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유치원 교사의 우당탕탕 하루 #2

교무실에서 우당탕탕

by 해봄
PM 13:40 아이들 귀가 후폭풍 맞기

정신없이 아이들을 보낸 후, 몸과 영혼의 힘이 빠져나간 채로 개다리춤을 추며 교무실 자리에 앉는다. 오늘 오전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차원에 다녀온 기분!

사방의 모든 선생님들이 초점이 없다.

여기는 좀비 교무실이다.


PM 13:45 각 반 출결 조사하기

5분도 쉬지 못하고 이 교무실의 정적을 내가 깬다.

"몇. 명. 왔???"(오늘 몇 명 왔냐는 뜻)을 크게 외치면 사방에서 "새싹 16, 햇살 11" 하며 초점을 잡고 외쳐주신다. 빠르게 엑셀 파일에 입력한다.

교무실에 없는 선생님들께는 교실로 전화를 건다.

전화를 안 받으시면 직접 찾아가 버린다.


재촉하는 느낌이 너무 강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이걸 2시까지 제출하지 않으면 교육지원청의 독촉 전화를 받기 때문이다.


PM 13:55 행정업무 시작

오늘도 공문이 또 잔뜩 배정되어 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코로나 역학조사 기초자료'를 만들어놓으라고 한다. 서식을 열어보니 아찔했다. 최소 일주일은 걸릴 각.


다른 공문에서는 가정통신문을 보내라고 한다.

필수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다지 중요한 내용도 아닌 것 같다. 약간 교육청 사업 홍보 느낌.

보통 다른 유치원에선 이런 공문은 처리만 하고 넘긴다는데, 교육지원청의 충실한 하인인 우리 유치원은 그럴 리가 없다.

또 쓸데없는 가정통신문을 만든다.


PM 14:20 가정통신문 기안

말은 대충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고퀄리티로 만든 쓸데없는 가정통신문을 업무포털에 기안한다.

그러자 원감님께서 나를 부른다.

"이거 원장님께 사전 검토받은 건가요?"
"아니요. 이제 검토하고 수정하던지 결재하던지 하시는 거죠."
"선생님, 기안 올리시기 전에는 사전 검토를 받아야죠. 원장 원감도 무슨 내용이 기안 올라오는진 알아야 하지 않나요?"
"업무포털에서 확인하고 업무 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 아닌가요? 업무포털은 그냥 형식적인 건가요? 제 기안문이 부족하다면 정식 사유를 적어 반려해주세요. 그럼 시정하겠습니다."
"선생님, 사전 검토를 원래 미리 드리는 게 예의죠"
"업무포털에 수정, 반려 기능이 있는데 왜 종이 인쇄해서 구두로 사전검토받아야 하죠?
"저는 이건 명백히 과다 행정이며, 추후 문제가 발생할 시 업무포털에 원장 원감님이 수정, 반려하신 내용이 없으면 제가 다 뒤집어쓸 텐데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원래 그렇게 하는 거다'말고, 절 설득하시려면 납득할만한 정당한 근거를 대 주세요."


하... 오늘도 한판 하고 말았다.
하지만 난 그냥 당하곤 못 산다.
착한 바보가 되느니, 나쁜 여우로 살 테야


PM 14:50 드디어 양치하기

옥신각신 하다 보니 벌써 세 시가 다 되어간다.

메신저를 열어보니 부장님께 "15시에 원장실에서 원장, 원감, 7세 반 교사들 참석해 졸업식 회의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하.... 10분 남았다.

이제야 오늘 화장실도 못 갔고, 양치도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칫솔을 들고나간다.


PM 15:00 졸업식 관련 회의 참석

어제 7세 반 교사들끼리 졸업식 구성과 진행에 대한

타임테이블을 짰고, 오늘은 원장 원감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교사들의 의견은 당연히 묵살되고 모든 게 달라졌다. 대체 우린 어제 우리끼리 회의를 왜 한 걸까...?


원장님의 생각 속 졸업식은 '학부모님께 감사'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서로서로의 졸업에 축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방향성이 정말 달라졌다.


아이들에게 축하의 의미로 한 송이씩 주고 싶었던 꽃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의미로 아이들이 꽃을 드리는 걸로 바뀌었다.


