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이라면 내 병이 완치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깨우는 것. 그리고 무엇이 있었나. 천재지변..?
“천재지변.. 이 새.. 생기면.. 개.. 개.. 깨울 수 이.. 있다는 조항이 어어어.. 언 듯 기억나.. 납니다.”
아직은 발성이 쉽지 않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한 글자씩 뱉어내었다. 숨이 찼다. 끈기 있게 내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굳은 얼굴로 잠깐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정리하는 것 같았다.
“대략 6개월 정도 뒤에 지구와 큰 소행성이 충돌할 가능성이 오늘 기준으로 88%인 상황입니다. 확률은 매일 조금씩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마친 그녀는 잠시 표정이 흔들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 어떤 상황인지 알게 되었지만 아직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동요하는 상황이고 많은 부분들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이곳도 유지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아 곧 폐쇄될 예정입니다. 네, 사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고객들을 깨워 안내드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녀의 표정은 많이 굳었다. 아까 맨 처음 만났을 때의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아직 내 상황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는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고객님이 예치하신 자산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금전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지만요.”
실소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나도 살짝 웃음 지었다. 깨어난 후 처음 웃어보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두 시간 정도 후에 간단한 식사를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실 수 있는 시청각 자료를 준비했으니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녀가 한쪽 벽으로 다가가 큰 제스처를 취하자 순간 벽의 일부에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막연히 미래라면 3차원 영상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익숙하게 최대한 집중하여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첫 장면은 세상에. 내가 잠들기 직전의 모습의 나와 주변 의료진을 찍은 영상이었다. 대화를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준비를 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보이고 나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내가 이렇게 잠이 들었구나. 흥미로웠다.
내가 잠든 해는 2088년. 그리고 지금은 2189년이었다. 몇 백 년은 잠이 들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고작 백 년 정도 잠을 잤다. 영상에서는 나노봇을 통한 끊임없는 노화로부터의 재생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했고 가능한 일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세포의 돌연변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완벽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 상태였고 나와 비슷한 이유로 잠이 든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그러한 사람들도 곧 나처럼 깨어나겠구나.
흥미로운 내용들이 계속되었으나 내 마음속은 대략 6개월이 남았다는 지금의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의 영상을 빨리 뒤로 돌리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다. 어느 순간 나와 대화하던 그녀는 방에서 사라졌고 나 혼자 있었다. 영상이 재생되며 창문이 닫히고 주변이 어두워졌는데 그 틈에 나간 모양이었다.
지난한 이야기들이 지나가고 드디어 지구의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해당 운석의 궤도는 굉장히 오래전부터 관측이 되어왔고, 충돌 가능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었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처구니없는 두 귀를 의심하게 하는 이야기가 전개가 되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현재보다 세 달 전만 하더라도 해당 운석은 지구의 기술로 조치가능한 수준이며 이를 위해 운석을 파괴할 일종의 미사일을 운석을 향해 발사하여 제거하면 문제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고 조작의 주인공은 50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 아니 지구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관리하기 시작한 초 거대 AI 시스템인 ‘누리‘였다.
아마추어 천문학자의 의심으로 시작한 행성 충돌설은 점차 신뢰를 얻어갔으며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세계적으로 조직된 해커집단에 의해 - 그리고 세계정부 내의 협력자로 인해 - 누리를 해킹할 수 있었고 상상을 초월한 누리의 조작들이 밝혀졌다. 전 세계 천문 망원경 신호의 조작. 우주에 떠 있는 시스템 조작. 관련된 모든 데이터의 조작. 지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당 행성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작의 이유는 너무도 허무했다. 피할 수 없는 미래라면 최대한 숨겼다가 마지막에 공개하는 것이 사회 안정과 인류의 멘털 관리에 효과적이라는 자체적인 판단이 이유였다. 즉각 누리 AI는 해체되었으며 사회는 급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깨어나기 한 달 전 누리 AI의 놀라운 행적이 또 공개되었다. 이 역시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이 아닌 탄로 형식의 공개였는데 누리 AI는 행성의 지구 충돌 후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지구궤도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우주 도시급의 우주선을 제작하고 있었고 지상엔 최대한 빠른 지구 환경 회복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우주로 나가는 우주선 외에도 일종의 노아의 방주 같은 대형 배를 만들어 다양한 식물/동물 및 인간들을 태울 계획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우주선 및 방주에 태울 사람들도 나름의 기준으로 미리 골라놓고 있었다. 인간들만 몰랐던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계획.
“어질어질하네”
영상이 끝난 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