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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5년 만인가 피아노를 다시 쳤을 때
내가 기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져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해보았더랬죠.
악보 용어 같은 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어요.
그냥 음표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는데
그럴 듯했죠. 그럴 순 없는데요. 그러면 안 되는 거고요.
5년 만에 다시 쳤으면 새로운 곡을 치는 것처럼
연주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제 느낌에는 5년 전과 진배없었어요. 그때랑 똑같이 치더라고요.
살아온 가닥이 그렇게 무서운 거에요.
나의 의식이나 노력 상관없이 몸으로 익힌 건
세월은 고사하고 시간 앞에서도 끄떡없더라고요.
저는 백지 상태가 되어 있길 내심 바랬어요.
그런데 그 종이는 너무 열심히 꾹꾹 눌러쓴 연필 탓에 아무리
지우개로 박박 지워도, 지워도 하얘지지 않아요.
이런 편지를 쓰는 나의
피아노 연주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eerouri/149
<둥글게 둥글게>
-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 마지막 편지
- 샴페인 잔에 담은 우유
- 천 냥 빛
- 하농
- My Life but B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