대체 누굴 위한 졸업식일까? 오늘도 맥이 빠진다.

유치원의 주인공은 아이들인데, 결국 아이들은 모든 행사에서 뒷전인 느낌.


난 그래서 이 유치원이 참 싫다.

우리 애들, 나라도 더 예뻐하고 존중해줘야지.


PM 16:00 학부모 상담

오늘의 회의는 굉장히 일찍 끝난 편이었다.

왜냐면 교사들이 학습된 무기력에 지쳐 원장님이 무슨 말을 하던 그러려니 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도 독재의 유치원에 한발 더 다가섰다.


아차!!!! 네시가 다 되었는데 결석생 학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지 않았다.

3일째 감기로 등원을 못하는 친구가 있는데 전화해서 어머님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들이 아이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하고,

아이와도 전화를 이어받아 이야기를 나눈다.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없어 보인다. 푹 쉬고 만나자


현장체험학습 보고서를 안 낸 어린이의 학부모님께도 전화드려 독촉과 함께 요즘 유치원에서 아이의 근황을 전달해드리고,


내가 회의에 갔던 동안 우리 반 어머니들께 걸려온 문의 전화에 대한 회신을 드리려 전화를 건다.

한번 전화 걸 때마다 근황 토크와 가정에서의 아이 모습 묻기는 필수.


그래도 학부모 상담을 할 때는 담임교사로서 할 일을 하는 것 같아 싫지 않다.

사실상 오늘 오후 유일하게 교사로서의 업무였다.


PM 16:30 퇴근시간(이지만 퇴근은 못해)

몇몇 학부모님들과 통화를 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지나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이 골치 아픈 유치원을 떠나고 싶지만, 남은 업무가 산더미고 내일 수업 준비는 단

1초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내일 어떤 수업을 할지 구상조차 못 했다.


오늘 학부모 상담한 내용을 수첩에 날아가는 글씨체로 대강 적어두고, 오늘 아이들을 관찰했던 내용을 더 날아가는 글씨체로 적어 둔다.

이제 더 이상 손 힘이 없다.


교무실 어딘가에서 이번 주 금요일이 사진 올리는

날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세상에!!!!

급히 사진첩을 뒤져 아이마다 홈페이지에 올릴 만한 사진이 있는지, 사진 개수가 동일한지 체크한다.

역시나 꼭 건진 사진이 적은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은 내일부터 집중적으로 찍어야지!!!!


아... 내일 또 7세끼리 모여 다음 달 월간 계획안을

짜야하니 다음 주제에 무슨 놀이를 할 지도 찾아봐야 한다... 한껏 충혈된 눈으로 자료조사를 한다.



이젠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 같다...

한계 도달....

PM 17:30 쓰러지기 직전에 억지 퇴근

식이장애를 겪는 내가 오늘 먹은 거라고는 물과, 비타 오백, 그리고 초코우유 하나뿐.

초과근무를 하고 싶어도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에게 남은 일은

내일 수업 준비...

코로나 역학조사 기초자료 작성(손도 못 댐)

방역물품 재고 확인 후 주문

다음 달 놀이 재료 찾고 주문

졸업식 물품 알아서 생각해서 주문(물건 하나하나 원장님께 검토를 받으면 졸업 전까지 못 살 거니까 그냥 욕먹고 선생님들 마음에 드는 걸로 살 테야)

사진 모자란 아이들 찍기

놀이 보고서 구상, 놀이 보고서용 사진 찾기

그 외에도 자잘 자잘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일들

....... 그리고 회의



오늘 이 유치원에서 나만의 공간에서 숨 돌릴 틈은 전혀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어지럽고, 구역질 나고, 눈꺼풀과 손발 떨리고, 숨쉬기조차 어렵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일을 해야 할까...?

오늘도 세상 무게를 다 짊어진 상태로 택시에 실려 귀가한다. 걸을 힘도 없다

수업 준비는 집에 가서 해야지.......

누가 공립유치원 꽃길이라고 했어????!!!!!
"공립유치원도 그저 유치원일 뿐이다"
그저 그만두기 쉽지 않은 '교육공무원이라는' 겉보기에만 보기 좋은 족쇄가 채워진 곳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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