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누가 빚내서 써

by 이유

나는 빚쟁이다. 회사와의 체무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연차를 빚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용 할 수 있는 휴가 갯수가 0이다. 나는 암치료를 위해 휴직을 오래하였기에 회사 시스템 상 발생 된 연차가 없다. 그래서 내년도에 발생되는 연차 10개를 빚내고 조기 사용으로 쓰고 있다. 회사에 입사한 연차로만 따지면 6년차 직장인이다. 그렇다면 연차가 17개가 있어야 정상이다. 내 입사동기들은 연차가 17개이다. 그런데 나는 연차가 없어서 내년에 쓸 수 있는 연차를 땡겨서, 말 그대로 연차를 빚내서 쓰고 있다.


당황스럽다. 나는 연차를 써야하기 때문이다. 암 생존자로서 적극적인 항암 치료를 마치고 현재는 추적 관찰중이다. 암이 더 켜졌는지 다른 곳에 생겼는지 또 다른 신체적 변화가 생겼는지 주기적으로 보아야한다. 3개월마다 내시경, CT, 초음파, 체혈검사 등을 하기 위해 병원을 가야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루에 다 끝나면 얼마나 좋은가? 그렇지 않다. CT를 찍기 위해서 하루 연차를 써야하고, 내시경을 또 해야 하고, 체혈 검사를 공복에 해야 하고 또 그게 다가 아니다. 2주는 지나야 CT 판독 결과가 나온다. 외래 진료 결과를 들으려면 2주 뒤에 또 병원에 가야한다. 그때도 연차를 써야 한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나는 지금 종양내과 뿐만 아니라 내분비내과, 소화기내과, 산부인과 이렇게 총 4군데의 진료를 동시에 받고 있다. 그러니 같은 날 내시경, CT, 체혈검사, 초음파를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내년 8월까지 연차 휴가를 미리 대출해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미, 5월과 10월 사이에 병원을 6번은 넘게 갔다. 그때마다 연차 휴가를 올렸다. '연차휴가 조기사용'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내년꺼 빚내고 땡겨 쓰고 있다. 연차 빚쟁이다. 그나마도 10개까지만 가능하다. 그것 마저도 다 쓴다면 어떻게 될까? 글쎄, 이제 대략 2개 정도 남았다.


물론, 건강유결이라는 무급휴가를 올리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14일 이상 건강에 이상이 있을시에만 쓸 수 있다. 그러나 건강유결 상태일 때는 무급이다보니 월급이 깎여서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편하게 휴가를 갈 수 있고 유급으로 갈 수 있는 연차는 없다.


당장 또 다음달에 체혈검사과 외래 진료 결과가 있는데... 휴가를 올리기에 눈치가 보인다... 그래도 회사가 나의 건강을 책임져 주지 않는걸! 나는 그렇게 빚내서 오늘도 연차 결재를 올린다.


내가 그래서 연차를 쉽게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니 글쎄 우리팀 팀장님은 연차가 너무 많이 남았다고 한다. 빈익빈 부익부라고 하던가? 무려 연차가 10개가 넘게 남았다고 한다! 인사팀에서 올해 안에 발생된 연차를 가급적 모두 쓰라고도 연락이 온다고 한다. . 물론 나랑 일한 햇수가 상당히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올해 연말까지 다 써야 된다고 하는데, 쓸 시간이 없다고 하신다. 연차 부르조아다. 빈익빈 부익부. 왜 연차는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없고 있는 사람에게는 있는가?


휴직하기 전 팀에서 팀장님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당시 나는 신입사원이어서 1개월 만근을 해야 1개가 발생되는 구조였다. 1년차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팀장님은 연차가 너무 많이 남았다며, 차라리 남은 연차를 나눠주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로 했다. 연차가 아주 많이 남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 그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마인드 아닐까?


회사안의 다양한 인사노무 행정을 개선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진심으로 연차가 너무 많이 남아서 쓸 수가 없는 고연차 직원들의 연차를 후배 사원들에게 선물로 주면 좋겠다. 그런데 이게 현실적으로 될 리가 없겠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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