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과정은 길지만 충돌하는 것은 일순간이다.
나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지구의 자전을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새 저녁을 맞이하는 것처럼 무엇이든 서서히 변해간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막연한 믿음에 마음을 놓는다. 그러니까 나의 안주함은 중력의 작용과도 같다. 오직 변화만이 변함없을 뿐인데 말이다.
동네의 익숙한 풍경 속, 길거리에 있는 계란 직판장과 어려서부터 심부름을 다니던 정육점, 역 근처에 자리 잡았던 전집이 사라진다. 그것들을 평소에 감사히 여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있어줘서 감사했고 덕분에 내 삶의 채도가 더 맑았음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있어주었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내 주변에 머무르던 사람이 부재하는 것보다 더욱 크게 와닿고 슬프기까지 하다.
떨어지는 과정은 긴 반면, 바닥에 충돌하는 것은 일순간인 것과 같이 항상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퇴근 후 귀갓길에 저녁 장을 보기 위해 들른 정육점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10여년 간 내게 작용했던 중력의 실체를 한 순간에 느껴야 했다. 우리 부부가 사랑했던 곳, 우리 부부 곁에 있어줘서 감사했던 곳이 또 하나 사라진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의 비가역성이 작용하는 것과 같이, 무언가 생성되었고 있어 왔던 것은 없어짐과 사라짐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무언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이 일에는 예외가 없으며 거대한 메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가 고민이 되는 것이다. 최근의 글에서 아내와 결혼 이후의 삶은 여행과 같다고, 누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 바가 있다. 삶을 누린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화하는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나의 순간순간은 시간의 단면이라고 생각할 제,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은 내가 유약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중하고 익숙했던 것들을 보내주는 연습이 필요한 것인가 라고 생각해보았을 때는 내가 과연 이별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글픈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변명을 하기에 나는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다. 익숙한 것이 사라져서 생긴 공백에 공허함만 채우는 것이 서글픔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나는 무엇을 해야할 지 알 것 같았다. 공백에 가득찬 공허함이 공명하여 생긴 메아리가 마음을 가득 채우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들어박힌 것이 빠진 자리에 생긴 공백도, 그 공백 안에 생긴 공허함도 내가 속한 거대한 흐름에 맡겨 흘려보내는 것이다. 내가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나는 그 흐름을 이용한 안식을 찾기로 했다. 마치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고민과 방황이 흘러흘러 저 멀리 가는 것을 보며 그것들이 호시절의 추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흘러간 것들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나는 언젠가 더욱 상류에 가까운 곳에 다가가서 그것들을 돌아봤을 때 그것들을 빛나는 유리구슬같이 여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훗날 강물이 시작되는 곳, 더이상 거슬러 오를 곳이 없는 삶의 종착지에 다다라서까지.
아내와 결혼하여 보내는 삶은 여전히 거슬러 오를 길이 한참이다. 우리가 삶의 전반을 다시금 되돌아볼 때, 그러니까 수십년 지나고서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저 멀리 흘러 가는 정육점을 보고서 '신혼 때 자주 갔던 정육점에서 정말 많이 사먹었었지, 거기서 산 차돌박이로 샤브샤브를, 항정살로 덮밥을, 삼겹살로 제육과 보쌈을 해먹고 육회도 많이 사먹었지.' 라고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중력이 작용하는 과정에서 느끼지 못했던 변화가 갑작스럽게 이별의 형태로 다가왔고 그에 따른 충돌은 나와 아내의 마음에 큰 공백을 남겼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가슴 아팠던 소회는 이렇게 나의 밭은 비문(碑文)을 남김으로써 흘려보낸다.
- 2024년 8월
이전하는 정육점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