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세상의 틈새에서 세상과 이어주는 따뜻한 인사
나와 세상의 틈새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듯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것만 같은 따뜻한 책을 읽었다. <관내 여행자-되기, 둘이서3, 백가경, 황유지, 열린책들, 2025>라는 책이다. '둘이서'는 말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쓰는 에세이 시리즈다.
백가경 님은 시인이고, 황유지 님은 문학평론가이며 두 분 모두 2022년 경향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책을 까다롭게 골라 읽는 편이 아니라 물 흐르듯 내 앞에 도착한 책의 문장이 마음에 닿으면 그냥 읽는 편이다. 이 책도 그렇다. 들어가는 글에서 황유지 님의 이 문장에 나는 그만 빠져들었다.
이 둘의 여행지는 그냥 느릿느릿 재미 삼아 걸어 들어갈 수 없는 장소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으므로 나도 글을 따라 함께 걸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글 마음을 생각하는 이런 글은 마냥 나를 홀렸다.
내 눈에는 모두가 제 안의 어린아이를 껴안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성숙한 어린아이를 품고 있고 또 어떤 이는 너무도 여리고 미숙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산다. 어린아이는 아주 천천히 자란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 앞에서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는가 하면 무엇을 쫓다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의 육체는 그 어린 것을 기다려 주지 않고 생체 시계에 맞추었어. 쑥 자라 버린다. 제 안에 만들어진 그 간극이 통증을 만드는 게 아닐까? 사람은 대체로 허약하고 자주 겁쟁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이가 가엾다. 그런 성장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공동체 차원에 좀 더 나은 감각을 연결통이라 말해도 되려나? 12쪽
종로에 회사가 있을 때는 정말 좋았다. 당시의 회사 생활은 지옥의 가장 가까웠지만, 친했던 선배와 점심을 먹고 궁궐을 산책할 수 있었다. 어느 회사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람 간의 문제로 속이 박박 갈려 나갈 때 그 선배는 나를 데리고 궁궐에 갔다. 원래 속 얘기를 잘 안 꺼내는 나는 종묘 대문 밑으로 오종종히 달려가는 오소리 가족을 보며, 거대한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술술 잘도 했다. 선배는 내가 언젠가 숲 속에서 생활 한복을 입고 차를 마시고 요가를 하며 그렇게 지낼 것 같다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런 게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내가 쉴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얻게 되는 일이다. 165쪽
내 일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투명한 작업복을 스스로 만들어 입고 쉬임 없이 무한 경쟁의 싸움판으로 등 떠밀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숨 쉴 틈을 찾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를 만들고 일이 나를 잡아먹게 놔두지 않기 그리고 가까스로 힘을 찾은 뒤 투명한 아가리가 나를 위협하지 않는 곳 그곳으로 가서 몇 명의 좋은 사람과 비밀스럽게 살기. 그것을 꿈꾸며 현재를 버티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인 것 같다. 170~171쪽
나의 외로움에 대해, 나의 깊은 불안과 오래된 고독의 상관성에 대해 단 한 번만 내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결코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그럼에도 엄마의 단 한마디 말을 듣고 싶다. 그건 엄마를 탓하고 엄마가 가해자라고 지목하는 힐난이 아니라 그저 내가 아팠다는 고백이며 그에 대해 엄마가 나의 마음을 외면하는 데에 대한 사과,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끄덕임의 <미안하다>가 다인데. 그런 대화가 엄마를 그 시간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 나는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대화를 요청하고 시도했지만. 대화는 성사되지 않았다. 엄마는 묻어두는 편을 택한 것이다. 이제 나는 어쩌면 엄마에게는 그런 회고와 인정이라는 과정이 자신의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의 돌이킴일지도 모른다고 이해하고 더 이상 엄마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나의 구멍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264쪽
또 시를 쓰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한계 따위 없는 백지 같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주변인들에게 나는 잡다한 것을 얕게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쓰고 싶은 글의 정확한 그릇을 찾지 못했다. 나는 잡지 기사, 에세이, 소설을 쓰는데 관심은 없었고(어쩌면 그 모든 것을 잘 쓰고 싶었는지도) 특정 모양도 없고 어떤 용기에 담겨지지 않은 것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돌연 그것이 시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형태가 속박되지 않고, 아무도 좋은 시라는 것을 정의하지 않고 정의 내려지는 순간 시시해지고 마는 모양이 좋았다. 막연하고 닿을 수 없는 심연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동시에 나를 얼마나 망치는지. 좋은 시를 가려낼 눈이 없으면서도 맹렬하게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속 한 편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278쪽
스쳐 갔던 장소를 다시 단단히 여민 마음으로 회고하며 마음의 기록을 쓴 글은 깊다. 결국 글이란 마음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 두 명의 작가가 쓴 글들은 어느 장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힘을 얻어 내밀한 마음을 열고 나에게 조곤조곤 얘기하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세상의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제각각의 형태를 보이고 엉클어져 있거나 풀어져 있다. 글로 써서 발행하지 못할 뿐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의 눈빛은 빛난다. 그 여행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서 그때는 오해했고 해결할 수 없었던 일들과의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침내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겠다는 의지는 단단한 내면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어디를 지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따지고 들지 않아도 모든 여행의 이유란 자신을 만나 그때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고 매듭 짓고자 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으면 여행에 두근거림이 없어지는 이유 같은 것도 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제 그 매듭을 다시 풀어서 다시 매듭지을 여한이 없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책의 글에 매료되어 여러 날을 이 책을 안고 지냈지만, 글이라는 것이 무조건 길거나 깊다고 해서 나와 닿는 것만도 아니다. 나는 이 문장에 오래 머물면서 나도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한다고 공감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내가 쉴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얻게 되는 일이다. 165쪽
사람이 사는 공간이 마을이고 도시가 된다. 어느 곳이든 좋은 사람이 쉼이고 숨 쉴 곳이라고 생각했다. 번아웃의 시대에 내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사람이 되는 일만큼 멋진 여행은 다시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