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를 동반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온다. 북동쪽 언덕 위에는 거세지는 비바람이 성이 난 듯 아름이 큰 백양 나뭇가지들을 어지럽게 뒤흔들어 놓고서는 풍성하고 푸른 나무 잎사귀들을 끝내 잡아채어 날려 보낸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잎사귀들과 미처 피하지 못한 작은 새들이 뒤엉켜 호로록 날아가버린다. 청솔가지가 뒤얽힌 솔밭 사이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지나갈 때마다 오래된 창 문짝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춤을 춘다. 30여 년의 세월을 담은 허름한 집은 한옥과 양옥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지만 파란색 양철 지붕아래 외벽은 금이가 임시방편으로 하얀 시멘트를 군데군데 발랐다.
그녀는 삐그덕 거리는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가 연로하신 부모님을 부른다. 온다는 소식도 없이 불쑥 찾아온 딸을 두 내외는 반가이 맞아주신다. 그녀는 환대하시는 부모님을 보는 순간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혀 혹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들킬세라 뒤돌아서서 손등으로 흔적들을 없앤다. 아무 예고 없이 감정들이 오르락내리락 요동치며 눈물 또한 허락 없이 볼을 적신다. "딸내미 왔네? 웬일이냐?"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콧구멍이 벌룽거리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식이 뭐라고 메마른 논바닥이 쩌억 갈라져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순간 단비가 내려 해갈하듯 아버지의 환한 미소가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다. 여든이 훌쩍 넘은 아버지의 힘없는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에 날려 흩날리고 중력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의 눈가와 볼살은 아래로 쳐져 세월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미소만큼은 어린 소년의 것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젊은 시절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악착같이 삶을 이어온 지난 일을 기억한다. 그녀가 여섯에서 일곱 살쯤 어머니의 손에 손글씨로 빼곡하게 쓴 편지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는 그 편지를 보면서 얼굴빛이 창백해졌고, 손에 들린 편지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지.. "하며 어머니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끝내 울기 시작하셨다. "엄마? 울지 마!" 하며 그녀는 작은 고사리 손으로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네 아부지가 탈옥을 하신단다. 이러면 안 되지... 아무리 우리가 걱정이 돼도 이러면 안 되지. 이렇게 원통한 일이 어디 있다냐.. 돈 없으면 이렇게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은 이 땅에 발붙이지 말란 거냐.." 하시며 어머니는 땅을 치며 괴로워하셨다. 몇 해 전 양계장을 같은 동네 사람들과 동업을 하셨는데, 그중 한 이웃 사람인 P 씨가 아버지와 다른 동업자 아저씨가 대신 보증을 서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P 씨가 돈을 갚지 못하자 보증을 서주신 아버지와 이웃 아저씨가 감옥을 가게 되셨다 한다. 처자식이 걱정되고 억울한 감옥살이에 원통했던 아버지는 편지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가 몇 달째 이어진 어느 날...
마을회관 두 평 반 남짓했을 방 한 칸에 추운 한겨울이 찾아왔다. 그 비좁은 방한칸에 여섯 식구가 잠을 청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코가 시려 두꺼운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덮어 냉기를 필사적으로 막아본다. 입김을 불어 허공에 내뿜으니 허옇게 퍼져가는 모양이 솜사탕처럼 보이다 이내 사라진다. 천장에는 성애가 하얗게 끼어 반짝반짝 빛이나 신기해서 한참을 관찰하다 이내 스르르 잠이 든다.
잠에 깼는지 아닌지 모를 상황.. 환각 상태? 에 빠진 듯 그녀는 잠꼬대마냥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린 그녀를 깨우려고 세차게 흔들어 보지만 그녀는 "엄마! 미안해!.. 흑흑흑.. "하며 다시 정신을 잃었고, 경주 자동차 두 대가 정면 충돌하는 환각을 보고 깜짝 놀라 환각에서 깨어나 또다시 "엄마! 미안해.." 하며 서럽게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는 엄마의 품에 안겨 집밖으로 빠져나갔고, 뒤이어 어린 두 동생들도 밖으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밤사이 연탄을 떼는 부엌에서 일산화탄소가 새어 나와 중독된 듯하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자다가 봉변을 당했을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들은 그녀에게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었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녀는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면 정수리 쪽에서부터 뒷목을 타고 내려가는 서늘함이 수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싹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찬찬히 연로하신 부모님을 바라보며 지난날의 일들을 웃으며 이야기한다.
세찬 비바람이 멈춘 듯 밖의 풍경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지난날의 일들을 곱씹어보니 그 시련들이 그녀에게는 또 다른 위로가 되는 거름이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네 인생사 날씨와 같아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있고, 잠잠하고 맑은 날도 있는 법.. 먹구름이 몰려온다고 두려워말고 구름 뒤 밝은 해를 볼 줄 안다면 힘든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디딤돌쯤으로 여기는 여유로움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