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시버튼이 안 될 게 뭐 있어

브랜드 크로키 Brand Croquis

by 전해리

푸시버튼 PushBUTTON _ 브랜드 크로키 Brand Croquis


푸시버튼이 안 될 게 뭐 있어 (Why NOT Push BUTTON)


21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나는 시점, 사회에 진출해야 할 나이라고 압박 받는 나이에 속하는 나는 배우 공효진의 드라마를 시청하며 자랐다. 나는 배우 공효진의 ‘한 끗’이 언제나 짜릿했다. 독특하다고 여겨질 만한 것들을 보편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재주였다. 겨드랑이 털을 왜 깎아야 하냐고 당당하게 반문하는 여자부터 두 남자 모두 사랑하면 안 되느냐고 천진스레 이의를 제기하는 여자, 세상의 오해와 텃세에 주눅드는 것과 별개로 그릇된 건 똑 부러지게 바로잡는 여자를 연기할 때도, 혼자서도 조용히 할 수 있는 걸 책을 내가며 환경 보호에 대한 실천을 가만가만 전달할 때도, 기대를 뛰어넘는 스타일링으로 카메라의 플래쉬와 대중의 박수를 받을 때도 공효진 배우는 늘 전형성에 한 끗을 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배우 공효진의 행동 하나하나는 보통의 정의를 재정립하기보다는 확대하는 쪽에 가까웠다, 기존의 정의도 소외 당하지 않도록, 게다가 새로운 정의도 포용하고. 그리고 그 반짝반짝한 한 끗의 중심엔 푸시버튼이 있었다. 푸시버튼과 함께할 때 배우 공효진은 보편적인 동시에 특별하고,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임을 유독 잘 표현했다. 배우 개인적으로는, 형광색은 절대 아닌 샛노란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선 모습이 가장 인상깊었다. 자유분방한 단발, 드레스의 색감과 가벼워 보이는 질감,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여유 넘치면서 기품 있는 자태를 취하는 배우로부터 난 내가 원하는 인간상을 넘겨보았더랬다. 배우 공효진과 푸시버튼이 드라마 상에 있을 땐, 푸시세컨드버튼의 차분한 색감의 랩원피스, 스트라이프 세일러 블라우스와 꼬마 유령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에코백을 착용한 여자 주인공을 보며 나는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의 노래’에서 착안해서 ‘귀신 본다고 해서 멋을 모르겠는가’라고 읊조렸고, 그냥 초록색 호피무늬인 줄 알았는데 들여다보니 강아지 문양이 가득한 셔츠를 통해 신경질적인 게 아니라 그저 남모를 아픔에도 버젓이 예민한 여자라는 걸 알아차렸고,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건 안 좋아하건 관계없이 관심과 보살핌’은’ 베푸는 이유가 남자가 엄마와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임을 여자가 입은 상당히 예스러운 실루엣의 투피스로 간파할 수 있었다. 인물의 사연과 속내를 옷으로 표현해내는 배우 공효진은 충분히 대단했지만, 나는 더 대단한 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직업인 혹은 사회인으로서 입을 수 있는 옷과 드러낼 수 있는 스타일의 외연을 넓혔다. 왜 일정한 직업이 없는 여자의 옷차림이 사랑스러운 원피스 차림이 되어서는 안 되지? 정신과 의사가 사치스럽진 않지만 화려한 옷 좀 입으면 안 되나? 기상캐스터가, 앵커가 꼭 얌전하고 반듯하게 입어야 하는 법이 있나? 나는 내가 일상 속 패션에 있어서 상식 이상을 허용하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푸시버튼의 옷을 입은 여자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 공효진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누가 현실에서 저렇게 입어?’라고 감탄하면서도 탄식하는 날 보고 흠칫 놀란 적이 있다. 그런 나의 탄사에 푸시버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Why not?!”

