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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시간 속을 걷는다

by 김영신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은 모두 틀어졌다. 사실 구체적인 누구와의 약속은 애초에 없었다. 일단 무엇이 선행되면 하려던 일들이고 그 일들 또한 예정일뿐이었다. 내가 정한 스케줄이란 것도 일단 이러이러하면 저러저러해야겠다는 나와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계획이란 무엇인가. 기어이 행동하겠다는 다짐 아닌가. 마침내 나는 텅 빈 시간 앞에서 미처 여물지 못한 미완의 나를 만난 것이다. 마치 당장 전투라도 나갈 듯이 온갖 무기를 준비하다가 느닷없이 전쟁이 끝났다는 방송을 듣고 이상하게 어이없어진 군인이 된 느낌이 이럴까 하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릴 때 선보다는 면을 보는 거라고 한두 번 들었던 그림 수업의 영향도 있다. 선으로 슬쩍 그린 밑그림을 면을 실체를 그려보겠다고 명암으로 뭉개고 가리고 심지어 지우면서 그리던 그림은 늘 연습장에 머물러있었다. 그리는 연습만 하다가 인생이 연습이 될까 봐 두려웠던 그 느낌처럼 텅 빈 시간이 앞에 있다.

시간이 비면 하려던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나는 나를 만난다는 핑계로 남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간서치의 생활로 나를 슬쩍 피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영하로 떨어진 추운 아침의 온도보다 더 식은 나의 열정과 무욕의 의욕 앞에서 당황했다.

여전히 어두운 새벽 시간에 도착한 필사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나에게 솔직해지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는 핑계 대지 않고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려도 된다. 그것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다. 나를 위해 좋은 태도를 갖추고, 나를 위해 친절을 베풀며, 나를 위해 웃어야 한다. 이런 행동이 나에게 유익이 없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명대성 작가의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태도의 힘>의 문장인데 마치, 네가 너를 보듬고 지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전화 통화를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과연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세상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만든 다양한 방법들로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며 그려진 짙은 화장의 모습을 진짜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원시 그대로의 욕망을 나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필터를 통해서 보는 가식의 나를 나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무엇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경계면의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게 물어보았다.

시간이 나면 나는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싶다. 파주 출판단지의 지지향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며칠 살기를 하면서 헤르만 하우스를 지나며 산책하고, 심학산을 오르고, 적당히 힘이 빠지면 틀어박혀 글을 쓰고 싶다. 제주도 남서부에 한 달쯤 짐을 풀고 오전 내내 길을 걷고 추사 기념관에 매일 들러 추사의 글을 한 시간씩만 들여다보고 싶기도 하다.

책을 쓰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팔리지 않는 책을 쓰려고 글을 발행하고 싶지는 않다.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못해도 이어진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책을 쓰다가 결국 J.K. 롤링처럼 전 세계의 누군가와 닿는 그런 책의 시리즈를 쓰고 싶다. 약간의 상상을 더해서.

작가가 가장 외롭고 쓸쓸한 때라면 책이 막 출간된 즈음이다. 덧칠도 과장도 더는 할 수 없이 글은 책의 모습으로 나를 떠났고, 과연 돈이 되는 책인지 주변 사람들은 쌍심지를 켠 눈으로 지켜만 보고 있는 그때 말이다. 네가 또 책을 썼다고. 정말 작가가 되었네. 여전히 참 열심히 사네. 이런 말을 덕담으로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 출간 소식을 전하기는 어렵다. 다음 주에 내 글이 일부 실린 책이 나온다고 한다. 쓸쓸함을 파내어 글을 쓰면서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 사이에서 벌레처럼 지내야 할까. 벌써 외롭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것이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면 넷플릭스나 쿠팡플레이의 OTT 드라마를 한 이틀 밤새워서 정주행 하고 싶다. 이때는 건더기를 먹지 않고 뜨거운 카페라테를 하루에 석 잔씩 마시며 몸을 축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너 그러다 건강이 상한다고 잔소리를 들으며 혼나고 싶다. 그 사람이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내가 아직 미혼이었을 때가 지금이었다면 나는 짐을 싸서 영국으로 떠나 무용한 글이라고 욕을 듣던 오스카 와일드, 주머니에 돌을 담고 템즈강으로 떠난 버지니아 울프를 공부하고 싶다.

나는 사랑을 사랑한다. 내 사랑이 추상적인 무엇을 닮지 않고 노동과 밥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시간을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사랑이 행동이어서 다행인 시간을 살아왔다. 잠시 행동의 주체를 놓쳐 허둥거려도 곧 나는 나의 손을 잡고 시간 속을 걸을 것이다. 스케줄이 틀어지면 틀어져서 좋은 일이 반드시 일어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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