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할게
엉금엉금 기어서 병원으로 갔다. 3일 전부터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기에 내 장기는 텅텅 비었을 거다. 뭔가 정갈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훗하고 옅게 미소 지어 본다. 사람이란 이처럼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별의별 생각을 다하는 것이다.
물미역처럼 늘어진 나를 본 간호사는 수분과 함께 전해질이 빠져나가서 그런 거라며, 최대한 빨리 재워주겠다고 했다. 항구에서 멀리 떠나는 배를 배웅하듯 손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그녀가 벌써 내 왼쪽 팔에 주사를 놔버려서 나는 무의식의 세계로의 시동을 켰다. 원장님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텅 빈 대장과 위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결과를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햇살이 이불처럼 덮인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아. 상큼한 거... 그래.. 딸기가 먹고 싶다. 예전 같으면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10알에 2만 원 하는 딸기를 집었다. "쳇. 내가 얼마나 죽다 살아났는지 알아? 돈도 다 필요 없어. 주먹만 한 딸기를 먹겠어. 아.. 사과도 맛있겠다" 칼라프린트에서 뽑은 듯한 딸기와 사과를 품고 집으로 왔다. 실로 딸기는 맛있었다. 과즙이 팡팡 터지며 입속에서 춤을 추었다. 열개의 딸기는 식도를 타고 텅 빈 위에 도착해서 솜사탕처럼 사라졌다.
다음날 사과를 쪼개 먹는다. 다음날도 먹는다. 맛있다. 역시 비싼 거라 다르구먼. 싼 것만 불을 켜고 찾았던 날들을 반성해 본다. 그런데 그다음 날 사과는 물 말아놓은 밥 모양 푸석푸석했다. 쥐어보면 단단하고 색도 선명한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사과는 믹서기에 간 것처럼 맥없이 부서졌다. 비싼 사과가 이래도 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피곤하게 인생 사는 거에 지친 지 오래였다. 여덟 개가 한 묶음인 사과는 두 알은 맛있었고 세알은 푸석했다. 그리고 세 알이 남았다. 버릴 수도 없고 난처했다.
다음날 본전 생각에 버릴 수 없는 사과를 꺼냈다. 엥? 눈썹이 치켜 올라갈 정도로 맛있다. 처음의 두 알보다 맛있다. 이걸 들고 따지러 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가만있자. 그런데 왜 나는 나머지 세알의 사과도 맛이 없을 거라 단정한 걸까? 언제부터 이런 "자동적 사고"(*부정적인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속단하는 사고)를 하며 살았지?
인생의 짜릿함을 위해 온몸을 던졌지만 줄이 잘린 번지점프처럼 심장이 바닥에 나 뒹굴었던 때부터였을까? [계약은 이번 달까지 할게요] [우리 그만 만나자] [대장암 4기입니다] [전세 사기는 보상이 어려워서요] 철문에 얼굴을 그대로 박아버리는 듯한 이런 순간들은 실험실 개구리처럼 내 사지를 핀으로 박아놓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나는 출구를 찾지 못해 천장만을 바라보며 자동적 사고를 키웠다. 안 되겠지.. 싫다고 할 거야...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럼 그렇지..
슬픔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투명한 기대는 회색으로 붓칠하고 끝내는 검게 변해 쓰레기통에 쳐 박혔다. 유관순 열사는 나라를 위해 살았으나 나는 예측하고 단정 짓는 삶을 살았다. 눈동자엔 의심이라는 뱀이 똬리를 틀며 혀를 날름거렸다.
사과는 이렇게 맛이 있는데.. 이렇게.. 달콤한데... 사과의 즙이 아밀라이제와 칼싸움을 한 후 이빨사이로 떨어진다. 혀로 입주위를 훔치며 남겨진 두 알의 사과를 응시한다. 내 눈엔 빨간 사과 두 알만 보인다. 남은 사과도 맛이 끝내주었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본다. 사과가 맛이 있어서 끄덕이는 것일까. 아니면 자동적 사고의 종료버튼을 눌러도 좋다는 끄덕임일까.
어쨌든, 사과에게 사과를 해야겠다! 사과야. 사과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