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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Jun 30. 2022

그 낭만을 다시 입으려고 해 _ 미우미우 1편

Miu Miu 2020 FW RTW, Pre-Fall 2021 캠페인

나는 사실 교복이 정말 입고 싶었다. 교복은 온갖 스타일을 섭렵하기를 즐기던 나의 미답지였다. 교복이라는 옷이 주는 세계가 언제나 궁금했고, 특히 내가 입학할 중학교의 하복이 이른바 ‘세라복’인 걸 알게 됐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어려서부터 만화로 이미 수없이 본 세라복은 예뻐서 늘 탐이 났다. 중학생이 되기 전 한 번은 입을 기회가 있었다. 바로, 걸스카우트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제복 값이 비싸다고 여겨 엄마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포기했다. 교복을 입지 않고 중학교에 갈 수 없지만 걸스카우트는 그런 식으로 필수는 아니니까, 나는 경제적 상황에 욕심을 양보했다. 그래서 더더욱 얼른 중학생이 되어 세라복을 입고 싶었다. 마침내 바라던 중학생이 되었을 때, 지옥도 함께 시작되었다. 덩달아 세라복도 그 지옥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글은 취조실이나 법정이 아니니 구태여 지옥에 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지 않겠다. 다만, 이 이야기는 해야겠다. 낭만이 타인에 의해 파괴되는 순간을 잘 안다. 그토록 꿈꿨던 순간들이 꿈결처럼 날아가는 마음을 잘 안다. 다시는 멀쩡해질 수 없을 것처럼 짓밟힌 기분을 잘 안다. 그래서 낭만을 재회했을 때 울컥 부푸는 마음을 잘 안다. 다시 한번 낭만을 갖고 싶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무엇보다 잘 안다. 

어른들로부터 주구장창 들은 여러 말 중에 ‘그때 할 수 있는 건 그때 해야 한다’고… 꼭 틀린 말은 아니다.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떤 옷은 정말로 ‘그때’가 아니면 입기 어렵다. 아이가 입으면 천사처럼 예쁘지만 어른이 입으면 보기가 당황스러운 경우를 살면서 한 번이라도 보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옷 자체에 편견을 최대한 갖지 않고, 옷에 걸린 사회적 제약과 불합리적 관습에 분노하는 나조차도 가끔은 ‘나잇값’을 고려하게 만드는 사례를 맞닥뜨린다. 나의 경우, 작년까지만 해도 목이 늘어나고 색이 바랜 티셔츠를 무난하게 입었지만 이제는 입기 망설여진다. 맛있는 불량식품 같은 옷을 걸쳐도 빛나는 청춘은 지난 것이다. 옷은 기껏해야 옷인 주제에 사람을 좌절시킨다. 지금의 나는 아닌 어제의 나, 어른이 아닌 어린이가 입으면 환상적일 옷들만 보면 상실감을 느낀다. 언뜻 이리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넌 때를 놓쳤어, 한번 놓친 시간은 안 돌아와.” 하물며 세라복은 어떨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세라복이 아무리 예쁘더라도 난 십대의 교복을 입을 수 없다. 그때 누렸어야 마땅했지만 난 하필 그때 지옥 속에 있어서 그 시절을 누린 적이 없다. 시절은 늘 한 번뿐인데, 만약 한 옷이 한 시절을 상징한다면, 세라복은 나에게 없다. 시절의 낭만이 나에게 없다. 따라서 더더욱 미우미우의 2020 FW 컬렉션 중 13번째 착장인 세일러 칼라의 검푸른 니트 바디 수트를 발견하고 10년 간 맺힌 마음의 멍울이 스르르 풀렸던 걸지도 모른다. 그 옷을 입고 있던 모델은 벨라 하디드로 카리스마 넘치는 슈퍼 모델이었고, 내가 그 전까지 아는 세라복은 순정 만화 속 순종적인 소녀이거나 깜찍한 걸스카우트였다. 그 묘한 조합에 고개가 갸우뚱하긴 커녕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이었다. 치마의 부재가 통쾌했다. 교복 입는 시절 내내 치마 길이는 강제 고충이 되곤 했다. 길면 밉고 짧으면 혼났다. 그럴 바엔 없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래서 격랑에 맞서는 선원복이 바디 수트와 만나자 그 어느 때보다 강인했다. 세일러 바디 수트는 튼튼한 진청 니트 소재와 긴 소매로 강단을 가지고는 세라복에 대한 단선적이고 오랜 편견을 깼다. 벨라 하디드는 자신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의류 중 하나를 입은 것이고, 세라복은 새로운 모습 이상으로 또다른 정체성을 가진다. 세라복의 풋풋함은 신선함으로 승화되고 벨라 하디드는 강한 아우라 대신 순둥이 같은 싱둥함이 엿보인다. 그래서 세일러 바디 수트는 내 눈에 분명 세라복이었다, 아무나의 세라복도 아닌 벨라 하디드의 세라복. 사람마다 어울리는 세라복은 다른 것이다. 사람마다 세라복이 어울릴 때는 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우미우가 말하는 세라복이다. 사르르 녹은 마음의 틈 사이로 희망의 새싹은 그렇게 솟아올랐다. 이전과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처럼 간단한 건 아니었다. 어린 환상도 아니다. 그 새싹은 낭만을 부여받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다. 또, 낭만을 스스로 만들어도 된다는 권리다. 

