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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Oct 17. 2022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을 권리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인주는 돈에 눈 먼 속물도, 속 없는 바보도 아니다. 인주는 추운 겨울을 척추를 꼿꼿이 펴고 따뜻하게 나고 싶었을 뿐이다. 겨울에 춥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닌가. 

사람마다 가난에 대한 정의가 다를지라도 경제학자 아마르타 센(Amartya Sen)의 주장엔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가난은 그저 돈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은 인간이 타고난 가능성을 깨달을 기회를 박탈한다. (Poverty is not just a lack of money; it is not having the capability to realize one’s full potential as a human being.)”

인주는 극심한 가난으로 겨울 코트와 아파트를 채 갈망하기도 전부터 동생 인선이를 잃었다.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써도 시원찮을 나이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삼켰다. 가난은 이러한 비참이다. 나 홀로 살아 남아야 해서 뺨을 맞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뺨을 내어주는 바보 같은 수모를 견뎌야 하는 거다. 가난은 자기 희생이다. 잘하는 건 없어도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싶은 마음을 가정 형편에 양보하고, 유산커녕 숨만 쉬어도 빚이 쌓이는 집안 사정을 첫째로 떠안고, 온갖 구박과 모함을 듣는 왕따를 당해도 집에 책임질 게 많아서 퇴사할 수 없다. 그렇게 인내하는데도 겨울에는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추운 화장실에서 출근 채비를 하고, 누가 볼세라 혼자 먹는 점심을 후다닥 해치우고, 회사 사람들이 시시덕거리는 휴가 이야기에 절대 낄 수 없다. 그런데도 인주는 막내 인혜의 유학 꿈을 이뤄주고 싶다. 정작 본인은 아파트 마련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겨울 코트 하나 장만하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가난은 겨울 코트로 티가 난다. 봄, 여름, 가을 동안 가린 가난은 겨울에 고작 코트 하나로 티가 난다. 아무리 좋은 아마 소재의 옷도 결국엔 구겨지고, 봄과 가을은 짧은 데다가 트렌치 코트는 어쩌면 거기서 거기로 보이니 상관없고, 인주는 늘씬하고 태가 좋아 뭐든 안 어울리겠냐만은, 겨울 코트는 열외다. 특히 검은색 겨울 코트. 검은색은 의류의 모든 품종 중 기본인데도 겨울 코트에 있어 유독 잔인하다. 일단 겨울 코트는 디자인이 천차만별하기보다 천편일률적인 편에 속하고, 사실 디자인을 떠나서 보온 목적으로 입어야 하고, 그래서 나의 몸매가 어떻든 내가 뭘 차려 입든 간에 그 겨울 코트 하나로 다 허무하게 감싸진다. 그렇게 중차대한 검은색 겨울 코트는 잔혹하게도 가난을 감별한다. 본유한 검은색의 농도? 보풀 여부? 그것도 아니면 때깔? 

“아니, 네가 틀렸어.” 

