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데블스 애드버킷 Brand Devil's Advocate
Instagram _ Brand Devil’s Advocate
여전히 네모의 꿈
-네모의 꿈
필자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학교에서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를 틀어줬다. 과도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은근히 깔려 있는 노래라고 기억되는데, 이 노래를 최근에 다시 들어보니 감회가 좀 새롭다. 21세기를 10년 이상 넘긴 우리에게 TV, 컴퓨터에 이어서 네모의 세상이 더 추가되었다 걸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 네모의 세상은 인스타그램이다. TV와 컴퓨터로는 모자라 세상이 인스타그램의 네모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네모의 꿈은 여전하다.
-You Know Me, You Don’t Know Me
통성명 다음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주고 받는다. 때로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고 인스타그램 아이디부터 물어본다. 피드를 쭉 훑어보고 상대방을 쉽게 예상한다. 아, 너는 이런 사람이구나. 상대방을 골똘히 살펴볼 여유를 갖지 않는 게 요즘 세대의 첫만남이다. 섣부른 판단이 첫만남부터 시작된다. 나와 처음 만난 누군가는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 나를 대화를 통해 알려고 하지 않고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펴봤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가 말을 할 줄 아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세상만물이 변하듯 인간관계의 형성도 여러 방면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 인스타그램이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스타그램은 이미지적 대화를 양산했다. 굳이 글로 된 부가적인 설명을 추가하지 않고도 피드의 사진들을 둘러 보면 내가 이 사람의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맹점은 우리는 평소에도 사람들과의 가시적인 관계 속에서 언제나 단편(斷片)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데, 하물며 인스타그램 속의 우리의 모습은 더욱더 파편적이어서 결국 사람들의 편협한 시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잠시 외국에서 머물렀을 때, 룸메이트와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주고받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와 인스타그램 속 룸메이트의 모습은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룸메이트는 굉장히 내향적이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인데, 인스타그램 속 룸메이트는 과감한 포즈를 즐기고 클럽에서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친구도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의 피드만 보고 자신을 그저 외향적이라고만 판단하는 게 속상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그러한 시선은 그 친구 탓이 아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인스타그램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나 잘나 보이는 부분, 혹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데 최적화되었으니 그런 경향이 더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 친구는 누굴 탓할 필요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속상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 피드를 그렇게 꾸민 건 그 친구니까.
인스타그램은 인간관계의 회의감을 자극했다. 현실 속 인간관계도 녹록치 않은데, 일종의 가상 세계인 인스타그램은 거기에 의구심까지 얹어줬다. 인스타그램은 말한다.
“셀러브리티나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의 소통이 우리 덕분에 가능하지 않나요?”
맞다. 내가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해 볼 기회가 애초에 있기나 했을까? 인스타그램으로 현실이라면 전혀 만나지 않을 법한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이제 그 사람은 나의 인간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과연 인스타그램 덕분이라고 말할 만하다. 사람을 사귀었으니 그와의 소중한 인연을 유지해야 하는데 인스타그램만으로는 그를 알아가는 데 한계가 있다. 인스타그램으로 본 모습으로만 나를 판단한 어떤 사람은 실제로 나를 만났을 때 자신이 그린 초상화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에게 꽤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즉 인스타그램에서 기발한 인연의 시작은 충분히 가능하나 관계 유지에 있어서는 인스타그램에서 벗어난 별도의 노력이 필수라는 이야기다.
