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가 온다. 그간 숱하게 내려온 비와는 어딘가 달랐다. 비가 머금은 습기도, 비를 감싼 공기의 온도도 이전과 다른 것이었다. 이 비에는 가을이 타고 있다. 비가 오는 것처럼 가을이 오는 것이다.
공기가 차가울 수 있다는 것이 어째서인지 생경하게 느껴진다. 차가운 바깥 바람에 몸을 오들오들 떨었던 것이 반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지난했던 3, 4개월 사이의 시간 동안 공기가 차가울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다. 내가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인지, 인간이 원래 기억이 단편적인 존재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여름이 지나가는 것은 많은 변화를 내포한다. 이제 외출할 때 얇은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을 필요가 없음을 의미했다. 또한 짙은 녹색의 나무들이 그 풍성함을 잃고서 거리의 쓸쓸함을 연출할 것이다. 그리고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사물로서,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비록 1년이라는 시간의 기준이 인위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기준 삼아 삶의 기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사람으로 사회화되어 살아온 이상 인위적인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무언가가 끝나갈 때는 지난 날을 돌아보기 시작할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름을 보냈다고 해서 한 해가 다 간 것처럼 벌써 송년을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자면 마음이 씁쓸한 일이다. 그러니 여름이 지나갔다는 것보다 가을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가장 좋은 이유는 하늘이 푸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푸르고 맑은 하늘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를 보고서 하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마치 하늘의 푸름 한 방울이 똑 떨어져 내 곁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를 썼고 시집을 냈다. 그러니 가을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엔 시원한 아침과 저녁 공기, 그리고 맑은 바람이 귀를 지나며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넘겨준다. 청청한 햇빛이 이마에 쏟아지면 나는 그 빛을 모아 노랫말을 붙여주고 싶다. 별은 빛을 노래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여름이 길어지는 만큼 그러하다. 여름과 겨울이라는 고래 사이에 껴서 점점 압축되고 있는 가을은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찬란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모처럼 온 가을이 금방 돌아가는 것처럼, 모란을 기다려온 것처럼 나는 깊은 아쉬움과 설움에 휩쌓일 것만 같다.
그러니 가을의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야하겠다. 사시사철이 다른 이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지금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살 때인 것이다. 감사하게도 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닮은 아내가 곁에 있는 지금, 나는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다시금 맞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삶에서 감사할 것들이 많아 충만함을 느낄 때면 그때서야 행복함을 느끼곤 한다. 마치 가을이 오는 것이 너무나 반가운 것처럼, 가을 하늘의 청명함에 온 몸이 잠기었으면 좋겠는 마음처럼. 비를 타고 오는 가을이 머무르는 동안의 시간이 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