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방금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한 나는 제주를 떠나 이륙하는 비행기를 말 없이 바라본다. 2박 3일의 출장 일정으로 온 제주도는 왜인지 관광지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역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인가보다. 놀러왔을 때는 도착만으로 벅찬 여행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업무를 위해 오니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삶을 전부 여행으로 생각하면 좋으려나. 하지만 일은 일이다.
2박 3일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챙겨온 나의 짐은 백팩 한 개였다. 간소한 짐이었지만 늘 충분하다. 이 일정동안 가장 챙겨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연히 아내일 것이다. 모든 물건들은 아내와 함께 있으면 구할 수 있지만 그 명제의 역이 성립하지 않는다. 집에 아내를 혼자 두고 나오니 나 역시도 혼자가 된 것만 같았다. 사람의 숲속에서 혼자임을 느낄 일이 이젠 없을 줄 알았는데, 오랜만이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느낌이다. 수학여행인 만큼 아이들은 신이 났지만 앞으로의 일정과 무사고에 대한 압박이 느껴지자 그만큼 더욱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제주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려 적잖이 당황했다. 첫 일정이 해수욕장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쌀쌀한 날씨에 학생들이 혹여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여행지에서 아픈 것만큼이나 곤혹스러운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문득 사람과의 만남도 여행 과정이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살면서 많은 인간관계를 가지지만 연애 감정을 가지는 관계만큼 모순적인 것이 없다. 가장 특별한 관계이면서 가장 위태로운 관계니까 말이다.
관계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처럼 늘 두근거림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상대를 처음 인식한 순간부터 느껴진 것이든, 익숙한 상대와 어떤 계기로 인한 것이든. 그리고 손을 처음 잡게 되는 순간이면 당장이라도 밤하늘에 뜬 별들이 나에게 밝게 빛나며 쏟아질 것만 같다. 그렇게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가 되지만 그 관계엔 구멍이 많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우면 서로가 가진 이면을 발견할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그리고 상대와 나의 다름을 실감하고 그 격차를 절감하게 되면 깊은 해구에 빠져 잠기는 것과 같이 마음이 짓눌린다. 그러다가 해구의 바닥에 닿아 그간의 앙금과 상처의 부산물들이 퇴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관계의 지속을 위한 시도들은 모두 거울에 있는 나와 악수를 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절름발이와 같은 관계를 정리하고도 사람은 다시 밤하늘의 별을 당길 두근거림을 찾아나선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마치 극의 막이 오르고 잘 준비된 무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햇빛을 받은 바다는 아름답게 빛이 난다. 그와 같이 연애감정을 가진 관계의 끝이 항상 깊은 해구에서 수압에 짓눌리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단 하나의 경우의 수가 있었다. 더 넓고, 더 멀고, 더 따뜻한 곳을 바라보는 하나의 경우의 수 말이다. 아내와의 연애는 정말이지 여행과 같았다. 대단히 날씨가 좋고 가는 곳마다 아름다웠던 여행처럼 나는 연애 중에 해구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할 만큼 늘 즐거운 시간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렇게 즐거운 시간들도 지금 돌아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나의 뇌는 어떻게 된 것인지 결혼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하지 못한다. 아내와 결혼을 한 이후로 한동안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미련 없는 삶을 굳이 기억하고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아내의 관계는 항상 단계마다 그 천장을 두드렸다. 우린 동료로서의 관계에 정상에 닿았고 산을 오르며 우리가 가질 새로운 정상이 어딘지 찾아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 관계에서 역시 일찍 그 정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찍 가진 서로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우리의 행복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내와 처음 살림을 같이 합친 날부터가 내 기억의 출발점이다. 자연적 망각에 의한 결과로 내 삶의 기억은 아내로 충만하다.
새로운 여행을 이어나가던 와중에 이렇게 업무 출장을 오니 그 여행에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틀 간의 구멍은 물론 삶의 과정에서 너무나 작은 것이지만 당장 마주하기에 그 지름이 너무나도 커보였다. 특히 아내와 연락을 하면서 더욱 그 공백이 느껴진다. 내가 없으니 집에 들어가는 것도 의미없는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집을 떠나온 나는 모래뿐인 사막에서 헤매는 것과 같이 마음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아내와의 여행 중에 이탈한 것만 같았다.
떠도는 마음과 같이 방황하던 중에 어느덧 일정이 끝이나고 서울로 돌아왔다. 제주를 떠나면서 나는 창 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찾는 것은, 아쉬운 것은 제주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려는데 그때부터 문득 설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된 일정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시 조각조각 맞춰져 비단결의 부드러움을 연상케 한다. 점차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그러하다. 나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려는 듯하다. 나의 여행은 타지가 아닌 아내가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이러니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나에게 여행길이었다.
이윽고 동네에 도착하여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약속한 식당을 찾아갔다. 조금은 경사진 오르막길에서 나는 두리번거린다. 당장 생각해봐도 이제 15초만 있어도 아내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슴의 떨림이 손끝에 쥔 아내의 선물까지 전달되는 것 같다. 어디 있을까, 이틀 간 서로에 대한 결핍으로 시들 것만 같았던 나의 절반은.
해가 길어져 저녁도 이른 저녁같이 가벼운 기분으로 즐기고자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유난히 사람들의 강처럼 많은 사람들이 흘러 다니는 가운데 나는 강 한 가운데 박힌 돌부리처럼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 어디서 떠내릴 지 모르는 한 송이 꽃을 찾는 것처럼 목을 길게 빼고 애타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떠본다.
곧은 길을 따라 위쪽으로 고개를 들자 서로 멀리 있는데도 한 눈에 알아본다. 분홍색 꽃들은 이미 다 시들었던데 아내는 혼자 피어있다. 그리고 부드럽게 흐르는 물에 실려오는 것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점차 속도를 높이고 발과 발을 빠르게 교차한다.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 한 발자국마다 지난 우리의 결핍을 흘렸고 그것은 맑은 물에 씻기어 사라져 갔다. 멀리서부터 망설임 없이 곧게, 나에게 다가오는 아내를 바라보며 문득 마음이 벅차다. 벅찬 마음이 눈까지 올라오려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그러면 혹시나 아내가 걱정할까 마음을 정리하려는 사이에 이내 다가왔다. 세상에 우리 둘뿐인양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아내에게 돌아오는 나의 여행은 그렇게 이어졌다. 아내와 나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가 가장 익숙한 곳에서, 우리가 가장 편안한 곳에서 우리는 여행한다. 언젠가 이 여행에도 끝이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도 손을 잡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을 때 우리가 남긴 발자국에 항상 서로가 서로에게 충만했음이 남아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