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발견한 가치

3시간의 효용

by RECO

"네. 그럼 9시로 해주세요"

아침 9시라니..

전화를 끊고도 나는 걱정으로 휴대폰을 매만진다.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유방검사를 하려는데 예약이 꽉 차 그 시간에만 검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루고 미루던 터라 또 미루면 해를 넘길 것 같아 작정하고 하자한 건데 하필 오전 9시라니. 학원강사를 하면서 기상시간은 12시. 오전 9시는 새벽녘이다... 크으.. 어쩔 수 없다.


4월 중순의 어느 날. 10시도 안돼서 병원밖으로 나왔는데 문득 집에 가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근처에 사는 친구가 떠올랐다. 전화를 하니 커피 한잔 마시자고 해서 가까운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볕을 쬐며 멍하니 앉아있는데 평온했다. 넓은 유리창 밖으로 저마다의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이렇게 많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네...그들은 우연히 내 곁을 지나갔고 황금빛 발자국을 남겼다.

친구와 차를 마시고 나오니 11시 40분. 아직도 12시가 되지 않았다. 병원을 다녀왔고 차를 마셨고 교훈도 얻었는데 12시. 마치 만원 한 장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노트도 한 권 산 느낌이었다.


3시간의 효용. 가성비가 좋았다. 시간을 잘 쓰는 것에 대해서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느낌이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체감한 순간이었다. 이럴 때면 난 고개를 쓰윽 들어 앞을 보는 유인원이 된다.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가치들을 습득할 때면 T-익스프레스를 탄 사람처럼 꺄악 소리를 지른다. 은행에 돈을 갖다 바치는 데에만 열중하며 달리다가 끼익 브레이크를 밣는 순간처럼. 성숙하지 못했던 게 평생의 한인 나는 과거에 복수하는 심정으로 자주 활을 든다. 2021년4월23일 도서관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근처 도서관은 9시에 문을 여는데 좌석을 발급하면 이름과 시간이 찍힌 표가 출력된다. 사진첩에 폴더를 만들고 표를 찍어 기록했다. 소소한 루틴이 하나 더 생긴 순간이다.


책 속에 빙 둘러싸여서 조용히 앉아있으면 이곳이 봉은사고 낙산사이다. 금방이라도 법당 처마끝에서 풍경소리가 들릴것같다. 노란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스르르 부어 뜨근한 물을 더하면 하얀 소용돌이가 컵 안에서 빙그르 돌면서 향이 돈다. 콩나물 대가리 같이 생긴 문물로 귀를 막고 'Joao Gilberto의 The girl from lpanema' 같은 노래를 듣고 있자면 구름을 방석삼아 앉아 있는 들뜬 기분이다. 문득 오래도록 나를 지배해 온 것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말이다. 황금핓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오고 내모습을 상상한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나아진 모습으로 유턴하자. 혼잣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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