따지고 보면 그때의 세라복에 대한 선망은 예쁨의 겉에 반했던 어림일 뿐이었다. 내가 끌리고 당연시 여겼던 삶을 사는 가상과 현실의 사람들은 전부 세라복을 입고 있었을 뿐이었다. 걸스카우트, 빛나는 학창 시절, 근사한 이국의 풍경까지 실패없이 활착한 이들은 세라복을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은 내 눈에 더없이 근사하였다. 나의 세라복은 그들과 달랐다. 내가 입은 세라복의 상의는 나의 육신에 비해 지나치게 벙벙하여 보기가 미웠다. 치마는 허리가 너무 컸고 길이는 허리와 어울리는 비율이 아니어서 꼴사나웠다. 나는 그토록 바라던 세라복을 입고 기뻤던 기억이 있긴 커녕 얼른 나이가 조금 더 들어 얼른 벗어 던지고 싶었다. 게다가 세라복으로 처한 모습은 흉하고, 놓인 상황은 흉악했다. 마음 털어놓을 이 하나 없는 혼자였고, 쉽게 비방을 당하고, 어떤 행동으로든 오해를 샀다. 주어지는 미래와 만들어 갈 미래 전부 불투명하다 못해 깜깜했다. 억압, 외톨이, 단조로움, 초라함, 불명확이 나의 세라복을 결정지었다. 나는 꼭 긍정적인 성질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부정적인 성질이라도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망가진 옷을 입어도 내가 망가뜨리고 싶고, 옷이 못나도 못남을 내가 정의하고 싶었다. 어떤 옷을 입어서 미움을 받아도, 내가 입고 싶은 옷이면 상관없다. 입고 싶지 않은 옷을 입어도 충분히 불행할 수 있음을 학창 시절에 겪었기에 안다. 한편, 입고 싶은 옷을 입어도 충분히 불행할 수 있음도 학창 시절에 겪은 것이다. 즉 어떤 예쁨은 나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우미우 2020 FW 컬렉션의 13번째 착장을 비롯해 14번째인 세일러 칼라가 살며시 보이는 퍼 코트, 48번째인 검은 가죽 장갑, 가죽 치마와 맞춘 우아한 9부 소매의 세라복 상의, 전반적으로는 세라복을 연상시키지만 칼라와 이어지는 V넥은 깊게 패이고 살갗이 비치는 소재를 사용하여 검은색 계열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부드럽게 낮춘 54번째 착장을 보고 느낀 감정은 ‘예쁘다’가 아니었다. 나는 무심코 학창 시절에 만난 선생님들을 떠올렸다.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가기만 해도 기를 쓰고 악을 썼던 선생님, 상의 안에 이너 웨어 하나를 꼭 입으라면서 하얀 세라복 상의 안에 비치는 브래지어를 과연 어떻게 알아채고는 다른 학생들 보는 앞에서 등짝을 때리던 선생님, 얇은 교복과 차가운 에어컨 바람 때문에 가디건을 걸쳤더니 반항이라고 지적하던 선생님은 살면서도 잘 잊히지 않았다. 나는 그러한 선생님들 아래서 살벌하게 추운 에어컨 바람에도 어떤 구실 때문인지 평범한 검은색 가디건을 입지 못하고 고약한 초록색 학교 체육복 점퍼를 입어야 했고, 치마가 무지막지하게 커서 허리를 접어 입자 소리 없이 다가와 갑자기 조끼가 들춰지는 수모를 당하거나, 교복 조끼 대신 니트 베스트를 입은 것이 그저 멋이 아니라 보온을 위한 것임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런 나에게 허리를 강조한 벨트, 바디 수트, 깊은 V넥, 가죽 치마, 퍼까지 결합된 세라복은 단 한 번도 허락받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내 세라복을 입는 데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다. 이제 남의 눈에 예쁜 것도, 조신한 것도, 얌전한 것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세라복은 시절의 소유물이 아니고, 이제 나는 용기를 내면 된다. 

