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불안, 강박을 가진 불건강 INFJ
나는 타고나게 불안이 높은 기질이다.
어린 시절에도, 성인이 된 지금도
나에게 집 밖 세상은 언제나 긴장되는 곳이다
'나 지금 불안해!'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지만
몸이 자동적으로 긴장 상태를 세팅해두는 듯 한!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계획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저 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아이였지만
스무 살이 되어 본격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항상 머릿속에는 '계획', 사실상 '대비책'이 들어있었다.
학창 시절엔 분명 infp였는데, infj로 바뀐 이유도
작지만 몸속에 항상 들어있던 불안이 만들어낸
계획적 태도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 내 안에서 잠자던 불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항상 불안해서 무언가를 대비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 계획이 있었고, 불안이 신체화 증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
아직도 증상들을 가지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손은 항상 떨리고 있고 말할 때 입술이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곤 한다.
나는 괜찮은데,
내 몸 안에서 불안도가 높아 나타나는 증상들이라 사실상 눈 뜨고 있는 내내 이 증상들을 달고 산다.
우울증을 가지고 유치원에 근무하는 동안
원래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던 불안한 기질에
슬프게도 '강박증'이 추가되었다!
미어캣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워 주위를 살피고
귀는 교실 안의 작은 소리까지 듣고자 하고!
매일 5시간가량을 아이들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초점을 두고 긴장하고 있다 보니,
강박증이 생기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온 교실의 모서리에 무언가를 붙이고 다니고, 아이들의 동선에 따라 바삐 움직이며 책상을 치워버리곤 했다.
아이들이 밟기라도 할까 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딱딱한 놀잇감들은 모두 줍고 다녔다.
화장실에서 교사 모르게 갈등이 발생할까 봐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 주위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심지어 어느 날은, 책상 모서리가 날 찌를 것 같은 강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강박의 극치를 찍은 셈!
안 그래도 INFJ, 계획적 성격유형의 경향성을 지닌
성인의 나는 우울, 불안, 강박의 콜라보에 힘입어
파워 J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교실 안에서는 강박은 굉장히 심했지만
교사로서의 오늘 하루 일과 계획이 틀어져도
'아이들이 뭐 다 그런 거지~'하고 개의치 않았는데!
교무실에서는 하루의 할 일을 순위별로 적어두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일을 처리하곤 했다.
심지어 불안하고, 실수하면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으니 몇 번을 다시 열어 확인한 후에 업무를 마무리하곤 했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수정 지시가 오거나, 업무처리 방식을 바꾸겠다고 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문제는 우리 유치원에서 '수정'이란 숨 쉬듯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
특히 계획에 없던 연령 회의나,
전체 회의가 잡히면 솔직히 굉장히 짜증 났다.
갑자기 0시 0분(20분 뒤....)에 모이라고 하거나,
원감님께서 '-한 안건'으로 교사들 모이라고 하면
화를 넘어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고 마스크 속으로 심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불안과 강박이 점점 치솟는 상태에서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니 무슨 소릴 들어도 부정적일 수밖에.
한껏 날카로워진 시선으로 회의 안건을 바라보니
모든 회의에서 문제가 될 만한 지점만 보였고
그러면 결국에는 회의 자리에서 싫은 소리를 해야 하니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치밀한 계획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이,
그 계획이 깨지는 순간 터져버리는 불안과 강박이
나는 몹시도 싫었다.
정말 환자가 된 기분이었기 때문에!
난 진짜 정신질환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게 싫었다.
휴직을 한 지 7개월째,
유치원 교사로서의 삶을 중단한 지도 7개월째!
유치원에 복직하기 어렵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남들은 쉰다고, 일 안 한다고 부러워했지만
내겐 나와의 싸움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던,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마음껏 '아프고 있는' 이 시간 덕에
이제 강박은 많이 사라졌고, 불안은 줄어들었다!
수많은 아픔 중에 강박 하나만 나아졌을 뿐인데도
난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나는 '할 일을 미루는 것'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심지어 미루기를 즐기기도 한다.
오늘도 원래 발레 다녀오고, 씻고 밥 먹고 쉬다가
교육대학원 영어 강의를 들으려 했지만!
날씨가 너무 좋고, 하늘은 파랗고, 이 나른한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오늘 강의는 내일로 미뤘다^^
원래 긴장을 놓지 않고 '나와 우리 애들, 그리고 물건'은 내가 꼭 챙겨야 한다는 강박이 대단했는데,
이제는 그 강박이 사라져
맨날 집에 무언가를 두고 외출한다.
특히 지갑은 하도 자주 잃어버려, 크로스로 어깨에 멜 수 있는 지갑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멍 때리며 걷다가 다른 길로 가거나, 버스를 잘못 타는 일도 생겼다. 나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찌 보면, 야무진 사람이 허당이 된 모양새지만
나는 내 변화가 정말 좋다:)
날 스스로 망가뜨리는 원인이 줄어든 것 같고,
이제 나도 조금만 더(사실은 조금이 아니지만)
내려놓으면 그토록 갖고 싶었던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