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른 부서 사람들 열몇 명 정도가 단체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회사 근처 해초 요리 집이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는 부지런을 떨었다. 물티슈 놓고, 수저 세팅하고, 물을 컵에 따르고. 복직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이런 센스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때 주문을 받기 위해 종업원이 들어왔다. 나는 재빠르게 종이를 받아 메뉴를 적기 위해서 자원했다.
"제가 주문받을게요! 뭐 드실래요?"
그런데 하나 둘 메뉴를 통일하기 시작했다.
"고등어조림이요."
"저도 고등어조림!"
"저도요!"
메뉴판을 유심히 보던 신입사원도 눈치를 보니 "저도 고등어조림 먹겠습니다"라고 외쳤다.
반면에 육회비빔밥을 먹겠다고 나에게 조용히 말을 하는 차장님들이 있었다.
"우리 여기 테이블 5명은 육회비빔밥 할게요."
나는 조용히 메모하였고 그 종이를 종업원에게 넘겼다.
종업원은 주문을 큰 목소리로 다시 확인하였다.
"주문 확인할게요 고등어조림 12개, 육회비빔밥 5개, 보리굴비정식 1개 맞으시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부서 과장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보리굴비? 누가 보리굴비 시켰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저... 저요."
하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과장님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분명 '탐탁지 않은'카테고리였다. 메뉴판을 보니 고등어조림(17,000원), 육회비빔밥(18,000원). 그리고 나 혼자만 보리굴비정식(28,000원).
허걱.
"보리굴비 좋아하나 봐요, 이대리?"
아무 표정 없이 툭 던진 질문이었지만, 공기가 싸늘해졌다.
아, 이거 설명해야 하나? 어떻게 설명하지?
"어... 제가 매운 걸 못 먹어서요."
짧게 대답했지만,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선 긴 변론이 펼쳐졌다.
'사실은요, 제가 위가 없어요. 저 위암 생존자거든요. 아, 비장도 없고요. 췌장에 종양도 남아있고요. 그래서 매운 거 먹으면 진짜 아파요. 소화가 안 돼요. 기름진 것도 마찬가지고. 점심 특선이 고등어조림, 육회비빔밥, 보리굴비정식인데 고등어는 양념이 너무 매워서 못 먹어요. 육회는 날 것을 못 먹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이 모든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반찬들이 깔렸다.
"잠시만요 비켜주세요"
식사가 나왔다. 해명할 타이밍을 놓쳤다. 다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위가 없으니까. 비장이 없으니까. 꼭꼭 씹어야 하니까.
보리굴비 뼈를 발라냈다. 기름기가 많아 보이는 부분은 같이 나온 녹차물에 씻었다. 밥 한 숟가락, 생선 한 점. 천천히, 아주 천천히.
테이블에 나온 해초 반찬들은 먹지 못했다. 장폐색의 위험이 있는 음식들. 예전 같았으면 좋아했을 텐데.
몇 점 먹지도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벌써 그릇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남은 보리굴비 살을 후다닥 발라내서 입에 넣었다.
하나 둘, 사람들이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아직 밥 반 공기와 생선 절반이 남았는데.
"많이 남겼네요?"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에 음식을 한가득 물고 있었다. 꿀꺽 삼키지도 못하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냥 던진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기껏 눈치 없이 비싼 거 시켰는데, 그것도 이렇게 남기다니?'
물론 그런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분명히.
그날 나는 '센스 없는 이대리'가 되었다.
혼자 비싼 메뉴를 시킨 사람.
천천히 먹느라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한 사람.
음식을 많이 남긴 사람.
하지만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왜 그래야 했는지.
그 보리굴비 몇 점이 얼마나 귀한 선택이었는지.
항암치료를 받을 때 아무것도 못 먹던 내가
겨우 계란찜을 한 입 먹고 하루 종일 토하던 내가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가 생겨 사람들 있는 곳을 못 나가던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이 기적인 것을
천천히 씹는 그 순간들이 내게는 기적 같은 일상이라는 것을.
다음부터는 먼저 말해야겠다. 어색하더라도, 민망하더라도.
"저 위가 없어서 매운 거 못 먹어요."
짧게라도.
그래야 '센스 없는 이대리'가 아니라, '용감한 이대리'로 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