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은 가을에 더욱 아름답다. 오랜 건축물을 지탱하는 나무의 단정함에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조선의 실질적인 업무 공간이던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되기 전까지 약 270년 간 실질적인 법궁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스럽다. 인위적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어우러진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 한다.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책의 공간인 규장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평소에는 관람이 제한된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있다.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었다고 한다. 순종과 일제를 거치면서 식물원과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1983년에 본래의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고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창경궁에서는 국악이 울리는데, 고궁음악회의 직전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음악이 사라지자 갑자기 세상의 색깔이 무채색으로 바뀐 느낌이 들었다.평일의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투어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체험학습으로 궁궐을 채우자 비로소 궁궐의 기와며 나무들까지 빛났다. 서너 명씩 조별 활동을 하며 궁궐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둘러보느라 분주하다. 창덕궁에는 덕혜옹주가 마지막까지 지낸 집인 낙선재가 있고, 규장각과 검서청, 집현전의 전신인 홍문관(옥당)이 있다는 것을, 후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유일한 궁궐이라는 것을 익힌다. 친구들과의 가을 추억도 영글었을 것이다.
창경궁의 홍화문을 나와 왼쪽으로 올라가면 성균관의 명륜당에 이른다. 오래전 이 길 오른쪽 상가 이층에는 '그림'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다. 시를 사랑하던 청년들이 음악을 들으며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를 읽었다. 이전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없는 길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걷는다.
천년 된 은행나무가 명륜당과 마주 보고 있다. 오래된 이끼가 공부하는 사람들처럼 깊게 끼어있다. 명륜당에 이르러서야 흙 마당을 만난다. 단단한 흙이다. 궁은 흙이 없는 돌 길과 돌마당의 공간이다. 화강암이라고 들었다.이름표가 아니면 은행나무인지도 몰랐을 천년 된 나무가 살아있다. 천년을 하루처럼 무심히 사는 동안 하루를 천년처럼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