세라복을, 그러니까 세일러 칼라를 런웨이 위로 올린 패션 브랜드가 미우미우가 처음이 아니다. 세일러룩은 원래 끊임없는 패션상 영감의 근원이었다. 샤넬, 장 폴 고티에, 타미힐피거, 메종 마르지엘라 등 유수의 패션 하우스에서 세일러 패션을 구현하였다. 굳이 패션 하우스가 아니더라도 일상복인 스트라이프(줄무늬), 떡볶이 코트로 알려진 더플 코트, 교복인 세라복만 봐도 세일러 패션은 선원이 아닌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정착된 지 오래다. 따라서 미우미우의 세일러복이 그 중에서 특별하거나 특출나다고 여길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다시 미우미우의 2020 FW 컬렉션 13번째 착장을 입은 벨라 하디드를 떠올리자. 벨라 하디드는 그녀만의 세라복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반짝였다. 인생에서 다시는 그처럼 반짝임을 낼 수 없는 시기가 바로 이토록 어린 청춘 아닌가. 미우미우는 그 어여쁜 시절을 시간의 산물로 박제하지 않고 생명의 존재로 물을 주었다. 미우미우의 탄생은 프라다의 수장 미우치아 프라다의 천성에 젖줄을 대고 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어렸을 적 완고한 집안 규칙인 낮잠 시간에 가상 친구 ‘미우미우’와 함께 놀았다는 일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 미우미우는 차마 숨겨질 수 없는 자아이다. 자아와 천성이 흙이라면 유행과 풍속은 바람이므로 천성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세태에 재단되지 않고 세월에 세공되지 않는 자의식과 미우미우는 물아일체인 것이다. 1993년 출범 이후 패션지와 패션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미우미우를 프라다의 동생 브랜드 정도로 귀엽게 여겼다. 미우미우가 즐겨 입는 짧은 엠파이어 드레스, 니트 양말, 아기자기한 무늬, 리본과 러플은 숙녀보다는 소녀의 옷장에 국한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본래 패션계란 새로움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고, 소비자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옷장을 채우지 않던가. 늘 갈망에 찬 이들에게 미우미우는 어느덧 신대륙이 되었다. 미우치아 프라다의 자아적 이상은 더는 이상이 아닌 충분히 현실이다. 세일러룩 외에도 가죽끈을 동여맨 발레리나 슈즈, 첼시 칼라, 크로셰, 발라클라바, 로우 라이즈 스타일은 단순한 인기를 넘어 패션계 역사와 소비자 인상에 깃발을 세운 것이다. 미우미우는 옷에는 나이와 편견이 없음을 증명하고 옷을 통한 향유의 지평을 넓혔다. 더군다나 미우미우의 소재는 어른이 되고 나서 선뜻 입지 못한 하나의 태도가 아니던가. 엄마가 말려도 보석 장난감을 잔뜩 걸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합으로 알록달록 옷을 입고 유치원에 가는 원초적 자기 표현 욕구 말이다. 남들의 시선이라는 단어는 모르고 그저 끌리는 대로 입던 그 만끽력은 죽지 않고 살아 있던 것이다. 미우미우 제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미우미우가 소생시킨 패션 아이템과 스타일 중 내가 걸치고 입었을 때 누가 덜 떨어져 보인다는 소리를 꺼낼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시대에 덜 떨어진 건 아니고? 이것들은 원래 죽지 않고 영원히 젊을 마음인데. 나는 이제 그 학창 시절의 처절한 세라복에서 벗어나 나만의 세라복을, 자유와 낭만을 쟁취하러 길을 나선다. 잠깐. 

그래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낭만을 아끼는 마음은 영원히 젊다. 다른 건 다 버려도 이 마음은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다, 동심(動心). 그 순수한 동심(童心)이 힘(力)을 드디어 얻는다. 이제 낭만과 자유는 내 책임이다. 

저 끝 모르는 하늘과 광활한 바다를 차지한 저 위풍당당한 자태를 보라. 저 여인이 입은 의복은 세라복이다. 세라복은 이런 거칠 것 없는 시공간과 제격이다. 그 세라복은 놀랍게도 정석에 충실했다. 게다가 치마도 길다. 퍼프 소매에 앙증맞은 리본, 치마에는 별도 있고 스타킹도 하얀색 크로셰다. 내 낭만은 틀렸던 것이 아니다. 내 낭만은 저토록 위엄이 있었고 온 세상을 안을 수 있고 사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다. 주변에는 저마다의 세라복을 입은 친구들이 있다. 어떤 친구는 땡땡이 치마를, 어떤 친구는 고무줄이 있는 바지를, 어떤 친구는 빨간 스타킹을 입고 모자, 선글라스로 실속과 멋을 챙기고 귀걸이는 윤슬처럼 반짝인다. 이 친구들과 얼마든지 풍파에 맞선다. 2020 FW 컬렉션에서 나는 낭만을 되찾고 그 형태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처음 알게 되었다면 미우미우 Maritime Pre-Fall 2021 캠페인에서 낭만의 의미를… 이제야 깨우친 것이다. 낭만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마음껏 하고, 나의 낭만이 통하지 않거나 꺾인다고 해서 함부로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관철한다, 나의 낭만이 세계를 발견할 때까지. 이 세계에서 나의 세라복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치마가 길든, 속이 비치든, 바지가 되든, 색깔이 다르고 소재가 어떻든 다 좋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라복은 어느 때이든 좋고, 낭만은 항상 제철이다. 철을 찾은 낭만은 비로소 심장과 함께 뛴다. 


dedicated to Miu Miu _ episode 1 (by JEONHAERI)

Copyright 2022. 전해리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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