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지 않는다고 버릴 것까지야 없지만

by 유이월

통영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새로 런칭하려는 굴의 생산 환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굴은 위험 부담이 있는 까다로운 종목이라 필요한 절차라고 판단되었다. 출장의 결과는 만족스러웠고, 이만하면 안심하고 판매해도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내 속내는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바다를 본 순간, 막힌 혈자리를 누가 눌러준 것처럼 마른 감정이 지잉 소리를 내며 돌았다. 출장의 목적과는 별개로, 어쩌면 핑계삼아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바다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 출장을 계획했을까. 그러고보면 나는 소소하게나마 설레임을 찾을 수 없는 일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니, 설레임이 없는 일을 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발굴해야 한다. 학교가 죽을 만큼 가기 싫을 때는 등굣길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보는 낙으로 길을 나섰고,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조금 멀리까지 걸어가 맛있는 단골 커피집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단순히 순간의 자신을 위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힘을 길어올리는 감정의 원천을 매만지는 것이다.


감정은 이성과의 대척점에서 쉽게 폄하되곤 한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성이 더 우위에 있다는 오해에 맞서, 나는 업무에 있어서도 감정에 귀를 기울일 때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하고 있는 마케팅이라는 것도, 내 감정이 동하는 물건을 소개하여 타인의 감정을 움직이는 일 아닌가. 무엇이 더 우위인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정이 걸쳐져 있는 영역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또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업의 흥망성쇠를 경험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객들은 사업자가 흥이 나 있는지 아닌지를 잘 알아차리고 그것은 곧잘 구매/비구매와 연결되기도 한다.


나이를 먹으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감정이 설레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TV나 영화에서 매끈하고 잘생긴 남자 배우를 봐도 그냥 아들 같기만 하고, 사시사철 계절을 타던 마음도 많이 흐릿해졌다. 알록달록하던 모든 것이 모노톤으로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일에 관대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료해지는 것 같다. 하는 일 없이 공원 벤치에 나와 앉아있는 노인들의 마음이 벌써 이해될 나이는 아닌데 조금씩 그쪽으로 기울어가는 나 자신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할 때 흥이 나는 오늘의 나를 보면, 다행히도 설레임은 퇴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이 작아져 어느 한 쪽에 포커싱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욕망의 멀티태스킹을 소화하지 못하게 되면서 한두 가지의 설레임만을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전반적으로 기력이 떨어졌지만, 장사를 할 때, 글을 쓸 때 아직 설렌다. 만일 100세 시대라는 흔한 말이 내게도 적용된다면, 죽을 때도 나는 무언가에 정확하게 설레고 싶다. 설레임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 고용한 탐정이 되어, 아까운 시간을 대강 흘려보내지 않도록 설레임을 찾아내 꼭 붙들고 있을 계획이다.


주말이다. <줄스>라는 영화를 보고 <각각의 계절>이라는 권여선 작가의 책을 마저 읽을 예정이다. 나에겐 밀려있는 설레임의 투두리스트(to-do list)가 있는데 주말은 그것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시간이다. 그것을 지우지 못하면 그 다음 일을 정상적으로 해낼 수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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