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전언
금테안경. 마른 몸. 시간을 들어만든 해진 티셔츠. 그리고 티셔츠를 넣어 입은 베이지색 바지. 수줍은 외모만큼이나 넌 성격도 드센 곳이 없었지.
반전이라고는 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혀가 짧은 듯한 말투. 동기들을 살뜰히 챙겼던 너. 증권가 아르바이트도 너 덕분에 하게 됐잖아. 고맙다. 내가 이 말을 그때 너에게 했었던가? 덕분에 난 대학생이 되고 힘든 일 하시는 부모님께 용돈 안 받고 사고 싶었던 오렌지색 립스틱을 살 수 있었어.
H. 잘 지내니?
근데 너에게 더 고마운 게 있어. 두고두고 잊히지 않던
그날에 너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내가 느낀 감정들이야.
그때가 아마 5월 정도였던 것 같아. 수업 마치고 학교 앞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너의 뒷모습이 보였지. 사실 너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널 만만한 콩떡으로 봤어. 그만큼 넌 착하고 무던했어.
늘 양보 잘하고 여자애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냈지. 왈가닥 같고 괄괄한 성격의 내가 너의 팔을 잡고 흔들어대며 투정하면 넌 언제나 못 이기는 척 내 부탁을 들어주곤 했어.
" H야~~~~"
너는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지. 곱디 고운 너의 금테 안경을 중지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고는 무슨 용무냐는 표정의 얼굴이었어.
"어디가?"
나는 물었고 넌 2시간짜리 알바를 간다고 했지.
"아 그래? 그럼 이따가 너 아르바이트 끝나고 영화 보자"
당연히 너에게 관심 있어서 영화제안을 한 것은 아니란 걸 너도 알고 있었지? 솔직히 그때의 난 긴 파마머리에 짧은 미니스커트 뾰족구두 진한 화장의 소유자였고 넌 내 헤어스타일을 보며 세렝게티 초원의 수사자 같다고 진지하게 말했었잖아. 증원가 알바를 소개해줄 때도 머리를 단장하게 묶지 않으면 어렵다고 했고.
밀가루를 뒤집어쓴 찹쌀모찌같은 순수미를 추구하던 너에게 나는 어쩌면 칼라티브이 같았을 거야. 암사자도 아니고 수사자라니..
넌 이내 다이어리를 꺼내 쓰윽 보더니
"안돼. 약속 있어"
이렇게 말했어.
"약속? 누구랑? 뭔 약속?"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내가 너에게 재차 물었을 때 넌 산책할 시간이라고 말했어.
"산책? 산책???? 누구랑????"
클럽 갈 시간도 아니고 산책할 시간이라니. 새내기 대학생에게 안 어울린다고 하면 내가 너무 일반화하는 건가? 그리고 <산책>이라는 그 단어가 그토록 흥미롭게 들리다니.. 매일 오후 3시 30분이면 쾨니히스베르크를 걸었던 임마뉴엘 칸트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너 약간 철학자 같기도 하네. 그 짧은 순간에도 난 너의 대답이 무척 너 답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보다 더 나를 흥미롭게 만든 것은 그 생경할 정도의 단어인 <산책>을 너 혼자 할 거라고 하는 거였어.
"장난하냐.. 너 혼자 산책을 하는데 그게 무슨 약속이야?.. 아.. 됐고 영화 보자"
"안돼"
제육 먹을까? 피자 먹을까?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내가 피자 먹자고 하면 제육 먹고 싶어도 늘 양보해 주는 너. 리포트 과제로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두꺼우면 반을 읽어주고 내용말해주는 네가.. 심지어 리포트도 써주던 네가.. 그런 네가..안된다고 말하는 거야. 제법 단호한데..
살짝 당황했지만 너의 고집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난 한 발짝 뒤로 물러섰어.
" 그래.. 산책 얼마나 할 건데.? 산책하고 보든가...?"
" 그 뒤엔 도서관에서 2시간 정도 책 볼 거야. 그 이후엔 되는데 너는 괜찮아?"
"...... 어.....?.. 어...!... 잠깐만... 글쎄..."
결국 우리는 그날 영화를 보진 못했어. 아무렇지 않은 듯 시간은 잔잔하게 흘려갔어.
졸업을 하고 우린 연락마저 끊겼지.
철없던 내가 서서히 "인식"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었을 때 그래서 가슴 안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때. H. 네가 갑자기 떠올랐어. 넌 자신과의 약속을 만들었고 그것을 지키고 있었어. 그래.. 넌 이미 그 나이에 시간의 가치를 깨닫고 빈틈없이 시간의 면적을 채우고 있었어. 소중히 여기고 쓸 줄 알았어.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의 그 5월로. 학교 후문 그 비탈길로 다시 돌아간다면 난 너에게 말하고 싶어.
"H.. 너 너무 훌륭하다. 니 수첩에 쓰인 빽빽한 글씨. 시간별로 할 일을 정해놓고 지키는 너. 그런 네가 내 동기여서 자랑스럽고 나도 너처럼 그렇게 살아야겠어.
오늘 너를 통해 교훈을 얻었어... 하루하루 그렇게 계획 세우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지키는 거 체크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정말 너 다워. 365일을 365개의 인생처럼 살아갈수 있을것 같아! 영감을 줘서 고마워! 너 제법! 멋있다!?"
그러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성숙은 그때의 나에게서 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었을까.
H.. 잘 지내지..? 지금 너의 스케줄러엔 어떤 계획들이 살고있을지 궁금하다. 나 궁금한 거 못 참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