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한국인 회사에서 뛰쳐나오며 다시는 한국계 회사에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여기저기 입사지원서를 보냈다. 다행히 2달 만에 면접을 통과해 오라는 곳이 생겼고 첫 호주회사에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출근했다. 회사 리셉션에 이름을 말하고 첫 출근이라고 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곧 부서 선배가 내려와 나를 부서로 데려가 소개를 하고 자리로 안내해 줬다.
잠시 멍하게 앉아있다가 컴퓨터를 켜고 선배가 준 오리엔테이션 안내서에 따라 로그인을 시도했다. 회사 인트라넷과 웹사이트를 둘러보고 있으니 상사가 와서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여러 부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스몰 토크를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다. 나에겐 아직 힘든 영어로 하는 스몰토크는 주제가 어디로 튈지 몰라 온 신경을 쓰면서 듣고 있어야 해 벌써 지쳐버린 것 같았다. 각자 나가서 먹는 점심이라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시키고 커피와 함께 먹으니 혼자라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왔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을 하니 저녁을 먹을 입맛이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모두들 친절했으나 나만 이방인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더 힘들었던 거 같다. 하지만 특유의 적응력으로 한주도 되지 않아 익숙해지고 호주 직장생활과 전에 다녔던 한국회사에서 직장생활의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1. 상하관계 - 호주는 미국보다도 더 자유롭다. 이사들조차 그냥 이름으로 부르며 친구같이 인사한다. 나중에 호주 국방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때도 같이 일하던 군장교들과 이름으로 서로 불렀다. 물론 업무 분장과 직급은 명확하나 업무가 다를 뿐이지 내 위치가 위나 아래가 아닌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당시 내가 주로 하던 문서편집은 100% 나에게 맡겨 주었다. 상사나 선배들은 자신의 업무를 하며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해 주었고 제일 낮은 직급이었던 나에게도 항상 귀를 열고 의견을 들어주었다. 솔직히 선배, 상사란 개념조차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상사는 나의 매니저로 매니저 업무 중 하나로 나를 관리할 뿐 내가 일을 열심히 잘하고 있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물론 내가 내 일에 만족하는지, 행복한 지도 주기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 같았다.
2. 직급에 따른 출퇴근 시간 - 예전 한국에서 신입 생활을 할 땐 할 일이 없어도 상사의 퇴근을 기다리며 8시 심지어 12시에 퇴근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부서에서 가장 낮은 직급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상사랑 선배들은 나보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에 가라고 종용했다. 바쁘게 일하는 선배들과 상사를 보며 차마 일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네가 오늘 해야 할 일을 다했으면 휴식을 위해 집에 가야 해. 우리는 우리 직급에 맞는 일과 임금을 더 많이 받고 있으니 당연히 더 많은 책임감과 일을 해야 할 뿐이야. 너는 그럴 필요가 없어'라고 했다.
정말로 이사급들이 가장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고 있었다. 직급이 올라가며 임금뿐 아니라 일도 많아지는 것이 당연한 합리적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매일 뒤에서 컴퓨터로 TV 프로그램을 보거나 졸고 있던 당시 한국회사 상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을 때라 처음에는 조금 충격이기도 했다.
3. 사무실 복장 - 호주 직장에서 전반적으로 좀 더? 많이 ㅋㅋㅋ 캐주얼 복장인 것 같다. 물론 내가 경험한 곳들이 특히 더 캐주얼한 교육과 정부기관이어서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다. 멜버른은 검은색 복장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아침 출근길 기차역에서 나오는 많은 직장인들이 위아래 검은색을 입고 있어서 처음에는 조금 우울하기도 했다.
처음 따뜻한 케언즈에서 온 내가 멜버른에서 느낀 추위는 그 검은 복장들과 더불어 더 춥게 느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나의 출근 복장도 검은색 바지와 정장 재킷이 주를 이루었다. 보통 재킷은 사무실 의자에 걸쳐놓고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출근을 해서 사무실에서 힐로 갈아 신고 재킷을 걸치고 일을 했다. 특히나 회의가 있으면 모두들 부산스럽게 힐이나 구두로 갈아 신고 재킷을 들고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정장과 힐을 신고 출근해 사무실에서 슬리퍼와 카디건으로 갈아입던 나의 한국 직장생활 경험과 정반대인 것이다. 하긴 변덕이 죽 끊듯 하던 날씨와 걸을 일이 많은 멜버른 시내에선 편한 복장을 할 수밖에 없고 사무실 밖에서 남 눈치를 보지 않는 호주인들의 성향상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단 사무실에서는 오히려 전문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에 힐과 재킷이 필요하고.... 하지만 한국에서 흔히 보던 미니스커트에 가까운 치마길이나 딱 붙는 불편한 정장을 입는 사람들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일상에서도 편한 것을 가장 중시하는 호주인들의 성향을 볼 수 있다. 내가 살던 동네는 그리스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고 대부분 큰 정원에 과실수와 채소를 키우고 있었다. 아주 부촌은 아니지만 (부촌은 바닷가 쪽과 학군이 좋은 쪽에 몰려있다) 그 큰집들은 땅크기만큼이나 비쌌으나 그 집들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특히 일요일마다 선데이 마켓으로 변하는 동네의 공영주차장에 나가보면 모두 다 허름한 옷에 슬리퍼를 신고 커피를 손에 들고 중고물품이나 근처에서 생산된 과일이나 야채를 사고 있었다. 구멍이 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낡은 신발도 편하면 그냥 신고 다니는 그런 분위기이다.
단 교회 예배를 보러 갈 때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 또는 연극을 보러 갈 때는 정장이나 드레스를 입는 등 장소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다. 매일매일 집을 나설 때마다 정장과 화장을 완벽히 하고 비싼 가방을 드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서 인지 가끔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프랑스 출신인 남편은 그래도 깔끔히 정돈된 한국사람들이 낫다고 하나 난 편하게 입는 호주인들이 좋아 보인다. 아마 다른 사람 시선을 견뎌야 하는 한국이 난 아직 힘들어서 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