이렇게 입어서 안 될 건 뭐 있냐고 말이다. 푸시버튼이 현실이 되지 않을 이유는 사실, 그러고보면, 없다. 아니면, 모두가 푸시버튼만큼 배짱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푸시버튼은 그 이름부터 능동적이다. 푸시(Push), 그리고 버튼(Button)은 얼마든지 단순하자면 ‘버튼을 누르다’ 정도로 직해할 수 있긴 하지만, 이왕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버튼을 누른다는 건 무언가를 작동시킨다는 의미다. 즉, 가만히 있거나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에 나의 의지를 반영해 아예 새롭게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려면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가 내가 있는 층으로 오게 해야 한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버튼을 눌러야 자동문이 열린다. 달리는 버스에서 내가 원하는 정류장에 내리려면 부정적 뉘앙스의 ‘STOP’이 적힌 버튼을 눌러야 한다. 버튼을 누른다는 건 적극적인 행동이다. 적극성은 푸시버튼의 핵심이다. 하다못해 푸시버튼의 골자 디자인 중 하나인 노랑 머리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울상 짓고 있는 얼굴 삽화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라는 노랫말의 주인공인 ‘캔디’를 연상시키는데, 만화영화 ‘캔디’의 원작을 읽은 사람으로서 ‘캔디’를 대변하자면 ‘캔디’는 굉장히 잘 운다. 대신 쓸데없이 운 적은 없었다. ‘캔디’는 울어야 할 때 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포니 선생님과 레인 선생님이 계시는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안소니와 스테아가 죽었을 때, 테리를 떠나보냈을 때, 그리고 윌리엄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캔디’는 눈물을 청초하게 한 방울 흘렸다기보다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눈물로써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캔디’였다. 개인적으로 ‘약해 빠져가지고’, ‘네가 울어서 상황이 바뀐다면 실컷 울어’라고 면박당한 경험이 아직까지도 해소가 안된 상황과 더불어 사람 지치게 하는 데 이골이 ‘안’ 난 듯한 세상에 살다보니 눈물이 사치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 내가 푸시버튼 런웨이에서 걸어나오는 모델이 입은 니트 속 ‘캔디’의 표정을 보고, 또 그 표정이 담은 맨투맨을 가볍게 어깨에 걸친 ‘표나리’를 연기하는 배우 공효진을 보고 나도 울어야 할 때 울고 싶어졌다. 이유는, 반가워서, 전형성에 도전한다는 것이 반가워서다.

