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용사
아주 어렸을 적, 나는 코에 콧물이 흘러도 마냥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해맑은 미소.... 그 까만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았다.
다만 호기심 많은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상상력을 발휘해 혼자만의 세계를 그리곤 했었다.
이를테면, 아담한 마을을 휘어 감싸고 있는 저 산 너머로 미지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무구한 상상을 해본다든가, 혹은 저 산속에 나와 같은 또래인 사내가 하얀 요정 옷을 입고, 어깨엔 빛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어, 언제든 내가 원하면 날아와 같이 놀아줄 거라는 믿음을 갖는 상상을 말이다.
저 산 너머 미지의 세계가 어렸을 적, 내가 동경하는 곳이기에 언젠가는 저 산을 넘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기필코 정복하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푸르른 들판과 산들은 오월의 실록이란 이름에 걸맞게 그 위상을 떨치려는 듯, 푸른 잎들이 바람 따라 넘실거릴 때마다 햇살에 반사되어, 오월의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었다.
아직은 젖살이 물오를 다섯 살박이 꼬마였던 나는 짧은 단발머리에 통통한 볼 살이 봄 햇살에 익어 빠알갛게 달아올랐다. 아장아장 걸음을 뗀 지 만 3년이 되었을 때, 그 어느 날도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산 너머에 있을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다. 저 산속의 사내 요정을 함께 생각하면서 말이다.
까만 개미가 내 샌들 사이로 삐져나온 엄지발가락을 막 간지럼 태우고는 퀭하니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개미를 용감하게도 나는 작은 검지와 엄지로 덥석 집어 들어 올렸다. 발버둥 치는 요 작은 까만 개미를 보노라니, 아주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내 엄지발가락을 못살게 군 개미를 응징하려는 듯 말이다.
다시는 내 발가락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받아낸 듯, 얼굴엔 함박꽃을 해가지고선 너그러이 용서해 줄 양, 그 개미를 사뿐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개미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
나의 손등과 얼굴을 가리는 무법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무법자는 실실 웃으며 나의 놀잇감을 마구 뭉개기 시작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 까만 개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잠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극심한 공포와 슬픔에 까만 눈동자를 가린 채 난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보다 한 뼘이나 컸던 그 무법자는 한 살 어린 사내였고, 아주 아주 못된 눈망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나의 가슴팍을 나보다 커다란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이었다.
큰 소리로 외쳐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싶었으나 숨이 막혀서 아무 소리를 내지르지 못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커다란 나의 멋진 용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웃집 큰 오빠, 아마도 군대 가기 전이였으니, 못해도 십오 년에서 십육 년 연상이었을 것이다.
이현진... 나이가 아마도 그때 스무 살 정도 된 청년이었을 것이다.
현진오빠 동생인 윤진오빠... 두 살 터울 아래인 윤진오빠는 나만 보면 꼬맹이.. 땅콩... 울보... 코흘리개라며 놀려댔던 아주 싫은 오빠였다. 하지만 내게 달려와 준 오빠는 윤진오빠의 형인 이현진..
현진오빠는 동네 여자아이들보다 나를 무척이나 이뻐해 주고, 어린이날이나 내 생일이 되면 어김없이 집에 와서 선물도 주고, 함께 놀아주는 일등감 오빠였다.
이 세상에서 아빠 말고 그다음으로 제일 좋아했던 사람이었을까...
암튼 무법자로부터 피습을 당한 나에게 달려온 멋진 용사인 현진오빠는 숨이 턱까지 차며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그 무법자를 아주 멋지게 물리치고는 나를 번쩍 들어 안아주었다.
"왜 울 은영이를 때리고 그러니? 너 아주 못쓰겠구나.. 약한 애를 때리다니... 혼 좀 나봐야겠구나" 하며 우리의 멋진 용사는 적장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렸다. 그제야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무법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울면서 사라졌다.
만감의 교차가 오가는 가운데, 난 멋지고 잘생긴 현진오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단 채 환하게 웃었다.