검은색 겨울 코트는 가난하면 전혀 따뜻하지 않다. 가난은 특별함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평범함을 못 누리는 것이다. 부자도 특별한 건 가끔 누린다. 혹은 그 특별함을 매일 누리는데, 어차피 매일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게 평범이 된다. 가난한 겨울 코트는 우선 무겁다. 깃의 모양, 단추 개수, 소매 길이 등 디자인의 변화가 무쌍하더라도 그건 다 겉모습이고, 관건은 옷의 토대인 옷감이다. 가격이 싼 코트는 부직포처럼 무게감이 있고, 도톰하고, 설피다. 겨울에는 한기로 몸이 절로 움츠러들고 움직임이 둔해지는데 가난한 겨울 코트는 그 추위와 육중함을 더욱 가중시킨다. 분명 입었는데 안 입은 듯 바람이 솔솔 들어오고 시간이 갈수록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지붕처럼 나도 코트의 무게에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다. 게다가 앉은 모습 그대로 구김이 지고, 몇 번 안 입었는데도 보푸라기가 일고, 색이 꼭 이미 몇 년을 입은 것처럼 금세 바래 다음 겨울에 또 새로운 겨울 코트를 사야 한다. 그 와중에 더 가관인 건, 코트는 싸구려도 비싸다. 월급은 사계절 내내 변하지 않는 마당에 같은 다홍색이라도 그게 겨울옷이면 값이 오른다. 이 지경인데 겨울이 되면 정부에서 ‘겨울옷 장만 기금’을 지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검은색 겨울 코트는 어느새 사회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는 것이 현실이다. 패딩은 어른스러운 느낌을 영 못 낸다. 일반적으로 패딩이 짧든 길든 그저 통짜 아니던가. 퍼나 무스탕은 매일 입기에는 무난한 느낌이 덜해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양산한다. 가디건은 아무리 두꺼워도 눈 내리면 끝이다. 이 전부가 학생이라면 별 관계없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코트를 입을 일이 왜인지 모르지만 원망스럽게도 잦아진다. 더구나 그 코트는 꼭 검은색이어야 하더라. 다른 나라나 문화권에서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튀는 사람을 신기하게 보거나 경멸하지 않던가. 검은색도 아닌 코트에 보풀이 나고, 구김은 그대로 박제되고, 색깔까지 요란스레 튄다면 당신은 외계인을 본 듯한 시선이나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받을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책잡히지 않고 녹아 들려면 검은색 겨울 코트는 필수다. 검은색 겨울 코트는 평범하고 단정하고 품위가 있다. 당연히, 겨울에도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고. 

누군가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에도 코트를 고수하고 있으면 그건 겨울 코트다. 심지어 그게 검은색에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면 더더욱 검은색 겨울 코트다. 하지만 이 겨울 코트가 반드시 코트의 대명사인 막스마라라든가 더 로우와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제품일 필요는 아예 없다. 과잉 생산의 시대에 아울렛만 가도 전 시즌에 100만 원을 호가하던 검은색 겨울 코트도 적어도 절반은 할인되어 판매되고 있다. 21세기의 미덕이 무엇인가: 내가 아주 조금만 더 수고하면 할인 수단을 취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즉 조금만 더 수고하면 몇 년은 족히 입을 쏠쏠한 코트 한 벌 마련할 수 있다. 매해 싸구려 코트를 한 벌씩 사느니 십 년에 한 번을 사도 튼튼한 코트가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매 겨울마다 코트를 찾아 헤매는 것도 시간 낭비고 하니 사람이 좀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인주는 그렇게 못 했다. 인주는 기껏 산 겨울 코트를 빼앗겼다. 

인주는 좋게 말하고 싶어도 좀 바보 같은 구석도 있고, 쉽게 말해 돈에 한 맺힌 경험도 많다. 누가 빤히 보이는 위험에 냅다 뛰어 들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사인을 하라는 대로 사인을 하나. 편을 들자면 그게 인주 잘못은 아닐 것이다. 가난한 상태가 너무 오래 되면 이성이 마비된다. 대신 예민해진다, 돈의 촉감에. 맞다, 다섯 대 더 맞으면 죽을 수 있고 영어도 모르고 금융 지식도 없이 무식하다는 것. 다만 인주는 그렇게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돈이 필요했고, 영어도 모르고 금융 지식도 없이 무식하지만 화영 언니를 믿는다. 왜냐하면 인주는 알게 모르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수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인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단순한 돈보다 동생을 수학여행 보내거나 수술시킬 수 있는 돈이고, 명품보다 사람들과 모나지 않게 어울리기 위한 대화 소재고, 넘치는 돈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빚이라도 없는 형편에서 걱정 없이 사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남들과 근사(近似)한 것이 인주에게 너무 필요하다. 인주가 정말 돈을 밝힌다면, 화영 언니가 두고 간 20억 원을 당장 써야 했다. 백화점 오픈런을 하고, 골프를 하러 다니고, 아파트까지는 못 사더라도 창문도 안 닫히고 문 잠금 장치마저 허술한 그 집을 당장 벗어나 하다못해 주상복합이라도 알아볼 것이다. 그런데 인주는 20억이 생겨도 기껏 할 수 있는 게 1+1(원 플러스 원) 아이스크림 왕창 사기, 올리브영에서 향이 나는 립글로스나 고급스러운 향이 나는 방향제와 빗을 쓸어 담기, 인혜 손에 5만 원 쥐어 주고 친구들에게도 맛있는 거 사 주라고 보듬어 주기다. 인주는 이토록 평범하다. 어렸을 때 피자 가게에서 생일 파티를 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해 700억 원이 싱가폴에 있는데도 ‘샤랄라’ 치마를 사 입고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걸로 만족을 느낀다. 이런 인주에게 가난해서 너무 부족했던 건 검은색 겨울 코트다. 