푸시버튼에게는 안 될 게 없다. 남자가 하이힐을 신는 건 예사고, 젠더리스 패션을 추구해 여자와 남자 옷 사이에 구분이 없다. 푸시버튼에서 젠더리스는 단순히 여자가 남자 옷 같은 옷을 입고 남자가 여자 옷 같은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명하기가 능력 밖이라 차라리 예를 하나 들자면, 앞면엔 슬립 드레스가 달린 스웨트 셔츠는 언뜻 보면 여자가 입는 드레스처럼 보이지만 본판은 스웨트 셔츠이므로 남자가 입어도 무방하다. 그 옷을 컬렉션 당시 모델 장윤주가 입은 모습을 보고 편안하면서도 우아하다고 생각했는데 푸시버튼의 디자이너 박승건의 인스타그램에서 그 옷을 입은 남자 모델 사진을 보고, 유약하면서도 곱상한 분위기에 젠더리스 패션이 어떤 건지 배웠다. 푸시버튼이 스타일링으로만 승부를 보지 않는다는 점도 몹시 존경한다. 그저 아이템을 겹치고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템 하나하나에 가치를 부여한다. 반바지와 긴바지를 함께 입고 싶으면 이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푸시버튼에 한쪽은 짧고 한쪽은 긴 바지가 있다. 패딩이 리버서블한 건 박수 보내드리고 싶을 정도로 기발했고, 오렌지 색상의 나일론 천과 고상한 회색 체크무늬 천을 안팎으로 바꿔서 입을 수 있는 치마는 보자마자 이렇게 유용할 수 있나 감탄했다. 갈비뼈 라인이 훤히 드러난 자켓은 안에 입은 옷도 함께 돋보일 수 있어 탁월했다. 푸시버튼이 런웨이에 세우는 모델들의 다양성도 정말 사랑한다. 해외 패션위크에서도 유색인 모델이 몇 명이나 하이패션 브랜드의 런웨이에 올랐는지 아직도 화제가 되는데, 푸시버튼은 몇 해 전부터 서울 컬렉션에서 한국인 모델과 외국인 모델을 같이 세웠다. 덕분에 옷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입는 건 푸시버튼이다. 모델 개개인의 개성 또한 푸시버튼과 완벽하게 돋보였다. 흰 나뭇가지 같은 여자 모델에게 버즈컷, 각진 턱을 지닌 여자 모델에겐 각진 단발을 선사하는 푸시버튼의 센스는 결정타였다. 지금까지, 푸시버튼에서 고정관념은 없었다. 핵심은, ‘상자 밖’으로 벗어나면 인간은 생각을 못 한다는 이론과 별개로, ‘상자 밖’으로 벗어나니 오히려 상상력이 샘솟는다는 거다. 왜냐하면, 나는 푸시버튼의 옷을 당장 사 입지는 못해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푸시버튼을 본받아 내가 가진 옷들의 스타일링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럼 이러한 푸시버튼은 하이패션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비록 하이패션의 대표격인 샤넬, 루이비통, 구찌와 다른 결일지라도 푸시버튼은 충분히 하이패션이다. 여성복에 최초로 트위드를 소재로 쓰고 바지를 적용한 샤넬과 매 시즌 원단의 80%를 개발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조 모피를 사용한 푸시버튼.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와 협업을 진행한 루이비통과 눈물을 글썽이는 ‘캔디’에서 환히 웃는 ‘캔디’와 힙한 고글을 쓴 ‘캔디’로 진화시킨 푸시버튼. 과거를 현재로 가져온 다음 아찔한 맥시멀리즘으로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을 현혹시켰던 구찌와 키치함과 복고풍 무드를 섞어 디테일에 하이패션 요소를 더하는 푸시버튼. 혹은, 어쩌면 그 어떤 하이패션 브랜드보다도 하이패션에 관한 이해력과 소화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편들고 싶다. 일단 푸시버튼은 샤넬, 루이비통, 구찌, 셀린, 펜디, 생로랑처럼 단박에 떠올릴 만한 로고가 없다. 그러니까 로고플레이가 없다. 물론 이 브랜드들의 로고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디자인이고 제품에 있어서 엄연한 디자인적 요소다. 그러나 요즘은 뭐랄까, 패션의 속성 중 하나인 과시적 성향이 너무 반영된 느낌이랄까. 로고가 뒤범벅인 모노그램이나 키워낼 수 있는 만큼 키워낸 로고의 크기를 보면 마치 이름을 쩌렁쩌렁 소리지르는 것처럼 느껴져 눈이 따갑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 위베르 드 지방시, 이브 생 로랑 살아 생전의 혁신적 실루엣과 디자인, 편의성과 아름다움 사이의 진보는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몇몇 하이패션 브랜드의 ‘스트리트’, ‘인플루언서’, ‘힙’한 감성에 치우친 컬렉션이나 손바닥 크기가 될까 말까 한 크기의 가방이나 특별할 것 없는 소재에 브랜드의 로고를 박은 티셔츠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씌워도 받아들여 하는 건 이제 당연한 걸까.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 정신과 마틴 마르지엘라의 해체주의 아방가르드는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진걸까. 씁쓸한 질문과 의문이 난립하는 와중에 나는 푸시버튼으로부터 하이패션의 모범을 찾는다. 하이패션은 애초부터 돈이 아니다. 혁신을 꿰뚫는 마음가짐이다. 나는 하이패션의 ‘하이(high)’가 분수대 꼭대기라고 여기지 않는다. 수직적으로 보지 않고 수평적으로 보면 가장 위가 아니라 가장 앞에 있으니 최전선(front line)이라고 여긴다. 즉, 하이패션이란 인간의 관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인 옷에 있어 선구성을 제안하는 리더인 격이다. 푸시버튼은 하이패션이다. 빈티지스러운 면모는 하이패션이고 키치한 면모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에 공감할 수 없다. 푸시버튼은 로고 없이도 시그니처 디자인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바로, ‘캣츠아이’보다 더 나아간 ‘레오’ 선글라스와 번개 모양이 가미된 구두, 거기에 더해 ‘캔디’까지. 패턴 분야에서는 바나나 잎, 강아지 문양 등으로 이미 고유성이 있으며, 널리 알려진 대로 페이크 퍼 시장에서 선두주자다. 이러한 진취적인 행동력에는 평소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들은 바 있다. 예술품같은 헤드피스는 감상과 해석의 재미를 배가한다. 몸통 부분은 체크, 소매는 줄무늬인 믹스앤매치와 앞과 뒤가 다른 야누스 디자인은 흥미롭다. 실루엣에 관해선, 베스트처럼 보이는 몸에 딱 붙는 니트톱과 잘 어울리는 미디 스커트의 풍선같이 둥그런 외형이 사랑스러웠고, 가장 최근 2020 SS 컬렉션의 봉긋 솟은 허리 퍼프가 신선했다. 꼭 하이패션의 전유물인 비싼 값으로만 푸시버튼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프런트로우와 협업한 제품으로 푸시버튼의 매력이 담긴 패턴이 섞인 자켓, 셔츠와 스웨트 셔츠의 결합을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접할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푸시세컨드버튼으로 티셔츠, 원피스에 대중성을 가미해 푸시버튼의 감각을 편하게 풀어냈다. 이게 전부냐고?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중 ‘닥터 스트레인지’가 막강한 ‘어벤져’ 군단을 이끌고 타노스와의 전투로 돌아와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이게 전부인가? 조수인 ‘웡’이 대답한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가?

