었다. 그저, 볼드모트는 네빌이 아니라 해리 포터라고 믿었고, 그리하여 해리 포터를 죽이기 위해 그의 부모를 찾아 죽인 것이다. 볼드모트가 아니었다면 이런 삶을 살 리 없음을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삶은 볼드모트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리 없었다.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볼드모트에게 지적된 운명인 셈이다. 그러니 덤블도어는 해리 포터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말한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단다. 틀린 말은 아니다. 위협의 낌새가 보여도 무시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은 가지 않고, 누군가 죽어도 애써 마음에 묻으면 된다. 그렇지만 해리 포터는 위협의 낌새에 누구보다 예민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잘만 가며, 누군가 죽으면 온몸과 마음을 던져 아파한다. 즉, 해리 포터가 특별한 배경을 지녔거나 타고나길 비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리 포터라서 그렇다. 볼드모트에 맞서야 하는 해리 포터의 운명은 정해지지 않았다. 선택받은 것도 아니다. 해리 포터가 선택한 것이다. 부모님, 시리우스에 이어 사랑하는 그 누구도 다시는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말이다. 그렇게 따뜻하고 과감한 품성으로 언제나 그랬듯 악의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반면, 악의 세력은 해리 포터와 같은 조건,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내리며 그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볼드모트는 해리 포터와 유사한 어린 시절을 겪었고, 말포이는 해리 포터와 달리 겁을 먹고 악의 세력에 가담한다. 해리 포터와 볼드모트는 외로움으로 무장했지만, 한 명은 사랑의 힘을 믿으며 사람들을 지키고, 한 명은 사랑을 비웃으며 살인을 일삼는다. 해리 포터와 말포이 둘 다 평범한 소년이지만, 한 명은 포용과 평등의 가치를 실천하고, 한 명은 차별과 배척을 서슴지 않는다. 영화는 1편부터 7편까지 동일한 조건과 상황 아래 다른 선택에 따른 결과가 얼마나 판이하게 나타나는지 보인다. 그 차이는 사용하는 마법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볼드모트가 사용하는 마법은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라는 덤블도어조차도 때때로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기상천외하다. 해리 포터가 쓰는 마법은 어떤가? 볼드모트처럼은 고사하고, 덤블도어처럼 막강한 마법을 쓴 적 없다. 헤르미온느처럼 별의별 주문을 아는 것도 아니고, 말포이처럼 뱀을 지팡이에서 발산하는 주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몇몇 주문에 월등하나, 이는 치켜세울 만한 점은 아니다. 누구나 타인은 따라할 수 없는 강점과 장점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해리 포터는 어떻게 흉악에 맞섰나? 답은, 해리 포터가 쓰는 마법의 성질에 달렸다. 해리 포터의 특기인 ‘엑스펙토 패트로눔’과 ‘엑스펠리아르무스’는 공격 마법이 아닌 방어 마법에 속한다. 어둠을 먹는 자들이 저주를 쏘아 댈 때, 해리 포터와 그 친구들은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정도의 마법조차도 쓰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를 상처 입힌다고 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쓰는 마법을 쓴다는 건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표명하는 셈이다. 한번은 뭣도 모르고, 말포이에게 ‘섹튬셈프라’ 주문을 썼지만, 공격 마법의 잔혹성에 아연실색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길 원치 않는 해리 포터는 공격에 철저하게 방어로 일관한다. 공격의 칼끝이 날카로우니 방어의 벽은 두꺼워야 한다. 그 방벽은 혼자 세울 수 없다. 같이 해야 한다. 바로 가족과도 진배없는 친구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 한 명이라기보다도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며, 외골수적 성향이 강하고, 무엇보다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작중의 론, 헤르미온느, 해그리드, 도비, 네빌, 루나 그리고 지니 모두 조연이지만 주연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발휘하며 저마다 중요한 존재 의미를 지닌 인물들이다. 론은 대가족 사이에서 좀처럼 인정받지 못했고, 헤르미온느는 현학적 기질로 종종 타인과 충돌하며, 해그리드는 괴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때때로 말썽을 초래하며, 도비는 극성스럽고, 네빌은 약초학 외에 잘하는 것 하나 없고, 루나는 과학적 근거 없는 기현상을 믿고 여러모로 너무나도 독특하다. 