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가다.
파도가 해안에 이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연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 사람과 서로 사랑하게 된 지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많은 욕심이 일어난다.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그런 욕심. 언젠가 이 해안에 파도가 찾아오지 않는 그날까지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었다. 하늘은 푸른색이었고 바다는 너무나도 넓었다. 나는 눈을 감고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욕의 갈증에 침전된다.
"바다다!"
바다였다. 2022년 8월 초의 바다. 만난 지 두 달을 갓 넘긴 나는 연인과(지금의 아내) 처음으로 여행을 왔다.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보건대 이 첫 여행은 지금까지 우리가 간 모든 여행 중에서 가장 소박하게 다녀왔음에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점차 그 당시의 기온과 가까워짐에 따라 나의 눈엔 실제로 비치지 않는 경포의 바다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KTX를 열심히 타고 강릉에 내렸다. 우리의 행선지는 스카이베이 경포였다. 아마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4성급 호텔 투숙이었던 것 같다. 호캉스를 많이 다녔던 연애 시기라서 4성 호텔에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훌륭했던 호텔 컨디션에 기분이 좋았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환복이었다. 이곳에서 기대한 것은 루프탑 수영장이었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수영복으로 환복한 나와 아내는 쪼르르 엘레베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성수기답게 많은 사람들이 수영장을 찾아왔다. 스카이베이 경포는 연인들에게나 가족에게나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시설이 깔끔하고 수영장도 매우 넓찍했으며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경포대의 풍경이 너무나도 멋졌다. 아내와 나는 처음 서울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온 것 자체에도 매우 들떠있었다.
한참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긴 뒤였지만 바다까지 온 김에 해변을 밟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나 아내나 해수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소금기를 씻어내야하고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붙어나오는 모래들을 털어내는 과정이 몹시 귀찮기 때문이다. 물놀이는 바다가 보이는 인피니티풀에서 하는게 단연 가장 좋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 당시를 떠올리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때가 바로 이 때다. 아내와 함께 호텔 주변의 길거리를 돌아다녔던 이 때. 사실 대단히 특별할 것도 없는 길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기분은 왠지 모르겠지만 삶에서 느꼈던 해방감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마치 세상에 나와 아내만이 남겨졌는데, 그것이 온전히 우리를 위한 선물같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내를 뒤따라 가면서 익숙지 않은 동네의 낯섬과 아내와 둘이 남겨졌다는 벅찬 기분에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냥 우리는 저녁에 마실 주류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것이었음에도 낭만적인 음악이 배경에 깔리는 듯 했다.
관광지의 물가가 당연히 싸지는 않다. 하지만 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여행 온 기분에 세를 낸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둘 다 갑각류를 참 좋아하는데 대게 내장을 한 숟가락 떠먹을 때마다 깊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성수기의 강릉이라 그런지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여름 휴가를 즐기러온 관광객들로 거리가 붐볐다. 거리 곳곳에서 파티 음악이 큰 소리로 뿜어져 나왔으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불빛에 마구 휘날리는 듯 하다. 흥이 잔뜩 오른 아내는 둠칫둠칫 춤을 추며 거리를 걸었다. 나는 골이 깊게 파일 정도로 함박 웃음을 지으며 아내를 바라본다. 그저 이 사람과 낯선 곳에 와 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있나?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나의 기분에 반문을 해보았다. 의심은 아니었다. 다만 신기했다. 이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함께 있는 공간이 나의 삶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째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 장마 기간이었지만 강릉에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다. 아내와 함께 일찍 일어나서 아침의 해변을 산책하는 것은 정말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 무엇도 수평선에 닿는 나의 시야를 가로막지 못했다. 푸른 해원을 바라보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 같이 걸으면 걸을수록 꽤나 긴 경포대 해안도 짧게 느껴졌다.
아내와 첫 여행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와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데도 빈틈없이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은 저마다의 우주를 가진 만큼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안전한 거리를 확보해두고서 관계를 가져왔는데 아내와는 달랐다.
나와 아내는 마치 딱 들어맞는 퍼즐조각처럼 모든 것이 잘 맞았다. 나는 혼자일 때 홈이 이리저리 파인 불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아내와 함께 있을 때 아내로 그 홈을 메우고 빈틈을 채우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불안도 부담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파도가 해안에 다다른다. 나는 옆에 나란히 앉은 연인을 바라보았다. 애욕의 갈증에 침전된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아보았다.
"누나, 우리 내년엔 어떤 모습일까?"
"글쎄, 결혼했을까?"
"그러면 좋겠다."
어디서부터 불어왔을지 모를 바람이 바다의 향을 싣고서 콧잔등을 간지럽힌다. 나와 아내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했으려나. 그러면 좋겠다.
1년 뒤 여름, 아내와 나는 손을 잡고 같이 걷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맞춰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걸었다. 파도도 없고, 바다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왠지 소금기 머금은 바람의 기억이 콧잔등을 스쳤다. 문득 의아함을 느낀 나는 나지막히 아내를 불렀다.
"누나, 작년에 우리 강릉 갔던 거 생각나?"
"당연히 나지. 우리 첫번째 여행이었잖아."
"그치? 오늘따라 생각이 많이 나네."
- 첫번째 여행을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