그럼 이러한 푸시버튼을 현실 속에서도 입고 다닐 수 있나.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이란 신조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21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나는 시점, 나는 아쉽게도 답을 과거에서 찾겠다. 바야흐로 방송인 김나영이 ‘패션 피플’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을 품고 해외 패션위크의 ‘스트리트’로 푸시버튼과 함께 떠났을 때다. 그때는 ‘인스타그래머블’한 패션이 없었다. 그때는 알렉사 청이 옷을 가장 잘 입는 사람으로 칭송받았을 때였다. 컬렉션이 다가오면 안나 델루 루소가 이번에도 머리에 뭘 달까 궁금했고, 테일러 토마시 힐의 빨간 머리가 동반된 센스가 부러웠으며, 수지 버블과 타비 게빈슨 패션의 닮은 꼴과 다른 꼴을 찾는 재미가 있었고, 운동화에 흰 양말을 신는 클로에 세비니가 정말로 옷을 잘 입는다고 말할 수 있나 농반진반의 논쟁에 웃었고, 남작가와 스콧 슈만이 찍을 ‘패션 피플’의 사진을 열렬히 기다렸다. 아기네스 딘이나 한느 가비 오딜르를 보고 마른 몸매에 자부심을 가졌고, 미로슬라바 듀마를 보며 컬러에 용기를 내야겠다고 다짐했고, 러시아 귀족이 입을 법한 드레스를 입는 율리아나 세르젠코를 동경하며 패션에는 늘 현재뿐이라고 느꼈다. 그 다채롭고 풍성한 패션의 장에서 누구는 민낯이기도 했고, 누구는 변발 같은 머리를 하고, 누구는 다리 하나 없는 안경을 꼈다. 누구의 옷에도 브랜드의 태깅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아름다움과 이해를 구하지 않는 상식 밖의 패션, 그리고 보란 듯이 꾸미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방송인 김나영이 자유의 여신상처럼 푸시버튼의 헤드피스를 쓰고, 푸시버튼의 가방인지 드레스인지 모를 옷을 메거나 입고, 푸시버튼의 호피무늬 원피스에 도트 무늬 클러치를 매치해 그 속을 마음껏 누비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건너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이미 그곳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김나영과 푸시버튼은 그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몹시도 잘 융화되었다. 민낯부터 변장, 흰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부터 청키힐과 드레스가 전부 패션으로 허용되던 길거리에서 푸시버튼의 옷이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쾌재를 불러 일으켜 잊힐래야 잊힐 수 없다. 푸시버튼이 더없이 현실이어서 지켜보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그때 마음 속에 영영 변치 않을 깨달음이 내렸다. 패션은 나를 표현하는 데 있다.

