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학교 스탠딩으로 부를 수도 없는걸요.
초등학생이던 내가, 친구와 친해지기 위해 은밀하게 꺼내 들었던 히든카드는, 방과 후에 친구를 스탠드로 부르는 것이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웅웅 맴돌던 학교는, 아이들이 모두 떠나자, 고요를 넘어선 적막만 흘렀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부유하던 운동장에는 애들이 먹기 싫어 던져놓은 흰 서울우유가 종종 터져있었다. 나와 친구는, 스탠드 계단 세 번째 줄 정도에 앉아, 같은 방향으로 교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담담하게 그 당시 제일 치부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털어놓았다.
11살이던 내게, 가장 아픈 기억은, 엄마, 아빠가 내 6~7살 기간 동안 별거를 하였으며, 그래선 그동안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고학년이 되어, 이제 학교에서 언니오빠의 역할을 해낸다며 으스대는 시기였지만 역시나 엄마아빠가 전부였다. 엄마, 아빠가 없어서 몹시 괴로웠단 얘기를 하며 나도 울고 친구도 울었었다.
나의 첫 스탠딩 친구는 J였다.
1학기 도중 전학을 온 J는 반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그려야 하던 미술시간에 대뜸, 내 얼굴을 그려서 보여주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하굣길을 함께 하지 않았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도, 하굣길이 주는 의미는 어마어마하다.) 서로의 집에서 놀아본 적도 없었지만, 그 시간 이후 나는 J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일종의 구애하는 비둘기 같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내 그림을 그린 데에는 큰 뜻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전학 온 후 내가 제일 말을 많이 걸어주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우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지만, 현재까진 서로의 경조사를 챙겨주고, 종종 안부를 묻는, 가끔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다.
요즘 내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지난 7월 여름 장마철 호기롭게 '나는 날씨요정'이라며 우산 없이 요가를 하러 가다가, 무자비하게 내리는 비을 만나서, 인스타에 '와 우산 없는데'를 올렸었다. 그 스토리를 보고, 집에서 우산을 챙겨 내 손에 쥐어준 분이 있었다. 그 우산이 없었다면 쫄딱 비를 맞은 생쥐 꼴로 출근을 했어야 했을 거다. 정말 아찔하다.
새삼, 요즘따라 친해지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탠딩으로 불러낼 수 없기도 하고. (지금 스탠딩으로 나오라고 하면 겁부터 날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대뜸 비밀을 고백해도 괜찮을까?
워크숍 3일 차. 진이 모두 빠진 오늘, 간신히 인요가를 찾았다.(힘들 때마다 인요가를 약처럼 간구한다.) 간간히 코를 골다가 마지막 사바사나 도중,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배에서 뭉근하게 올라오는 따뜻함 같은? 어렴풋이 눈을 살포시 떴다가 내 옆에 있어주는 그녀를 보았다.
나도 그녀가 힘들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그마저 어렵다면, 오롯이 받아서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라도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