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의 천변을 걷다보면 죽어 있는 벌레들을 자주 보게 된다. 산책이란 아늑하고 평화로운 행위인 것 같지만, 나는 산책을 다녀올 때마다 그 1시간 동안 몇 마리의 벌레가 밟혀 죽었을까 생각해보고는 한다. 나의 산책은 벌레들의 생명보다 중한가. 그만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나. 글을 쓸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내가 추구하는 온건한 가치라든가 개인적 취향을 담아 글을 쓰지만 혹시라도 내 글 때문에 긁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나에게 온건한 것이 누군가에겐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취향도 일종의 계급이라는 연장선상에서 누군가에겐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세상에 100% 무해한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장사도 그렇다.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에 무에 나쁠 것이 있나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고기를 판매할 때는 혹시 채식주의자들에게 불편감을 줄 수 있고, 무언가를 구매할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저렴하다고 올리는 물건들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그걸 다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의 평범하고 무심한 행동도 그렇게 완전무결하게 무해할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하나뿐인 지구가 망가져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 모든 일은 의도와 상관없이 어딘가에 생채기를 낸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다. 무해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위선자가 된다. 동시에 우리는, 나의 유해함 때문에 너의 유해함에 관대해질 수 있다. 사느라 그랬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