셀 수 없이 많은 인스타그램 사용자들과 인플루언서들에게 묻고 싶다.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당신의 실제 삶은 건강하냐고. 성취감 뒤에 당신의 건강을 애써 감추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브랜드가 일궈낸 비즈니스적 성과와 화려한 인생 전환과는 별개로 인스타그램이 건강한 행복을 전달하고 있는 브랜드가 맞는지는 어떤 확신도 들지 않는다. 혹은 그 이름(instant)처럼 즉각적인 행복만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저 올리고 싶은 사진을 올렸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 사람이 나의 메시지엔 여태껏 답장을 하지 않아 뭘 하나 궁금했는데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다는 걸 안 순간 묘한 서운함이 피어오른다. 속상하고 우울한 감정을 피드나 스토리에 올려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행태는 과연 어떤 심리에서 비롯된 건지 모르겠다. DM 속 잠깐의 대화에 내가 만족감을 느끼는 게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든다. 애써 무심한 척하지만 팔로워 수가 신경 쓰인다. 여행 사진 뒤에 감춰진 여행 피로를 내 친구는 예상할 수도 없는데 나는 괜히 ‘좋아 보인다’고 댓글을 단 친구가 밉다. 내가 먹은 음식을 나의 친구들과 가족에게 직접 자랑하지 않고 피드에 해쉬태그(#)와 함께 올리는 게 진짜 공유인 걸까. 실제로는 말 몇 마디도 나누지도 않았으면서 피드에 즐거워 보이는 사진 하나 올리고 진짜 우정이라고 이름 붙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말 다했다. 사람들이 갈수록 대화에 약해지고 겁을 먹는 이유에 인스타그램이 주된 역할을 했을 거라고 감히 예상해본다. ‘팝콘 브레인’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극적이며 실시간적인 현상에만 반응할 뿐 느리고 둔한 현실에는 무감각해지는 증상을 일컫는데,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이런 증상을 겪고 있는 건 아닐는지. 위로에 관한 짧은 문구가 담긴 피드에 현실에 딱딱한 마음을 녹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대화 속 실제 사람으로부터 언제 위로 받았는지 기억하라고 하면 은근히 자신이 없어진다. 길고 깊은 대화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몇 초 뒤면 또 다른 사진이 올라오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인간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사유를 바라는 건 지나친 무리이고 욕심인 것 같다.
나는 널 안다고 생각했지만 인스타그램에서 몰랐던 모습을 보면 널 몰랐던 거고, 널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인스타그램에서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걸 찾으면 난 널 아는 걸까. 이래나 저래나 나는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기술의 발전이 도와줄 것 같았지만 어째 기술도 관계에는 서툰 듯싶다. 오늘은 스토리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그 친구가 뭘 하면서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하다.
-기회의 기회의 기회
인스타그램은 확실히 물건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수장이던 시절 아이폰이 세상을 여는 혁명을 일으켰다면, 에어비앤비-우버-인스타그램은 이제 세상을 연결하는 혁신을 이루고 있다. 기회의 땅이 사라졌지만 이젠 시공간의 한계에 상관없이 창작자, 즉 인스타그래머의 역량 혹은 유명세에 따라 기회가 얼마든지 생겨나고 있다. 덕분에 인간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인스타그램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물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창작자들에게 플랫폼으로 자신을 기꺼이 내놨다. 과거에는 예술의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 자신이 지닌 예술적 역량을 펼칠 플랫폼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 개인도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예술을 올릴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모델이 되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써, 춤요리음악 등 창작의 주제도 다양하다. 인스타그램은 이른바 창작 욕구 해소의 공간이다. 다채로운 예술을 보고 있자면 눈이 즐겁고 일상생활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자니 ‘아, 이런 식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구나’, ‘나도 이건 한번 만들어서 먹어 봐야겠다’ 이런 감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여러 창작자들이 자신의 아카이브를 계속해서 업로드하니 구태여 홈페이지를 일일이 찾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편리한지. 내 주변에선 예술가나 창작자보다는 학생, 취준생, 회사원이 그득한데 인스타그램만 보면 창작자 천지다.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콘텐츠를 올리게 된 건 인스타그램이 적당한 플랫폼인가의 논쟁을 떠나서 ‘좋아요’라는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아요’를 받는다 해서 훌륭한 콘텐츠이며 ‘좋아요’를 받지 않으면 훌륭하지 않은 콘텐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좋아요’는 주목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주목은 예술가의 기량이나 열정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현실에도 대중의 이목을 즐겼던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가 있는 반면, 은둔하는 뱅크시 Banksy 와 같은 예술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인스타그램이라 해서 현실의 공간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둘의 예술에 우위를 점칠 수 없는 건 이들의 작품에서 미술사적 거보(巨步)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관심이 성취를 결정하지 않고 예술성을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예전에 내가 팔로우 했던 한 플로리스트는 항상 독창적인 콘텐츠를 올렸고 국내 한 디자이너 브랜드의 쇼장을 꾸밀 정도로 걸출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특별히 많지 않았다. 훌륭한 연주를 해낸 오케스트라 악단에게도 박수를 보낼 수 있고, 길거리 가수에게도 박수를 보낼 수 있다. 어쩌면, ‘좋아요’라는 건 관점의 차이이고 성공의 기회에 운이 크게 작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인스타그램에서도 절대적으로 통하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고흐는 살아 생전에 주목을 받지 못한 화가였다. 고흐가 인스타그램이 플랫폼인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과연 어떤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까? 인스타그램에 그의 그림을 올렸다면 고흐는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을까? 아니, 인스타그램을 하기는 했을까? 혹은 그 비범한 예술가도 ‘인스타그램’스러운 작품의 물결에 물들었을까? 싱거운 상상을 하다가 만다. 어느 화상에서 팔렸고 어떤 사람들에게 주목 받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고흐라는 사람 그 자체와 작품만으로 고흐의 죽음 뒤로 이어져 오는 인류에게 매일 감동을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예술을 온전하게 만드는 데 있어 기회는, 전부가 아니다. 감히 전부가 될 수도 없다.