검은색 겨울 코트는 평범의 상징이고, 평범할 수 있는 권리다. 의상이나 원단 계열 종사자가 아니라면 풍파를 견디는 검은색을 내기 왜 어려운지, 바람을 막고 체온을 유지하는 기본 기능이 왜 보장되지 않는지, 내구성과 고가의 상관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알 수 없을지라도, 마치 합리적인 생각을 잘 못 하고 영어와 금융 지식을 잘 모르는 인주처럼,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권이라는 게 있단 말이다. 마트 포인트 몇 점, 몇십 점이 아니라 몇 점에 벌벌 떨지 않고, 아파트가 아니어도 집에 ‘샷시’를 설치해서 겨울에 춥지 않고, 생일 때 먹고 싶을 걸 먹을 권리 말이다. 넘치는 사치가 아니라 약간의 여유, 그게 바로 인간에게 필요하다. 그냥, 뭉친 어깨를 풀을 요가 정도라도 다닐 수 있는 여유. 무엇보다 억울한 상속빚을 탕감 받아 인생을 깨끗하게 돌려받을 권리. 이 권리가 왜 없어서 그깟 검은색 겨울 코트가 뭐라고 통 크게 사지 못하냐고. 그거 하나 산다고 왜 생계가 흔들려야 하냐고. 원시 시대에도 가죽을 두르고 불을 피우고 음식 저장도 했을 텐데, 21세기에 돈 주고 산 코트의 질은 알 수 없고 높아지는 전기세와 물가가 무서워 보일러도 못 틀고 장도 못 본다. 

인주는 화영 언니가 남긴 20억 원이 든 돈가방을 아주 꿋꿋이 이곳저곳 메고 다닌다. 그리고 들킨다. 인주는 고 실장에게 아무 미련 없이 겨울 코트를 건넨다. 겨울 코트를 서슴없이 벗어 주며 1억 원을 베팅한다. 그게 인혜의 수술비다. 인주는 본인이 사회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학력과 경력을 보유하고 인경이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인혜처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을 잘 믿고 정이 많은데 사회는 이런 인주의 특징을 약점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인주는 언제나 사건의 해결사로 ‘나선다.’ 원상아와 독대하는 것도 인주고, 수상한 돈에 잠시라도 혹한 대가를 모두의 앞에서 시인하는 것도 인주고, 염산비 아래서 화영 언니를 구출하는 것도 인주다. 이게 바로 인간됨이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실수를 인정하며, 우정에 따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인간됨이다. 그러므로 인주는 그 누구보다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을 권리가 있다. 

인주야, 나는 네가 꼭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고 행복하면 좋겠어. 겨울에도 네가 척추를 꼿꼿이 펴고 걸으면 좋겠어. 겨울에 네가 춥지 않으면 좋겠어. 꼭 행복해. 겨울 코트 입은 사진도 많이 남겨. 한 가지 더 바라자면, 발이 편한 신발도 많이 신으면 좋겠어. 도둑 공주가 아니라 그냥 공주로 예쁘면 좋겠어. 또 한 가지만 더 바라자면, 이제는 ‘샷시’ 잘 된 아파트에서 푹 자면 좋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들 유학에 신경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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