21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나는 시점, 지금, 나답게 입겠다는 포부가 이상한가 아니, 이상해야 하는가. ‘말라서 불쌍하다’, ‘살 좀 찌워라’ 같은 말들을 왜 아직까지도 들어야 하나. 검정 슬랙스 한 번 안 입고 청바지만 입고 회사 다녔다고 ‘홍대 스타일’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화장하면 안 되는 피부여서 왜 안타깝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면박 듣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참견과 오해가 지겹고 지치고 힘들어 그냥 쉽게 갈까 기죽을 때가 잦았다. 적어도 ‘옷을 왜 그렇게 입냐’, ‘얼굴에 뭐 좀 찍어 발라라’라는 말은 안 듣겠지 싶었다. 옷에 관심 끄면 돈도 많이 굳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따끔한 질문 하나, 현실을 만들어내는 건 누구인가. 아무리 훌륭한 옷이라도 그 옷을 입는 사람이 부재하면 그 옷은 영혼과 생명을 잃는다. 푸시버튼을 창조하고 성장시키는 디자이너 박승건은 언제나 주체성을 강조했다. 2012 SS 컬렉션을 그는 ‘배경을 위해 일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이기 위해 옷을 고르지 않는, 오롯이 자신 스스로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일하고 꾸미는 21세기 여자를 이미지화 했다’고 설명하며 ‘모든 여자의 삶의 주체가 자신 스스로에 있길,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덧붙였다. 개성을 숨기지 말자는 건 TPO와 실용성을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옷에 있어 TPO는 당연하며 실용성을 중시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장례식장 가는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색색의 옷을 입고 가면 안 된다. 한 번 입고 버릴 만한 옷엔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 건 당연하다. 예의 바른 검은색 옷엔 꼭 움직이면 종아리까지 훤히 보이는 애매한 핏의 검정 슬랙스와 체형과 맞지 않는 검정 자켓만 있는 건 아니고, 시간과 돈, 노력을 ‘한 끗’만 투자해도 몇 년은 더 거뜬히 입을 좋은 질과 디자인의 옷을 살 수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산 옷을 똑똑이 입을 수 있는 것도 옷을 입는 당사자의 능력이다. 다른 분야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타일링에 있어서는 실력을 만드는 건 용기와 의연한 태도다. 그리고 어렸을 때 차이나 칼라 청자켓의 가장 윗단추만 잠궈 어깨에 걸쳐 입고, 도트무늬 상의와 타탄체크 아우터를 레이어드해서 입었던 사람으로서 용기 내어 딱 한 마디만 거들자면, 패션에 있어 ‘한 끗’을 더한다는 건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재미이며 남과 구별되는 개성이다. 립스틱만 바르고 머리를 헝클어트린 다음, 10년이 된 시계를 차고, 세탁 잘못해서 크롭 길이로 줄어버린 에메랄드빛 가디건을 엄마한테서 뺏어 입고, 스키니진 안에 장미꽃 무늬 스타킹을 겹쳐 입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작고 크게 실현해낸다. 당장 푸시버튼을 못 사 입으면 좀 어떤가. 덕분에 나는 돈보다는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하이(high)’에 올라선다. 사 입기 전에 자세부터 갖추련다. 가만히 서 있어야 할 때 팔짱을 끼는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대범한 태도를 자아낼 수 있도록 주머니가 있는 샛노란 드레스를 만들었다던 디자이너의 마음부터 우선 익히자 싶어 가만히 설 때 골반에 손을 얹고 가슴을 당당히 편다. 드레이프가 달린 푸시버튼의 백팩에 반해 학창시절 이후로 거들떠도 안 본 백팩을 구매했다, 비록 가방 끈에 드레이프는 없을지라도. 코트와 뷔스티에가 일체형인 코트를 보고 내가 가진 코트의 허리에 뭘 둘러볼까 흥겹게 고민한다. 게다가 활용력이 느는 건 덤이다. 회사에 다녀야 할 때, 마음에 드는 슬랙스를 못 찾아 슬랙스와 비슷한 형체의 샐비지 데님을 입었고, 셔츠의 단추를 다 잠그지 않고 윗단추 두 개를 푼 다음 그 사이에 옷핀을 꽂아 1.5번째 단추를 만들어 얌전한 듯 보이지만 마냥 참해 보이지는 않게 했다. 내가 원하는 옷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입되 TPO에 대한 배려를 늦추지 않는 것, 패션을 만끽하는 방식이자 푸시버튼의 배짱이다. 이게 바로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가끔 돌아오는 오지랖과 곡해가 다소 짜증나고 겁나기도 했지만 수그러들지언정 난 중단한 적은 없다. 내가 먼저 이렇게 개성을 살려 입으면 나를 본 누군가도 개성에 대해 고민하고 표현하겠지. 이를 믿고 사실 이미 안다. 이렇게 21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나고 얼마 안 가, 조금은 자유로워져 있겠지. 억압된 기존의 프리다 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푸시버튼이 그 프리다 칼로를 21세기로 데려와 ‘여전히 강인하지만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남편과 여자친구 즉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그녀답게 자신의 욕망 앞에 언제나 솔직하고 당당’하게 재탄생시켰듯이 말이다. 현실에서 푸시버튼처럼 입는 사람, 나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버튼을 누르라. 안 될 게 뭐 있나. Why NOT Push BUTTON?!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변화의 주체가 되라.



2019년 12월 22일 씀


위 글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해당 브랜드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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