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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Mar 16. 2021

'원더 우먼'에서 '원더'가 없어도

영화 '원더 우먼'을 통해 살펴보는 여성의 존재감

얼마 전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1908년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로, 1975년에 UN에서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하여 공식 지정한 기념일이기도 하다. 예전엔 스치듯 지나갔을 날이었건만, 요 근래엔 사람들이 각자 SNS를 통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고, 또 기린다.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역사 속에서 철저히 타자로 분류되었던 여성들이 이제는 점차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 속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여성의 힘'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소수와 약자의 틀에 한정할 수 없다는 역사의 흐름을 보여줌과 동시에, 무게의 중심과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이 이미 바뀌고 있음 또한 보여준다. 지나치게 거창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영화 '원더우먼'을 보면서도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영화 속 원더우먼을 예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이제 영화 속 원더우먼조차 그리 대단해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 새롭게 추가된 영화 '원더우먼'을 보고 문득 극장에서 처음 봤던 그때가 기억났다. 그보다 더 옛날이었던 외화 속 지극히 (기존의) 여성적인 캐릭터를 뒤로 하고,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여성에 대한 상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재미를 여전히 떠올리며 다시 영화를 클릭했다. 그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겠거니 하며.


영화는 다이애나의 유년시절부터 시작한다. 한창 호기심과 꿈 왕성한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남다른 능력을 보여왔다. 그 힘 때문에 전쟁의 신 아리스에게 도리어 발각될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서도 그녀는 착실히 성장해 나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힘 못지않게 내면의 힘 역시 차곡차곡 쌓으며 훗날을 대비한다. 그러던 중 전투기 조종사 스티브와 우연히 그녀의 세계로 들어온다. 그로 인해 아마존 섬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살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리스가 부활했음을 느낀다. 더 이상 안락한 세계에 머무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다이애나는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 바깥세상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예전엔 별다른 큰 감흥 없이 봤었던 초반 도입부였건만 4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본 지금, 마냥 대수롭게 보이질 않는다. 주인공 다이애나가 출정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묘사가 흡사 오늘날 현실 세계 속 여성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락하고도 행복 가득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기실 외부 세력 앞에 풍전등화와도 같은 세계 속에서 다이애나는 머무르고 안주하기보다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 힘을 드러내는 것이 곧 발각되는 걸 의미하고, 이를 염려하는 어머니는 그녀를 만류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며 그녀는 타협 대신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뒤로 여러 난관과 역경을 물리치고 다이애나는 전쟁의 신 아리스와 대면한다. 살짝 힘에 부칠 거라고 직감했던 건지는 몰라도 등에 어느새 흐르고 있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아리스는 인간의 무지와 교만, 무자비함과 어리석음을 그녀에게 고자질한다. 저들에게 희망은 없다며 손을 잡자고 종용하는 아리스에게 다이애나는 분노의 불주먹을 내뿜을 뿐, (살짝 눈동자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아랑곳 않고 인간에게 선한 면 또한 있다고 맞받아치며 믿음의 펀치를 아리스에게 내다 꽂는다. '왜 때문'이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아리스에게 다이애나는 저들에게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며 '지켜줄 가치'를 넘어서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왠지 연애 한 번 못해봤을 것 같은 아리스는 그녀의 개방된 힘과 화려한 말발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세상엔 평화가 찾아온다.


결국,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답이 도출된다는 점에서 영화 '제 5원소' 속 밀라 요보비치가 연기한 여주인공 '리루'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선을 분명히 그을 수 있는 건, 힘을 가졌으되 그 힘을 어떻게 쓸지 모르다가 브루스 윌리스의 도움으로 각성하게 된 리루와 달리, 원더우먼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힘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 원더우먼은 마치 '슈퍼맨'과 같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면밀히 생각해보면 그 초인적인 힘 이면에 존재하는 그녀의 강한 내면 또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연장선 상에서 영화 속 주인공 다이애나가 그토록 빛나 보였던 건 비단 그 특별한 힘에만 있지 않았다는 점 역시 느낄 수 있다. 옳은 걸 옳다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할 줄 아는 그 호연지기에서부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마음, 한 번 마음먹은 바는 어떻게든 관찰하고야 마는 굳은 의지 등, 그녀를 빛나 보이게 만드는 요소는 이렇듯 그녀의 특별한 힘 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단단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그녀가 가진 놀라운 힘은 그 정신을 받침 하는 매우 훌륭한 도구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내면의 힘은 원더우먼만이 가진 고유한 특질이라기보다, 오늘날 각계각층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여성을 대표하는 요소라고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초인적인 힘을 제외하고 난 더 이상 원더우먼이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원더 우먼'이라는 영화의 제목에서 '원더'가 없어도 될 만큼. 그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과 내면의 단단함, 이미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여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흔하진 않지만 현실세계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강한 여성, 외적인 강함이 아닌 내면의 단단한 힘이 있는 사람 말이다.


누르고 막으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은 필연적이다.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젠더를 둘러싼 갈등 역시 달라진 여성의 위상이 틀 밖으로 삐져나오는 데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본다면 그 결말 역시 우린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오만한 아리스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원더우먼의 모습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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