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당신의 테라스엔 누가 사나요
읽는 내내 흡사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의, 잘 짜여진 '소설'이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야 깨닫게 됐다. 이 책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과 펭귄과의 우정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일까 싶어 당연히 소설이라고 생각했건만 실화라니. 안그래도 작가의 지나치게 생생한 펭귄에 대한 묘사와 애정 담뿍 담긴 문장들을 통해, 작가의 세심하고도 섬세한 표현력에 감탄했었더랬다. 단지 상상만으로 창조한 펭귄과의 우정이라기엔 펭귄의 습성이나 당시의 시대상이 너무 생생했던터라, 역시 작가는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책을 읽는 중간에 들었더랬다. (물론 사실에 기반하건, 참말로 지어낸 소설이건 작가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말이다.)
결국 실화에 바탕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작가가 겪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작가의 글들이, 그 문장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글은 다시금 책을 읽고 난 후 쓰는 독후감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작가와 펭귄과의 우정을 읽고 난 후 써내려가는 글이다.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었나, 왠지 어느 상영관에서 이미 보았던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만화같은 설정과 동화같은 아름다움때문이리라. 물론 2017년 오늘날, 반려동물의 의미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기에 사람이 (마음막 먹으면) 못키울 동물이 없고 교감하지 못할 동물 역시 과거보다 상당 부분 줄었지만, 당시는 고작 1960~70년대에 불과하지 않았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고, 거리엔 화약 냄새 매케하던 시절이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반려동물에 대한 개념조차 전무하던 그 때 그 시절, 지구 반대편에서 작가는 2017년인 지금에도 좀처럼 보기 힘든 '펭귄'과의 우정을 차곡차곡 쌓고있었던 셈이다.
'후안 살바도르', 사람들은 '후안'이라고 부르는 이 펭귄은 우루과이 해변에서 구조된 그 순간부터 남은 일생을 작가와 보내게 된다. 이 책은 후안과 작가가 서로 교감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순차적으로 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닌, 펭귄이기 때문에 작가는 처음에는 좌충우돌하지만, 점차 후안을 '알아간다'. 그리고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아무리 낯선 동물일지라도, 중요한 것은 진심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 참담하고 엉망인 상황에서 오직 단 한 마리의 펭귄만이
열린 부리 사이로 보이는 선홍빛 혀와 맑게 뜬 두 눈,
칠흑같이 검은 몸으로 거센 분노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불현듯 나는 이 한 마리 새에게서 희망의 씨앗을 느꼈다.
만약 몸을 깨긋하게 씻어준다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저 새에게 삶의 기회를 줘야만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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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中>
휴양차 잠시잠깐 머물렀던 우루과이 해변에서 조우한 이후부터 함께 아르헨티나로 입국하기까지 나름 손에 땀이 나는 상황을 넘기고 결국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 물론, 처음 구조되었을 당시 후안은 주인공의 진심을 의심하며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었다. 주인공 역시 펭귄으로서 '후안'의 생리에 무지했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름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서로의 진심이 전달되어진다. 진정한 친구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의 배경이 된 당시 1960~70년대 당시 아르헨티나는 혼란과 격변의 시기 그 자체였다. 당시 계속되던 경기침체와 정치 불안정, 그로 인한 어마어마한 물가상승을 통해 국가의 전반적 기능이 마비되었던 시기로 당시 군부 독재 체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기도 했던 그런 시대였다. 이러한 혼탁한 시국과 어지러운 바깥상황에서도 주인공 톰은 후안과의 동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후안과 처음 만났던 당시부터 주인공이 느꼈던 것, 다름 아닌 책임감때문이었으리라. 혹은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바다에 유출된 기름으로 인한 수천마리의 펭귄들의 죽음을 방조한, 어느 부류의 인간들은 갖지 못한 바로 그것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편한 세상이다. 혼자 밥먹고 혼자 여가를 보내는 것에는 어떠한 책임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눈치 볼 것도, 타협하거나 조율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나 자신의 행복과 안녕만이 신경써야 할 유일한 책임인 셈이다. 그러나 결국 홀로 살 수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겹겹이 포장하려 애쓰지만 우린 늘 누군가를, 무언가를 갈구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들인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책임감이었다.
그 나이에 어떤 것을 책임졌던 경험은
내 인성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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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中>
글을 읽으며 후안에게 있어서 작가에 의해 구조되어 작가와 함께 생활한 것이 다행이었을지, 아니면 서둘러 다시금 펭귄무리로 돌아가는 편이 후안에겐 더 나은 길이었을지 잠시 생각해본다. 누군가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동물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둬져 길러지는 것보다 자연에서 존재하고 무리 안에서 활동할 때 진정 행복을 느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 난 후안이 그 어느 펭귄보다도 행복했으리라 생각한다. 주인공 톰과 같은 친구를 만난 것 자체가 후안에게도 행운이지 않았을까.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 해서 이들과의 소통을 외면하며, 키우는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금수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반려동물을 마치 장난감마냥 다루고 본인의 소유물로 인식하며 책임과 무책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람들도 많다. 여름 피서철 길가에 버려지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해마다 늘고 있다는 뉴스는 반려동물을 대하는 우리 인간의 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니라고 하기엔, 변명이 마땅치 않다. 남은 기름 찌꺼기를 바닷가에 방류함으로써 (후안만을 제외한) 펭귄들의 떼죽음을 방조한 어느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면 그 역시 의도한 일은 아니었노라고 또 다른 변명을 골몰하며 머리를 긁적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개가 사람을 물어 죽게 만들었다. 정부에서는 체코 40cm 이상의 개에게는 입마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해 이같은 사태를 방지하고자 한단다. 문제의 원인을 말 못할 '개'에게 입마개 씌우듯 뒤집어 씌운다. 올바른 해결책이라며 박수라도 쳐야할까. 철저히 인간위주의 사고방식과 그 틀은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한 산업화 이래로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니, 후안과 작가의 우정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후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같은 반려동물과의 끈끈한 유대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기술이 발전하는 동안 의식은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나만의 후안이 아니라, 다른 후안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다. 대체될 수 있다. 100만원이 넘는 휴대전화를 사도, 내년에는 다른 최신 휴대폰을 사야한다.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당신의 후안은 대체될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