-네모의 세상
인스타그램의 성공과 덕분에 수혜를 겪은 사람들로 인해 모든 것들이 인스타그램’화(化)’ 되고 있다. 세상이 이전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네모에 갇히고 있다. 인스타그램’적’ 취향과 감성, 일상이 현실 세계를 조금씩 잠식하고 있다.
얼마 전 매장 인테리어를 새로 바꾼 카페를 지나가다가 몹시 놀란 적이 있다. 일명 ‘인생샷’을 미끼로 손님들을 낚아채는 네온사인 문구 한 줄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이런 인테리어의 카페가 단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커피나 기타 음료의 질이 아닌 겉모습에 치중한 것 같다. 같은 맥락으로,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핑크 뮬리’는 지방 특징과 전혀 관계없이 반짝 경제효과를 누리려는 지자체의 단기적 안목에서 비롯되었다. ‘핑크 뮬리’라는 외래종의 특성상 기존 생태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도입 시 신중해야 하는데, 인스타그램이 의도치 않게 생태계의 이치를 방해할 수 있는 영향을 끼친 셈이다. 전시회의 품위도 달라지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적당한 예술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홍보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관람 대신 카메라를 먼저 든다. 같이 구경하는 이들의 눈치를 적당히 봐 가며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시회도 관람객의 눈높이에 예술을 맞춘다는 명목 하에 예술계를 깊이 탐구하지 않고 인스타그램 홍보에 괜찮게끔 큐레이팅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일부의 모습이며 모든 관람객과 전시회가 이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혹시 ‘큰 힘’이 될까 우려된다.
인스타그램에서 비롯된 가장 걱정스러운 폐해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으로 보는 것만으로 대리 만족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도 실제 생활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하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으로 옷을 보고 살지 말지 망설인다는 것이다. 옷을 실제로 입어보고 살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 판가름한다. 실제로 보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친구의 여행 사진을 보고 그저 부럽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여행사진이 저 풍경을 내 눈으로 보기 위해서 내가 살고 있는 방식과 일상에 동기가 되어야 할 터인데 좌절을 하거나 ‘봤으니 됐어’ 식으로 끝낸다는 건 꽤 난처한 일임이 분명하다.
인스타그램은 세상의 일부다. 세상을 네모 모양으로 오린 것과 똑같다. 네모 그 이상의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피드를 보고 아크네 스튜디오의 옷과 매장의 분위기가 어떨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과 아크네 스튜디오 매장에 직접 가서 옷을 만져보고 걸쳐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스트릿 포토그래퍼의 피드를 일일이 확인하면 셀럽이나 패션 피플의 스타일을 볼 수 있지만, 내가 노력해서 직접 그 스트릿을 밟는다면 현장 분위기를 겪고 그들과 인연을 맺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은 사진을 보고 실제로 어떨까 상상하거나 만족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안으로 현실을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인스타그램 특수를 누리되 인스타그램이 나의 일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먹게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
-인스타그램하네
가수 딘 Dean 의 노래 ‘인스타그램’은 우리가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면서 느낀 회의감과 허무함을 감미롭고도 쓸쓸하게 표현해 사람들에게서 큰 공감을 일으켰다. 그는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접속하는 자신을 관찰하고 이 곡을 만들었다. 인스타그램 속 멋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행동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올리고 싶은 사진만 올라가 있는 가짜 세상 속에서 허우적대지만 진짜 나를 알아줬던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그 심경을 곡에 담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양날의 검이건만, 이 회의적 정서를 담은 노래로 하여금 큰 반향을 일으킨 인스타그램은 과연 양날의 검이 맞긴 한 걸까.
왜 세상의 시간은 성실히 가는데 우리는 여전히 네모의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을 그치지 않는지, 인스타그램은 과연 누구의 의지인가.
어쨌든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인스타그램하네, 왜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2018년 11월 씀
위 글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해당 브랜드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