"괜찮니? 많이 아프지? 오빠가 호~~~ 해줄게.. 울지 말고 뚝...^^"
자상한 아빠처럼 나의 손과 치마에 흙 묻은 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털어주고는 나를 번쩍 안고는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오빠가 유독 나를 많이 이뻐해 주는 관계로 동네 여자 또래나 언니들은 그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오늘따라 현진오빠의 얼굴이 더욱더 빛나 보였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가고있다.
어김없이 학교 갔다 돌아온 현진오빠는 아마도 대학생이었나 보다.
책가방을 마루에 놓기가 무섭게 오빠 집에 놀러 온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오늘은 꼬마 아가씨가 무얼 하며 놀았나요? "하며 커다란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에 앉히고는 부드럽고 굵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현진오빠의 가슴팍에 기대어 나는 새록새록 잠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잤었나? 눈을 막 뜨려고 하니.. 뭔가 따뜻한 물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울고 있었다.
내가 아니고 바로 오빠가 말이다.
나를 안고 있는 채, 오빠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들었다. 물론 눈을 감은 채 말이다.
"엄마! 저 다음 주에 입대해요." 뒤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입대가 뭐지?' 난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내 얼굴에 떨어진 오빠의 눈물을 오빠는 오빠의 굵직한 손으로 닦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오빠의 손이 너무나 좋았지만 슬픈 오빠의 목소리가 어린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입대가 뭔지는 모르지만 나쁜 사람인 것 같아서 혼내주고 싶었다. 말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 오빠가 아주 먼 곳을 가는구나 싶었다. 오빠가 먼 곳에 가다니... 그럼 나는 어떡하지?
눈을 뜨고,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빠.. 가지 마.. 나 오빠 없으면 못 살아.. 흑흑흑.. 가지 마.. 나도 델꼬가... 오빠..." 이렇게 칭얼대는 나를 현진오빠는 "곧 올 거야. 아주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오빠가 꼭 휴가 나오면 울 은영이 맛난 거 많이 사가지고 올게.. 알았지? 울지 마!~~ 뚝" 올 꺼라는 오빠의 말을 믿고, 곧 나는 울음을 그쳤다. 옆에는 내가 싫어하는 현진오빠의 동생인 윤진오빠가 나를 바라보며 울보라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윤진오빠와 싸울 시간이 없다. 현진오빠를 조금이라도 더 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서서히 현진오빠와의 작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대하기 전 날, 저녁달이 산 위로 한 뼘 올라왔을 때, 큰 언니는 나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미 밖엔 아이들이 나와서 놀고 있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현진오빠도 나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이 현진오빠를 보는 마지막 밤이었다.
현진오빠를 보는 기쁨에 나의 입에서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뽀뽀~~ 뽀~~ 뽀뽀뽀.. 뽀뽀뽀 친구~~ 어쩌고저쩌고..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그때 당시 좋아했던 mbc에서 하는 유치부를 위한 "뽀뽀뽀"라는 프로그램 로고송이었다.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는데, 저 멀리서 "우리 은영이 나왔네? 하하하"하며 달려오는 사람은 어김없는 현진오빠...
나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몸을 구부려 앉더니만 꼭 안아주면서 내가 부르는 '뽀뽀뽀'를 부르는 것이다.
뽀뽀뽀라는 노래 가사가 나올 때마다 내 볼에 뽀뽀를 해주는 오빠... 너무 간지러웠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빠의 뽀뽀는 기분이 최고였다.
"오늘이 울 은영이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네.." 하며 웃고 있는 현진오빠의 눈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너무나 자상했던 현진오빠... 이다음에 크면 꼭 현진오빠한테 시집갈 거라고 노랠 부르며 다녔는데,, 마지막이라니... 마지막이라며 비행기도 전보다 더 오랫동안 태워주고, 밤이 늦도록 업어주면서 놀아주었던 현진오빠... 그 마지막 날도 어김없이 현진오빠의 등에 잠들었다. 잠든 날 현진오빠는 집에까지 데려다주고는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허나 그 뒤로 현진오빠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어릴적 용사...^^
참고: 아이를 안고 있는 오빠... 이 그림은 세월호로 오빠를 잃은 여동생을 생각하며 태국인이 그린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