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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Dec 31. 2020

회사생활의 기쁨과 슬픔

드라마 '미생'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변화

유행하는 콘텐츠가 때론 보기가 힘겨울 때가 있다. 당시 난 회사생활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신출내기 회사원이었고, 그때 티브이에선 ‘미생’이 한창 화제가 되고 있었다. 처음 몇 화를 볼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없어 보였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마음속 불편한 기색이 점차 부풀어올랐다. 퇴근했음에도 계속 회사가 생각나는 기분, 드라마를 볼 때마다 그런 참담한 기분이었다. 온 가족이 다 같이 드라마 ‘미생’을 볼 시간이 되면, 별로 재미없다며 시큰둥한 듯 티브이를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흔하디 흔한 연애나 사랑 얘기 없이 사람들의 성원을 이끌어 낸,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찬사 속에 드라마는 종영됐지만 난 그 최신 유행에 한 발 비껴간 채 애써 외면했다. ‘난 그저 그렇던데.’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요 근래 어느 날, 퇴근해서 문득 아내가 보는 드라마를 힐끔 거리며 보게 됐다. 영상 속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주인공 장그래와 안영이 사원, 오상식 과장. 아내는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미생’을 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이 드라마를 처음 접했던 당시 내가 다녔던 회사에 대한 기억도 일순 떠올랐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불편한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비로소 나는 ‘미생’을 드디어 온전히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 날부터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미생’을 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 회만 더’의 자세로 보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가 되기 일쑤였고, 출근을 위해 억지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렇게 사흘간 드라마 미생을 독파했다. 당시로선 느낄 길 없었던 드라마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마치 잔향과도 같은 묘한 여운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같은 직장인으로서의 공감대,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을 비롯해서 회사생활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서 그들이 택한 길들을 통해 아주 조금이나마 나의 내일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넷플릭스에선 ‘스타트업’이 최신 콘텐츠에 등록되어 있지만, 이 '미생'이야말로 무려 6년 전 콘텐츠임에도 요즘의 회사생활을 담은 드라마들에 비해 전혀 올드하거나 낡지 않았다. 지난 세월에 때가 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최신 드라마와 비견해도 가장 현실적이고도 담백하게 회사 생활을 담아낸 드라마라고.


앞서 말했듯, 처음 이 드라마를 티브이에서 접했던 당시 난 회사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회사 생활이 즐겁거나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한편, 그 마음까지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불평, 불만의 말들이 고스란히 내 귀로 들어오는 그 참담함을 몇 번 느끼곤 터져 나오는 불평마저도 목구멍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드라마 미생 속 ‘오상식 과장’을 보고선 울화가 치민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회사건 저런 상사는 없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존재할 수가 없다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난 회사 생활에서의 롤모델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상사, 함께 일하고 싶은 든든한 동료들 같은. 그러나 내가 마주한 현실에선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그 좌절감을 애꿎은 ‘미생’에 돌렸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사 오상식 과장의 모습이, 그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으는 장백기와 한석율과 같은 동료들이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보였다. ‘저래서 드라마’가 아니겠느냐며 시시하다는 핑계로 시청자 대열에서 이탈했다. 마음이 부대껴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비아냥 속에 질투를 감추려 했다.


그러나 세월 조금 지나고 다시 조우한 ‘미생’은 그때와 전혀 다른 감정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드라마가 아닌,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게 된 건, 그로부터 내가 겪어온 지난날의 회사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도, 혹은 시야가 조금은 넓어졌다고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롤모델을 여전히 찾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내가 변한 건지, 세월의 흐름에 내가 조금은 단단해진 건지, 혹은 둔감해진 건지, 아니면 그때 그 당시의 내가 예민했던 건지, 같은 드라마를 대하는 내 태도의 변화를 설명하기가 마뜩치는 않다. 다만 분명한 건, 그 당시의 ‘나’와 비교해서 지금의 ‘나’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 그러므로 인해 이 드라마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직장생활은 늘 어렵다. 정답이 없는 길, 누군가 가르쳐 줄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들 모두 한데 모여 있음에도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이자 각자의 머리수만큼이나 수만 가지 갈래의 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곳. 잠시 머무르기도, 혹은 꽤나 눌러앉을 수도 있는, 남보다 친밀하다가도 동시에 서로에게 남보다 못한 사람들. 다만, 미생을 통해 난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가능성. 성대리 같은 상사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타산지석의 마음, 또는 오상식 과장 같은 회사원이 되고 싶다는 바람. 각자 월급을 위해 잠시 잠깐 모여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다 같이 즐겁고 재미나게 일하고 싶은 열망 같은 것들 말이다. 근래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정주행 한 ‘미생’에서 발견한 건, 그런 '배울 점'들이었다.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조우하지 않았더라면 내게 미생은 여전히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골목 어귀에서 소식 끊긴 옛 친구와 재회한 듯, 넷플릭스라는 공간에서 ‘미생’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그간의 오해와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재미와 감동, 그리고 진한 여운까지 남는 이런 드라마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발견한다 해도 시의적절하지 않으면 과거의 나처럼 외면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명작들은 오래 두고 봐야 한다. 손 뻗으면 닿을 어딘가에 늘 있다가, 문득 생각나면 금방이라도 집어 들 수 있을 만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명작의 진정한 가치를 결국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넷플릭스는 내게 그 옛날 집 앞에 있던 비디오 대여점과 같다. 하릴없이 들렀다가도 비디오 케이스 겉면의 줄거리 찬찬히 훑어보며 고심해서 볼 것을 고르는 곳처럼. 옛날에 봤던 드라마, 영화일지라도 다시금 보게 만드는 곳, 그 옛날 나의 모습까지도 함께 불러오는 힘은 영상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아닐까. ‘미생’을 통해 치기 어린 내 옛적 모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 듯이, 각자 어린 시절 봤던 영화나 드라마들을 넷플릭스에서 찾아보며 과거의 자신을 찾아보길 바란다. 그것이 어떤 영화건, 결코 작지 않은 즐거움 또한 함께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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