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주량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합니다.

by 정은영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피해 잠시 집에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올여름은 슈퍼 엘리뇨란다. 극단적인 기후현상은 사람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에 온 인류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실시간 날씨 소식에 귀 기울인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재난 앞에서 인류는 겸손해진다.

자연의 사춘기가 어디 우리네 맘과 같을까? 무튼 후덥지근한 더위를 식히고 에어컨을 틀...지 못하고, 선풍기 앞에 내 얼굴을 맡겼다. 그게 아니면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다시 선풍기에 맞절을 해가며 여러 번을 반복했나 보다.

눈동자가 초점을 거의 잃을 무렵, 요란스러운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엄마? 왜?" "왜긴.. 오늘 집에 들른다고 하지 않았어?" 맞다.. 그랬다. 자식들과 두내외 먹을 만큼 정성스럽게 키운 감자를 캐놓았으니 가져가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감자 오늘 가져간다고 네 아부지가 그러던데? 왜 안 오니?"

"알았어. 갈게." 간다고 하고 전화를 끊은 시각, 땅거미가 지기 2시간 전.

그래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다녀오리라 마음을 다지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 운전면허가 있으면 뭐하나. 남편님께서 차를 빌려주지 않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년 봄에 운전면허를 따고, 2주 전에 시어머님 경차를 시범 삼아 잠깐 1km 운전했던 게 전부인데, 차를 남편님께서 빌려준다 한들 나는 못한다.

나의 운전면허는 잠시 지갑에 모셔두고, 보다 더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나을 것이다. 모범운전하시는 택시기사님께 나의 안전을 보장받고, 친정집을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한적하고 아담하고 예쁜 마을.. 택시 기사분들이 친정집 마을을 들를 때면 한마디 꼭 하신다. "마을이 참 이쁘고 아담하네요." 그랬는데, 20년 전 송탄 IC 8차선 도로가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게 되면서 삭막해져 갔다. 설상가상 20여 가구가 사는 아담한 마을은 하나둘 떠나 현재 10 가구 채 살지 않은 휑하고 쓸쓸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현재 떠난 빈집 대신 그 자리에 공장들이 들어서 그 옛날 인디언 원주민들이 쫓겨나 소유지를 잃어 자취를 감추듯 내 고향 마을은 그렇게 서서히 옛 추억으로 간직하게 돼버렸다.

그래도 과수원밭은 끈질긴 몫을 다하고 있다.


"엄마? 둘째 왔어." 집안으로 들어가니, 엄마 대신 아부지의 눈과 마주쳤다. "왔어?" 아버지의 짧지만 반가워하시며 웃으시고는 "둘째 딸내미 왔어." 하며 부엌에 계신 엄마를 부르신다.

거실에 셋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던 막내 여동생도 거실에 나와 참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갈지자를 긋고, 삼천포를 지나, 어느덧 아버지의 주량에 이르렀다.

"은경이는 술 잘 못 먹잖아?" 아버지가 막내딸에게 물으셨다. "아부지는 참.. 내가 술은 남자들보다 더 잘 마셔요. 큰언니랑 내가 아마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마실걸요?" 아마도 막둥이 여동생과 큰언니의 주량은 3-4병일 것이다. 것도 나이 들어 많이 줄어들었을 뿐...

"아빠 주량이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막내 여동생이 되물었다. 그때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주량 미스터리가 시작되었다.

슬슬 시동 거는 아버지의 콧평수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기를 반복하더니, 아버지는 끝내 군대,, 그러니까 60년 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말씀하시기 시작하기를 3분이 지났나? "그래서 아부지..? 주량이 어떻게 돼요? 듣기론 소주 궤짝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군대에서 장물들을 팔아서 그 돈으로 소주를 샀는데.. " "아하.. 아부지? 그래서 그때부터 술을 배우신 거예요? 아니면 군대 가기 전에 배우신 거예요?" "아니지, 군대 가기 전에는 술을 입에도 못 댔어. 군대 가서 내가 하는 일이 소위 군납품을 관리하는 건데, 거기서 얻은 수익이 있을 거 아니야? 지금은 불법인데 그때는 다 그랬어. 그때 돈 받고 받은 돈은 내가 같이 온 애들 나눠주고, 윗사람들한테도 나눠주고 그랬지."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돈으로 소주 궤짝을 사서 드셨다는 거죠?" 나는 재차 장난기가 돋아 중간중간 아버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옆에 키득키득 웃고 있는 막둥이는 배꼽을 부여잡고, 내 등을 치기 시작했다. 아부지는 끝내 주량을 밝히지 않으셨다. 술을 정말 잘 드셨다는 것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군제대하시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바로 술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들었고, 현재 술을 못 드신다. 울 아부지는 여태 술을 입에 대신 것을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평소 아버지의 주량이 궁금했던 터라.. 정확한 정보를 얻어볼 심산으로 시작된 아버지의 주량은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졌다.


아버지께서는 옛날 군대 생활하시면서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군동기들과 나눴던 대화를 세세히 기억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팔순의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기억은 나보다 더 또렷하신 것 같다.

"아부지? 그래서 아부지 주량은 말씀 안 하시게요?"나의 질문에 "얘는.. 참.. 소주 18병이야." 주량이 18병?

이 말씀을 하시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시고,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있으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미스터리 주량은 아버지의 옛 군대생활에 있었던 일들을 말씀하시기 20여분이 지나 알게 되었다.


나의 주량은 가만히 있어보자.. 20대 시절 제일 많이 마셔본 것이 소주 4잔... 그리고 뻗었던 기억.

지금은 많이 마시면 3잔이다. 흠... 소주와 난 안 친한 걸로.

그렇게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 2시간이 지났다. 야간근무하시는 남편님이 새벽 3시가 넘어야 들어오시기에 나는 얼른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짓궂은 딸내미의 장난을 다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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