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로 여기저기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고, 경찰?군인?들이 무장한 채로 그들을 진압하는 뉴스가 연일 쏟아졌다. 초등학생 4학년인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교 세대였던 내 눈에 비친 뉴스는 왜 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피 흘려가며 시위를 하는 것일까? 당시 난 너무 어려서 그들의 저항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심은 이렇듯 공포와 두려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반면 외부의 소식이 거의 닿지 않는 내 고향 시골마을 풍경은 시간이 멈추어 있고, 길가에 강아지 한 마리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구경하기 바빴다. 요즘 들어 부쩍 훈련인지 모를 군인들의 이동으로 우리 마을에 주둔하는 일이 잦았는데, 어린 내 눈에는 그저 신기한 광경이었다. 여름철 장마시기에 저지대 보수작업은 필수였는데, 인력이 부족했던 터라 마을에 주둔한 군인들은 그 보수작업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보수작업에 필요한 도구가 부족했던지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 집에 군인 두 명이 와서 연장을 빌려가기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시각, 오후 1시쯤이었나? 내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허기진 상태라서 그런지 부리나케 집을 향해 뛰어갔다. 도착하여 집안으로 들어서니 여전히 엄마와 아빠는 집에 안 계셨고, 막내 남동생과 넷째 여동생이 왠 낯선 군인 한분과 방 안에서 밥을 먹고 있지 않은가? 동생들이 너무 어려서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를 설명을 못하자, 나는 어느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 낯선 군인 아저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군인 아저씨는 배가 많이 고팠던지 허겁지겁 동생들과 밥을 먹고 있었는데, 나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밥 한 숟가락을 뜬 채,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나를 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안녕? 배가 고파서 동생들과 밥 먹고 있었어. 허락도 없이 이렇게 와서 미안하게 되었구나?" 나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씩 웃으며 같이 밥 먹자고 하더니, 밥을 한 공기를 더 가지고 와서 나를 챙겨주는 모양새를 하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집주인 같았다. 집에 부모님도 안 계시는 데다가, 동생들이 흙바닥을 맨발로 돌아다녔는지 마루에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흙먼지로 뒤범벅이었기에 지저분해진 집을 낯선 사람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영 내 마음이 불편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밀한 면을 보여준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굳은 얼굴로 그 군인 아저씨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일단 배는 채워야 하기에 억지로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대었다. 반찬은 당연히 김치랑 고추장, 생오이.. 먹을 반찬도 없었는데, 이 아저씨는 당최 이 반찬들을 잘도 꺼내서 동생들과 밥을 먹고 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린 동생들이 군인 아저씨가 와서 배고픈데 밥 달라 하니 이것저것 꺼내서 손님 대접을 했던 것으로 들었다.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 이 아저씨한테 따지기로 했다. 그렇게 4명이서 밥을 아주 맛나게 먹고 나니(변변찮은 반찬이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군인 아저씨의 소개가 이어졌다. 현재 상병이고, 나이는 어쩌저구 저쩌고 사는 곳은 수원 어쩌고, 저쩌고.. 구구절절했다. 이제는 내 소개를 해보라고 한다. "내 이름은 정은영, 나이는 11살.. " 아주 짧게 소개하고 내 입은 굳게 닫혔다. 이 아저씨는 나와 좀 더 친해지고 싶었는지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고, 동생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군인 아저씨는 이 정도는 되... 음... 굿!