영화는 이런 이들의 존재 의미를 조명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홀로됨의 심정을 한 번이라도 겪거나 깊게 체감한 적 있다. 그러니 종내 그 누구보다도 해리 포터의 주위를 지키며,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따뜻하게 감싼다. 무엇보다, 서로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한다. 론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완벽한 친구이며, 헤르미온느는 지성과 지식을 해리 포터의 용기 있는 결단과 맞바꾼다. 해그리드는 해리 포터에게 어느 상황에서도 옳은 신념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며, 도비는 자유 의지의 의미를 알려 준다. 네빌은 해리 포터와 함께 끈기와 용기만이 어둠을 이길 수 있음을 자증하고, 루나는 남들과 다른 시야의 가치를 해리 포터에게 일러준다. 특히, 지니야말로 첫 만남부터 해리 포터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시선에 아주 나중에야 들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해리 포터가 지니를 사랑하게 되고, 지니는 그 누구보다 해리 포터의 심정을 곧잘 파악한다. 남들이 위험해서 안 된다고 말할 때, 지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해리 포터의 처지와 심경을 꿰뚫는다. 그를 격려하는 지니는 끝내 해리 포터의 정서적 버팀목이 된다. 덕분에 해리 포터는 호크룩스를 찾는 여정 중 절망과 막막함을 느낄 때마다 지니의 존재와 그녀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차츰 희망에 다가간다. 이렇듯 무시와 멸시 속에서 역량을 차마 펼치지 못하였으나 항상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개성과 성정은 다수가 움츠러든 어둠의 시절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었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고, 이러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우정은 죽음을 먹는 자들을 대항하는 울타리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볼드모트의 괴력을 순간마다의 협동심만으로 이겨낼 수는 없었을 터.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지팡이를 수소문하고 있는 모습을 관입하고, 그 지팡이가 동화 ‘삼형제 이야기’ 속 딱총나무 지팡이이자 덤블도어의 지팡이였음을 알게 된다. 딱총나무 지팡이의 승계 원리에 따라, 스네이프의 살인 저주 전 덤블도어에 대한 말포이의 무장해제, 그 후 해리 포터가 말포이의 산사나무 지팡이를 빼앗은 행위로 인해 딱총나무 지팡이의 주인은 해리 포터가 되며 볼드모트의 손에서 그 지팡이는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순전히 운이나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꾸로 거슬러 가면, 모든 포석의 효력이었다. 순간의 선택으로 연결진 시간의 협력이었다. 그 선택은 옳고 그름의 사이와 사랑과 경멸 사이에서 항상 결정되었다. 들여다보면, 선악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 내 주요 인물들은 선악이 뚜렷한 편이다. 대부분은 권선징악의 결말에 부합한다. 따라서 다소 뻔해질 수 있는 전개가 간간한 건 스네이프의 덕분이라 봐도 무방하다. 스네이프의 캐릭터를 그저 스파이라는 틀에만 묶는 처사는 천편일률적이다. 어둠의 마법에 대한 흥미, 릴리 에반스에 대한 사랑, 자신을 괴롭혔던 제임스 포터와 그 아들에 대한 증오, 릴리 에반스를 지켜주겠다던 덤블도어에 대한 믿음과 의심, 그리고 그 속에서 자꾸만 어긋나는 비극의 틈에서 스네이프는 우직하게 본인의 역할과 신념을 이행한다. 스네이프의 행적에서는 선악의 분간이 좀처럼 되지 않는다. 정의를 위해 내린 선택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가 제임스 포터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싫다. 하지만 릴리 에반스의 아들이니, 그를 악의 세력에서 지키는 길이 곧 그녀를 사랑하는 길이다. 스네이프의 결정은 대의보다는 사심이고, 이는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모순이다. 그렇다면 덤블도어는 어떤가. 비통한 가정사와 한때나마 그린델왈드와 함께 강대한 통치자가 되어 머글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에 매료되었던 청년 시절은 해리 포터가 잘 알지 못했을뿐더러 경악한 방면이다. 부모님의 죽음, 동생 에버포스와의 불화, 아리애나의 건강, 그리고 그린델왈드의 야욕이 뒤엉킨 상황에서 청년 덤블도어는 의무와 야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 사이 아리애나의 죽음은 석연치 않게 되고 만다. 아리애나의 죽음은 덤블도어를 더 큰 선(善)으로 이끈다. 위대한 마법사라면 역사상으로 손꼽힐 덤블도어는 더는 능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지 않게 된다. 