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물질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드르륵 창문을 열었다. 하늘에서 떡가루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2층에서 내려다본 길가에는 패딩과 목도리로 무장한 아이들이 무리 지어 서있었다. 이윽고 대형버스가 그들 앞에 섰고 "ㅇㅇ어학원"이라고 쓰인 노란색 상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실어 나르듯 아이들을 태우고 떠났다. 버스가 참 크기도 하네... 저렇게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어떤 사람일까? 물음표들이 안경을 치켜세우며 걸어온다.
얼마나 실력이 있을까? 학생들이 서 있던 발자국을 떡가루가 지울 때까지 나는 대형버스가 도착할 원더랜드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기분일까? 저렇게 많은 애들이 다니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분은? 상상은 멈출 줄을 모른다. 아마도 관객이 꽉 찬 무대위의 가수가 된 기분일 거야. 나는 혼자 피식 웃었다.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느끼다니 웃기네...
왜 내게 오지 못하고 있을까. 올 수 없다면 나는 왜 갈 수 없을까. 수많은 사색과 질문들이 총탄처럼 가슴에 박히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불을 처음 발견한 호모 에렉투스가 된 기분이었다. 내면이 뜨거워졌다.
목동의 아파트상가 2층에 위치한 작은 학원. 내가 맡은 학생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원장님은 팀장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파 주었지만 내밀 곳은 없었다.
학생 한 명이 잠이 덜 깬 얼굴로 강의실로 들어온다. 내 강의실은 창문은 작았지만 칠판은 성인 2명이 팔을 벌리고 서도 될 만큼 컸다. 언제부턴가 나는 결심핝 사람처럼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칠판을 마이크 삼아 강의라는 노래를 불렸다. 밤낮 없는 몰두의 시간이었다.
드르륵 창문을 여니 장미가 한 움큼이다. 파스텔 톤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웃으면서 걸어간다. 어쩐지 이곳이 낯설게 느껴진다. 창문 밖의 학생들은 여전히 줄지어 대형버스에 올라탔고 동시에 강의실 문이 열리며 원장님이 부르신다.
1년을 꼬박 다닌 학원은 초등전문으로 축소되면서 나는 더 이상 2층에서 대형버스를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면접 연락이 왔다. 왜 한 번도 대형학원에 면접 볼 생각은 안 했던 걸까. 부부싸움을 막 끝내고 신세한탄을 하는 드라마 속 아주머님처럼 혼잣말을 중얼댔다. 언제부턴가 시작된 질문은 툭하면 내 멱살을 잡아 포스트잇처럼 걸어놓는다. 그럴 자격은 내게 없다고 판단한 걸까. 아니면 뭔가 대단할까라 지레 겁을 먹은 걸까. 머릿속을 떠다니는 말풍선을 터트리며 난 깊숙이 넣어두었던 명품백을 꺼냈다.
10층짜리 신축 빌딩의 다섯 개 층을 쓰는 대형학원의 한 지점. 데스크는 등록을 하려는 학부모님들의 뒷통수로 가득했고 그들 사이로 원어민 강사들이 모노레일처럼 지나갔다. 나를 포함해 면접자는 세명. 시강은 즉석에서 배부된 독해지문을 이용해서 실제 수업처럼 진행하는 방식이다. 우리 셋은 못난이 인형처럼 무표정으로 앉아 지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각자의 무릎에는 명품백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유행 지난 가방이지만 들고 오길 잘했다고 잠깐 생각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시강을 했다. 아파트 상가 2층 조그마한 창문과 큰 칠판이 있는 강의실에서 몇 번이고 써 내려갔던것을 작두 탄 무당처럼 토해냈다. 안내 직원은 통유리부스로 나를 안내했고 원장이라는 여자가 알록달록한 실로 짜인 니트를 입고 들어왔다. 원장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다. 사귀고 싶다는 고백을 들은 것처럼 설렘이 쿵하고 떨어졌다. 나는 그림처럼 앉아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후반전 역전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경기장을 포효하고 있었다.
"내일 다른 학원 면접약속이 있거든요. 약속이라 안 갈 수는 없어서.. 혹시 내일 면접 후 비교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159cm의 신장. 어디에서 이런 대담함이 나왔을까?
지금 내 얼굴은 가부끼처럼 하얗게 칠해져 있을 것이다. 이곳은 분명 놓칠 수 없는 곳임에도 나는 허공에 주사위를 던졌다.
"그러세요 충분히 숙고하시고 결정하세요. 하지만 저희 조건이 더 좋을 거예요"
힘이 풀린 두다리로 또각거리며 밖으로 나오니 수십 명의 학생들이 내게 쏟아진다. 학생들을 토해낸 버스는 지금 눈앞에 도미노처럼 서있다.
한대 두대... 세대......... 다섯 대...
와아... 크다... 2층에서 본것보다 크다.
엄마. 나 지금 막 대형학원 면접에서 합격했어.
백수가 될지도 모르면서 36개월 할부로 차를 샀다고 내 방문을 열 때마다 잔소리를 하셨지만 나 지금 그 차를 타고 엄마에게 가고 있어.
잠실대교 끝에 걸린 석양이 뜨겁게 나를 안아줄 것 같다. 차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오후 6시 이른 저녁의 바람을 느껴본다. 손가락 사이로 인사하듯 넘나들며 나를 간지럽힌다. 만선을 이룬 어부가 집으로 돌아가는 심정이 이럴까. 큰 계약을 따낸 중소기업 부장님이 들이키는 맥주의 짜릿함이 이럴까. FM 라디오에선 이금희 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온다. "오늘의 첫곡입니다"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나도 몰래....
그대 떠나고 알아버린 이 사랑 때문에 ~~"
슬픈 이별의 노래도 때론 이렇게 벅찰 수가 있구나..
나는 석양 속으로 빠르게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