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82년생 김지영. 소설 속 그녀가 살던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에 태어난 나는 82년생이다.
너무 어려서였던 탓에 군데군데 끊어진 영상과도 같은 흐릿한 88 올림픽의 기억을 가진,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2002년 월드컵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리고 어느덧 세월 지나 지금은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서른일곱 살인 직장인이다. 왠지 성별을 밝혀야 할 것 같아 이야기하자면, 이 글은 37년 간을 남자로 살아온,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임을 미리 밝힌다. (불필요하게) 스스로가 남자라는 것을 밝힌 건 책상에 이미 선을 긋고선 누군가에게 '넘어오지 마'라며 경계하고자 함이 아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37년 간 차곡차곡 쌓아왔던 나의 무지를 이야기 하고자 함이니, 자그마한 오해라도 없었으면 한다.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소설이다. 그러나 마치 책 어느 한 귀퉁이에 '본 이야기는 실화에 바탕해 기술되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을 것 같아 몇 번 책을 뒤적거렸다. 틀림없다.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이 책은 2016년 말에 출간된 책이다. 그러나 난데없이 1년 여가 지난 어느 시점부터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하다가 며칠 전 다시금 이 책의 영화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하다. 페미니즘이니, 여혐이니 남혐이니. 흡사 누군가 책상 위에 그어놓은 줄처럼 사람들 사이에 자주 오르내리는 작금의 시점에 이 책이 화제가 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게다. 책 뒤표지에는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라는 자극적인 문장이 보인다. 불편함도 잠시, 책의 화제성을 위한 출판사의 자극적인 문장 뽑아내기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 건, 책을 다 읽고 난 뒤였다. 이 책은 자극적인 문장으로 여혐 혹은 남혐을 편 가르기 하려는 책이 아니다. 그저 나와 동갑인 82년생 지영 씨가 겪었을, 소설 같지만 어느 누군가는 마냥 소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할 어느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내게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 더러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몰랐던 그 세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일찍 알게 되지 않았을까. 조금 더 그들의 편에서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책이 나오기 훨씬 이 전부터 그들이 살던 세계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그럴 수도 있었겠다. 일찍이 알게 되었더라도 그게 몹시도 당연한 줄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는 말이다. 내가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군가 받는 차별과 불편 역시도 당연하게 생각했었을 수도 있었겠다. 어느 날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을 때 여전히 난 어리둥절 했을 수도 있었겠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잘해왔잖아"
82년생, 만으로 서른여섯 해를 살고 있는 여자들은 묘한 경계에 있는 세대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여자는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야 하는, ' 남존여비가 당연한 부모님 세대 밑에서, 그리고 아래로는 진취적이면서 자기표현에 당당한 요즘 '신여성'들이 부러운, 그런 세대다(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시되어왔던 설움 혹은 차별에 무감각했지만, 뒤늦게나마 본인들이 응당 누렸어야 했던 그 작은 권리를 찾고 싶은 세대다. 읍소 할 곳 없지만,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사회에서도 늘 약자였다. 책에 나오는 지영 씨의 삶은 이처럼 늘 녹록지 않아왔다. 제정신으론 버티기가 힘들지만,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우리네 어머니가 그렇게 감내해왔듯 말이다. 어머니 세대가 그래 왔듯, 지금까지 김지영 씨에게 '인내'는 선택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당연시했던 차별 혹은 설움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걸 뒤늦게 알지만 그걸 깨뜨릴 용기도 힘도 없다 느낀다. 당하곤 못 사는 젊은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다. 내게도 선택권이 있었다면, 과연 지금의 삶을 선택했을까. "나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라는 엄마의 말에, 엄마는 그냥 엄마면 되는 줄 알았던 김지영 씨는 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웃어 버렸다고 했다. 어머니에게도 선택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김지영 씨의 인내가 말라버렸다. 쥐어짜도 더 이상 인내가 나오지 않는 어느 순간, 지영 씨는 더 이상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다.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청년기를 거쳐 직장인의 삶, 결혼에 이르기까지 82년생의 여성이 겪었을 법한 온갖 종류의 다양한 사회적 '차별'과 '핍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혹자(남자들)는 이 소설이 정말 말 그대로 소설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스스로가 겪지 않았다고 이런 세계가 있었냐고 하는 우문은 스스로가 가진 견문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셈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겪지 않은 것들을 부정한다고 해서, 내가 누리고 겪은 것들이 정당한 것은 아니므로, 지금 이 소설이 불편한 어느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인정'이 아닐까.
책을 완독하고 나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내 머리가 그리 영특한 편이 아니라 군데군데 끊긴 필름처럼 조각조각의 희미한 기억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 옆자리 여자 짝꿍부터 중학생 시절 같은 반이었던 여자 아이들, 대학 시절 여자 동기 아이들까지. 내 기억 속 그 아이들은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해맑던 웃음을 여전히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사회로 나와서, 또 결혼을 해서도 이들은 여전히 행복할까. 웃음에 그늘이 지진 않았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책에서 82년생 김지영 씨가 바란 건,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라거나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누군가에 대한 복수, 혹은 세상을 전복시키자는 게 아니다. 세상의 남자들과 한 판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이 책의 작가가 그리고 이 소설의 김지영 씨가 원한 건 다른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정'과 '격려', 그리고 각자의 소소한 '반성'이 아니었을까. 세월 지나 94년생 김지영, 그리고 06년생 김지영 씨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나의 딸들이 부디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란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