그 대신, 덤블도어는 그 불세출한 능력을 다양한 존재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며 그들이 차별과 불평등, 배척에서 자유로워져 권리를 인정받는 세상으로의 진일보에 쓴다. 그 과정을 통치나 지배라 단정지을 수 없다. 즉, 통치하지 않았다뿐이지 사람들에 대한 정치와 지휘가 있었다. 불사조 기사단, 하다못해 스네이프에게조차 지시를 내리지만 모든 정보를 속 시원히 설명해주지 않고, 호크룩스 또한 오직 해리 포터와 론, 헤르미온느에게만 알도록 입단속한다. 호크룩스의 발견과 볼드모트의 사멸에 덤블도어의 공헌이 적잖았겠지만, 그 내면에 목적 달성을 위한 은근한 희생 종용이 내포된 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덤블도어가 스네이프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학생들과 교수진의 불신에도 트릴로니를 굳이 학교에 남겨두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특히, 해리 포터에게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로 하여금 선택할 권리를 일깨웠다고 우리는 판단할 수 있을까? 게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발언은 해리 포터와 수많은 생명들의 헌신, 즉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또한 모순이다. 사건의 인과는 매번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어떤 의혹은 끝까지 남는다. 영화 속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해리 포터는 자신의 아버지가 합당한 이유 없이 스네이프를 괴롭혔다는 데서 크게 충격을 받고, 시리우스와 루핀은 ‘그때 어려서 그랬다’는 식으로 무마한다. 이렇게 엇갈리고 뒤섞인 선악 속에서도 마침내 평화에 도달하고 마는 동력을 성찰과 사랑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의 과욕으로 인생에 무를 수 없는 패착을 남기게 된 덤블도어가 한평생을 악의 세력 퇴치에 전념했듯, 해리 포터는 선대의 과오에서 현재 취해야할 행동을 결정한다.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다. 말포이가 아무리 본인을 괴롭혀도, 해리 포터가 먼저 말포이를 괴롭힌 적은 없다. 본인이 죄인을 처단하지 않는다. 페티그루를 죽이려는 시리우스와 루핀을 말린 것에서 볼 수 있듯, 복수가 해소시킬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선입견과 오해에서 다른 존재들을 대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아이’라는 세간의 편견과 시선 속에서 살기 때문에, 상대를 그 이상 그 이하로 대하지 않고 존중한다. 도비와 같은 집요정, 그립훅과 같은 도깨비, 해그리드와 같은 거인을 해리 포터는 세상이 정한 굴레에서 벗어나 선의와 우정으로 마주한다. 해리 포터의 이타적인 태도는 과거로부터 계속된 폐단을 바로잡는다. 또한, 이러한 행위에 선의 이상으로 사랑까지 포개질 때 무적의 힘이 발현되어 과거의 모순을 포용한다. 릴리 에반스를 영원히(“Always”) 사랑하는 스네이프는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비밀리에 해리 포터를 도운 것을 침묵한다. 그의 침묵은 해리 포터의 용기로 이어진다. 이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꼭 살아야 했다면 이제는 죽어야 한다. 해리 포터의 죽음, 자세히 말하면 해리 포터라는 호크룩스의 죽음으로 상황은 또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며 타인으로 하여금 예상치 못한 행동을 촉진시킨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나시사 말포이는 볼드모트에게 거짓을 고하고, 사랑하는 가족의 시체를 보가트로 보던 몰리 위즐리는 벨라트릭스를 무찌른다. 한 명, 한 명의 용기는 종국에 볼드모트의 죽음을 이끌어낸다. 해리 포터 단 한 명의 힘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의 돌발 행동, 사정,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는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그래도 만약, 결투의 마무리를 짓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해리 포터여야만 하는 이유를 꼭 논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곧 이 ‘해리 포터’라는 영화와 소설이 전하려는 교훈이 되겠다. 스무 살도 아닌 겨우 17살, 마법 실력은 어른에 비해 불충분하고, 마법 세계를 경험한 지 고작 7년밖에 되지 않은 해리 포터에게 세상의 명운이 달리는 건 현실적으로 비현실적이나, 현실의 우리는 이런 비현실에 비단 열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스레 감화된다. 해리 포터가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정면과 주위로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은 새롭고, 당황스럽고, 위협적인 반면에 해리 포터의 실력은 서툴고 실력보다 마음이 앞서기 일쑤다. 우리도 해리 포터와 같은 현실을 산다. 