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속삭임

긴 터널의 끝에 서서

by 정은영

4월이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가장 큰 계절이다.

아침의 찬 공기가 바람 따라 내 옷깃을 스칠 때면 옷 속으로 냉기가 후비고 들어온다. 그리 반갑지 않은 불청객인지라 옷깃을 더욱 여미고는 냉기가 못 들어오도록 안간힘을 써본다.


​오늘 아침 난 회사 통근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아버지께서 오토바이로 회사까지 데려다주셨다. 약 20여분이 걸리는 거리..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교통량이 많아져서 도로마다 번잡하기 일쑤였다. 나는 아버지를 바람막이로 삼아..^^ 뒤에서 얼굴을 쏘옥 감추어 찬 공기를 덜 맞으려고 안간힘을 써본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 덜덜거리는 아버지의 오토바이... 가끔 내가 늦장 부려 회사 통근 버스를 놓치는 날엔 아버지께선 이렇게 나를 회사까지 데려다주신다. 사실 오늘은 꽤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먹지 못하고 나가려는 나를 아버지께서 붙잡으시고는 밥 먹고 가라 하신다.

"아무리 건강해도 젊었을 때 건강은 지켜야 해. 아침밥을 안 먹는 사람보다 아침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사람이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산단다.. 그러니 밥은 먹고 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아침밥을 챙겨 먹고, 그렇게 아버지와의 아침 데이트를 시작했다.


덜덜거리는 아버지의 오토바이.. 바람을 가르며 좁은 비포장도로를 지나, 잘 정리된 포장도로로 지나갈 때면 좌우에 쭉 늘어선 느티나무들이 우릴 반기며 좋아라 한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이렇게 가끔은 숲 속 새들의 합창을 들으면서 회사로 가는 길...콧노래가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운동삼아 자전거 타며 회사 출퇴근한다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에이~~ 아부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녁에 이 길이 무서울 거 같아요. 아침엔 밝아서 좋은데, 저녁은 너무 어둡고, 길이 안 보일 것 같아요. 히히히" 난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회사 가는 길 약 15분 정도 달리면 반제리라는 마을을 끼고 강처럼 고요한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하얀 백로가 한 해에 42마리가 찾아드는 그곳 저수지는 풍경이 아름다워 낚시꾼들의 인기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연인들이 가끔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물안개가 저수지 표면에 낮게 드리워져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물안개의 색깔이 환하게 비추어 정말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물안개가 기이하게 저수지 끝 산자락 중간까지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놓칠세라, 나는 연신 와~ 하며 함성을 질렀다. 아버지께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실 뿐....^^


그 저수지 위를 한가로이 날아가는 백로 한 쌍..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고, 한 쌍의 백로는 그렇게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업체 전화로 씨름을 하고, 1층 반도체 칩 검사실에 내려가 커다란 방음유리창을 들여다보며 인원체크를 하고, 옆 커다란 컴퓨터실에 가서 체크할 건 체크해 가며,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 그날의 일을 시작한다.


한 참 일하고 있는데, 문득 우울한 기분과 함께 특정 대상이 없는 누군가를 끝없이 원망과 용서와 사랑이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가끔 아주 가끔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잠시 나를 괴롭히곤 하는데, 그때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나의 우울감과 패배감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려는 나의 비겁하고 무책임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나를 옭아매는 덫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 덫에 걸려있는 나약한 나 자신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관자..

전에는 하루에 수백 번 들었던 이 복잡한 감정이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아님 2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온다.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이다. ^^ 한참을 우울해하고 있는데, 같이 근무하던 한 여동생이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그 동생은 원래 말이 없고, 내성적인 아이라, 같이 있어도 거의 대화할 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뭔가를 가지고 와서는 내게 보이며 "언니~~ 이거 봐봐요." 하며 씩~~ 웃는 것이다. 뭐지? 하며 그 동생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다. 색도화지에 하트모양이 다섯 개로 가운데가 오려져 있었는데, 너무 이쁘기도 했지만 혼자서 뭔가를 열심히 오렸던 게 바로 이 다섯 개의 하트모양이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걸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는 그 동생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한바탕 크게 웃어보았다. 하트모양~~ 다섯 개... 그 하트모양이 날 보며 빙그레 웃는 듯 보였다. 우울했던 감정도 그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우울한 비슷한 감정이 막 밀려오려는데, 이 번에도 그 동생이 다가와서 아까 전에 그 하트모양의 색도화지를 가지고 와서는 다시 보여주는 게 아닌가.."언니~~ 이건 어때?" 하며 또 씨익 웃는 아이..^^ 아까 전에 그 다섯 개의 하트모양 밑에 해맑게 웃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순간 나의 맘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울하고 힘들어지는 순간.. 작은 행동, 작은 변화, 작은 찰나로부터 나는 어떤 희망과 위안을 찾고 싶어 몸부림을 치고 있는 한 인간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하루라는 소중한 선물이 저 산 넘어 녹아내리듯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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