그제야 나는 군인 아저씨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짧은 머리에 이마는 여드름이 군데군데 피어있었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착한 아저씨야'하는 인상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동생들을 데리고 나간 군인 아저씨는 뛰어다니며, 놀아주기 시작했다. 숨기놀이, 땅따먹기.. , 동생들을 번갈아 가며 무등 태우기..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차츰 경계심을 내려놓았고, 어느새 내 입가엔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참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모습을 나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같이 놀자고 아이들과 그 군인 아저씨가 제안을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마을 중앙 넓은 로터리에는 군차량 한대가 있었다. 동생들이 군인 아저씨 곁을 떠나지 않고 매달리고 있을 때 마을 여기저기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얘들아? 차 한 번 태워줄게. 이리 모여봐"하니까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저나 왔다. "너도 가볼래? 태워줄게. 같이 가자."나에게 같이 가자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시큰둥하게 아이들이랑 같이 군인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아이들은 군차량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올라타고서는 신났던지 도떼기 시장처럼 시끄러웠다. 거대한 코끼리 등 마냥 거대해 보였던 군차량, 단번에 군인 아저씨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게 하였고, 아이들의 대장이 된 군인 아저씨의 얼굴에는 아이들처럼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루 이틀 지나고 3일째 되던 날, 그 군인아저씨와의 작별이 다가왔다. 그날도 군인아저씨를 보기 위해 아이들은 모여들었고, 마지막이기에 그 군인 아저씨는 아이들과 두 배로 더 많이 놀아주었다. 아이들과 헤어지는 시간이 다다르자, 일행이었던 다른 군인 아저씨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대장인 그 군인 아저씨는 내게 다가와"은영아? 며칠 많이 정들었는데, 많이 아쉽네. 나는 여동생이 없어서 네가 내 친 막내 여동생 같아. 내가 다시 또 올게." 아이들과 그새 정들어서 떠나기 아쉬운 모양인지 다른 군인 아저씨들은 짐을 챙기며, 군차량에 오르기 시작하는데, 이 아이들의 대장인 군인 아저씨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우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침하고 냉랭했던 내 마음도 왠지 어딘가 서운하고 아쉬움의 한 조각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1년여 후. 12살이 되고, 또다시 6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가방을 마루에 집어던지고, 놀이터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집에 얌전히 있어야 할 동생들이 없었던 것이다. 놀이터에 가까이 다다르자, 아이들의 "와....... 아저씨? 저도요"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누구지?' 하며 의문을 품고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아이들과 뛰어놀아주는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대장? 군인아저씨?'
하지만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어서 잠시 그 대장은 아닌 것 같았다. '에이 설마...' 나는 동생들을 부르며 집에 가자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뒤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여드름 투성인 그 대장은 없고, 말끔하게 생긴 아저씨가, 정확히 말하면 그 대장이긴 한데, 달라진 아저씨를 바라본 나는 흠칫 놀랐다. "은영아? 잘 지냈어? 이 아저씨가 약속 지켰다. 다시 온다고 했잖아." 하며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짓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반가운 마음인지 아님 어딘가 숨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 복잡한 감정이 내 마음에 울렁이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저씨는 반갑게 다가와 내게 인사를 하는데, 나는 모른 체하며 동생들을 불러 빨리 집에 가자고 재촉하였다. 그 대장은 양손에 동생들 손 붙잡고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진 않은 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 집 마당에 도착하고 마루에 걸터앉은 아저씨는 군복이 참 잘 어울렸었는데, 사복을 입으니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오빠가 없는 나는 이 아저씨가 우리 큰 오빠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난 약속했다. 다시 오겠다고." 하며 나에게 말을 건네며, 무엇이라도 확인을 받고 싶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하며 짧은 대답에 그 아저씨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건 아닌데, 거기서 "네"가 뭐지?
한 참을 그렇게 둘이서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저씨는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나는 빤히 아저씨를 쳐다보고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나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다. "여기 이 마을은 참 이쁘고, 정겨워. 이곳에 훈련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을 때, 첫눈에 반한 동네였다니까. 이 아저씨가 언제 이곳을 다시 찾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은영이도 커서 이 아저씨가 몰라볼 수도 있겠지?" 하며 커다란 눈을 지그시 감고, 부드러운 바람을 몸에 맡기며 누웠다. 산 뒤로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예쁘게 들려,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
그 모습이 그 대장을 보는 마지막이었다. 처음 낯선 군인 아저씨의 방문이 내겐 불편했었는데, 어느새 이 아저씨가 누구인지 궁금해졌을 만큼 나도 정이 들었었나 보다. 말없는 내성적인 아이와 어떻게 하든 친하게 지내고 싶어 노력을 하는 아저씨의 진심이 나에게 닿았던지, 이제 오늘이 지나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로 인해 어린 소녀의 마음에 깊은 우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뒷동산에서 들려오는 산뻐꾸기 소리가 오늘따라 구슬프게 들리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그렇게 잠시 다시 만나서 반가웠던 대장인 군인아저씨는 해가 저물어서야 마지막 인사를 우리에게 건네며 되돌아갔다.
어린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간 아저씨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