우리도 살면서 내 실력 이상의 실력을 요구하는 도전에 매번 직면하고, 그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 과제는 실력의 몸집보다 크고, 능력이라는 한계는 도리어 두려움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해리 포터의 위기 돌파 방식으로 우리는 실력보다는 능력, 능력보다는 능력을 어디에 활용할 것인지의 선택, 그리고 모든 과정에는 능력만이 관여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우리는 부족하고 결핍되었지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믿느냐에 따라 위기의 위력에 겨룰 수 있는 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작용이 결국 마법인 것이다. ‘해리 포터’의 마법 세계는 마법을 제외하면 우리의 현실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마법사들도 우리와 똑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침대에서 잠을 자고, 버스를 탄다. 또, 편을 가르고, 두려워하고, 사랑을 한다. 마법사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그 마법을 볼 수 있는 것뿐이다. 이는 해리 포터가 여타 사람들과 달리 ‘죽음의 성물’이 허황되지 않았다고 믿는 이치와 같다. 맹신이 아니라 신념이다. ‘죽음의 성물’과 ‘삼 형제 이야기’는 신념의 상징에 불과하고, 해리 포터는 그 상징성을 이해하고 있다. 딱총나무 지팡이로 인해 폭력은 폭력을 낳음을 유의하고, 부활의 돌로 사랑은 죽지 않음을 명심하고, 투명 망토를 통해 죽음이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없음을 유념한다. 관건은 존재가 아니라 믿음이고, 나아가 선의다. 해리 포터는 세 성물을 오직 순수한 용도로 활용함으로써 오히려 다른 마법사들은 보지 못하는 마법을 겪고, 삶의 진리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깨우친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저 느낄 뿐이며, 스스로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가시적으로 체현된다. 그 마법은 꼭 대단하거나 신비하지 않아도 된다. 해리 포터의 마법은 대단하거나 신비한 것 이상으로 강하다. 마법사의 돌을 뺏기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퀴렐에게 온몸으로 막아서자 그를 소멸시키는 힘이 손에서 나오거나, 분류 모자 속에서 그린핀도르의 칼을 발견하여 바로 앞의 바실리스크를 물리친다. 더불어, 따뜻하다. 론에게 자격지심을 자극하는 목걸이를 직접 부수도록 북돋우고, 악마의 화염 속에서도 말포이를 구하고 탈출에 성공한다. 해리 포터에게 진정한 마법은 다른 이들처럼 편리나 불가사의가 아니라 구원이다. 해리 포터의 마법은 지팡이보다는 타인에게 내미는 손에서 발현된다. 따라서 마치 호그와트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손길을 내밀 듯, 나 또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해리 포터’에게 손을 건넨다.
‘해리 포터’는 어른들의 동화이다. 동화란 암시와 상징, 교훈의 복합체이며,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 속에 만고불변의 섭리를 숨기고 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동화의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살면서 어려서 읽은 동화의 효력을 체감하는 날이 잦아진다. 혹은, 그리움일지도.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마법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사뭇 절대적인 우정, 꽤 엉뚱한 상상력, 매혹적으로 발휘되는 진가와 진의는 현실 속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리 포터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살면서 단 한 번도 한 적 없던 아니, 어쩌면 다시 한 번 더 마법을 일으키고 싶다. 순수, 신뢰, 용기가 주는 마법을 한 번 더 믿고 싶다. 해리는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이겨내고, 이타적인 선택을 내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결정한 운명을 과감하게 따른다. 그러한 해리가 쓰는 환상적인 마법을 이 현실 속에서 한 번 더 기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해리의 마법을 마법사가 아니라 현실의 사람들도 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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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주문은 무엇인가요? 기숙사 좀 그만 나누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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