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5등급이던 애가 호주 생활 6년을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해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와 호주에 6년이나 살았어? 영어 잘하겠다!" 나는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어버리고 넘긴다. 단순히 ‘영어를 잘한다’는 것을 정의할 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토익이나 토플 등의 공식적인 영어 시험 점수, 혹은 외국인들과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정도, 또는 더 나아가 공식 문서나 번역 업무를 맡을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영어를 잘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하루종일 직장 동료들과 그리고 고객들과 영어를 쓰며 일을 한다. 일을 할 때는 당연히 늘 해오던 일이니 나의 분야이고 내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끔 직장 동료들과 스몰톡을 하는 도중 전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나 정치/시사/경제 와 같은 내 분야가 아닌 토픽의 스몰톡이 시작되면 나는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다. 당연한 사실이다.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닌걸? 나는 우리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소통하고 지식을 공유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해 낸다. 단순한 이유는 정말로 그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봤을 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기 위해 단순히 언어 스킬만 요구될까? 사람을 대하는 태도, 분위기를 읽는 능력, 상황 판단 능력, 대화를 이어나가는 능숙함 등 사회적으로 습득된 다른 많은 요소들이 요구된다. 해외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사는 장소가 한국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다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영어 실력으로 승부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환경 속에 잘 녹아들었는지의 적응력, 사회성의 영향이 더 크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 블로그나 학교 과제 등 할 일들이 있을 때 도서관을 주로 가는데 평소처럼 멜버른 시티에 있는 State library에 가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주립 도서관이 리노베이션 되면서 도서관내에 카페가 생겼는데 그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분이 한국인이었다. (호주엔 바리스타로 일하는 한국인이 되게 많다. 나 또한 바리스타로 일을 했기도 했고) 처음에 한국인인지 모르고 Hi, what size do you have? Is that a large size? Can I have one large oat latter, please”하며 주문을 하는데, 그분이 “혹시 한국분이세요?”라고 질문을 했다. 나는 “엇 네 맞아요! 한국인처럼 생겼나요” 했더니 “아, 솔직히 말해서 한국인들은 한국인 발음이 있잖아요.”라는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차라리 한국인처럼 생겨서 한국인인 줄 알았다고 했으면 덜 기분 나빴으려나? 발음 때문에 한국인인 줄 알았다는 얘기는 또 호주 살면서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하하 그렇죠 한국인 영어 발음이 있을 수 있죠” 최대한 웃고 넘기려고 했다.
나 스스로도 참 모순적인 사람이구나라고 느꼈던 게 '혹시라도 내 발음이 정말 구렸다고 하더라도 그걸 사람 면전에 대고 얘기하는 건 무례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인 발음 때문에 한국인으로 보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도 그걸 의식하고 있었던 걸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 사람들의 백그라운드, 영어 실력 등으로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호주에서 살다 보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일하면서 영어를 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분인 거야. 근데 괜히 한국인인 척하기 싫어서 그냥 영어로 얘기했어 ~!’ 해외에서 같은 국적의 사람을 만나면 더 반갑다기보다 피하고 싶어 지게 사람 마음일까. '내 영어가 엉터리라고 생각할까?' '내 영어 발음이 이상하면 어떡하지?' 같은 한국인끼리 서로 판단 내리고 평가받고 싶지 않은 불안함이 작용한 심리이겠지.
하지만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절대 영어가 늘 수도 없을뿐더러 나만 손해다. 약간은 뻔뻔한 태도가 필요하다.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닌데 나는 Bilingual이 되려고 노력했고,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이 더 잘 알아들어어지. 나한텐 문제없어' 하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태도랄까.
영어 실력과 해외 살이는 정말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생활력 강하게 약간은 억척스러워도 헤쳐나가는 힘이 있다면, 나는 그 에너지가 더 큰 뒷받침이 된다고 믿는다. 이것은 해외 살이 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삶을 나아가는 자세와도 연관성이 있다. 그러니 본인의 영어 실력에 소심해질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부족한 영어 실력은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본인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으니까.
나는 고등학교 첫 영어 모의고사 때 5등급을 받았다. 그래도 영어가 좋았다. 영어 모의고사 빈칸 추론 문제 말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교과서 지문을 소리 내서 달달 읽는 걸 좋아했다. 외국인이랑 얘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서 영어 지문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지금 호주에서 그래도 부모님 손 안 벌리고 내 돈 벌어서 내 밥벌이는 하면서 살고 있다. 안 그래도 힘들고 외로운 해외 살이를 몇몇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걱정하느라 본인의 소중한 시간과 감정 소비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